스승이 남긴 악보로 친 바흐…손민수 “밤하늘 24개의 별 같아”

하이페리온 첫 앨범 바흐 ‘평균율’ 1권
2023년 떠난 스승 러셀 셔먼에게 헌정
오는 27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 열어


피아니스트 손민수 [목프로덕션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브루투스, 너마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로마의 정치가 카이사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가장 믿었던 브루투스가 자신에게 칼을 겨눈 순간의 절규. 이 한마디는 거장 음악가가 쓴 시의 영감이 됐다. 미국 피아니스트 러셀 셔먼이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 2번 c단조 프렐류드를 두고 습작처럼 남긴 시다.

셔먼이 세상을 떠나고 1년쯤 지난 어느 날, 그의 아내이자 피아니스트인 변화경은 남편이 공부하던 평균율 악보를 오랜 제자 손민수에게 건넸다.

“(셔먼) 선생님께선 언젠가 평균율을 녹음하고 연주해야 하는데 너희 가르치느라 시간이 없어서 못 하고 있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 악보에 선생님이 남긴 자취를 하나하나 보면서 너무나도 깊은 영감을 받았어요.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들이었고, 옛날로 돌아가 다시 선생님께 레슨을 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손민수는 셔먼의 시를 두고 “이 곡에서 이런 상상을 하셨구나 싶었다”며 “내가 생각하던 범위보다 훨씬 더 넓은 세상을 느낄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스승이 남긴 건 시만이 아니었다. 악보에 적힌 운지법(어느 손가락으로 어느 건반을 누를지 정한 번호)은 처음엔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하지만 스승의 운지법엔 까닭이 있었다. “모든 게 음악을 위한 방식이었지, 피아노를 손쉽게 치려는 방식은 전혀 아니었어요.” 그 악보는 손민수가 바흐 ‘평균율’을 다시 돌아보게 된 가장 큰 계기였다.

피아니스트 손민수가 영국 클래식 레이블 하이페리온과 전속 계약을 맺고 첫 앨범을 냈다. 지난 2일 나온 바흐 평균율 1권. 스승이 미뤄 뒀던 바로 그 곡이다. 앨범은 2023년 세상을 떠난 셔먼에게 바쳤다. 임윤찬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음반 녹음 과정을 두고 “고난의 길을 음악가로서 들어가 봤다”고 돌아봤다.

바흐라는 우주 “밤하늘 24개의 별 같아”


손민수의 시선은 스승의 필적을 거쳐 바흐라는 우주로 향했다. 그는 평균율을 밤하늘의 ‘24개의 별’에 빗댔다. 평균율 1권은 장조 12개, 단조 12개 등 24개 조성마다 프렐류드와 푸가를 한 쌍씩 묶은 24쌍, 48곡으로 이뤄져 있다. 15년 전 뉴욕타임스가 꼽은 ‘2011년 최고의 클래식 음반’에 이름을 올린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하나의 주제를 차곡차곡 쌓아 처음의 아리아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면, 평균율은 전혀 다른 지평이다.

피아니스트 손민수 [목프로덕션 제공]


“골드베르크가 신에 관한 질문, 성 삼위일체를 이루는 바흐의 트라이앵글 같은 짜임새로 듣는 이들을 저절로 따라오게 하는 힘을 가졌다면, 평균율은 조금 달라요. 인간이 삶을 살아가며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복잡한 질문과 감정을 24개의 여정에 담아냈어요. 밤하늘의 24개 별을 바라보며 하나의 긴 여정을 함께하는 과정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 별에 닿기까지 그는 긴 시간을 지나왔다. 2008년 12월 31일, 그는 사고로 오른손을 다쳤다. 3년 동안 오른손을 전혀 쓰지 못하는 사이 왼손이라도 더 많은 것을 해내려다 온전한 쪽마저 혹사했다. 오른손이 낫자 이번엔 왼손이 “최악의 상태”가 됐고, 결국 왼손도 수술받았다. “제가 혹사한 왼손이 마지막까지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어요.” 손을 치료한 시간이 2008년부터 코로나19 무렵까지 이어졌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서바이벌 모드였어요. 연주를 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를 찾으면서 살 수 있을까, 한 번 사는 인생에서 음악가로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다가온 대답이 베토벤 소나타와 바흐의 평균율이었어요.”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하는 과정은 그에게 “잃어버린 손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는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가 스윙 하나를 고치려고 오랜 시간을 들인 과정을 책에서 읽고, “피아노 앞에 앉아 가장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대하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돌아봤다. 지금은 팔의 통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였기에 너무나도 가혹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도 가급적 이야기하지 않았던 건, 제가 겪은 일이 삶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에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부끄럽습니다.”

스승에게서 제자로…셔먼, 변화경 그리고 임윤찬으로


그는 스승 러셀 셔먼과 변화경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꺼냈다. “두 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제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는 걸 너무 잘 알아요.” 음악적으로 풀리지 않는 질문이 닥칠 때마다 그는 “셔먼 선생님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시고 어떻게 말씀하셨을까”부터 떠올린다. 그가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기교가 아니라 음악, 하루하루의 삶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음악적인 질문이든 인생의 질문이든 쉽게 결론에 도달하지 말고, 무한한 가능성을 계속 탐험해 나가라는 게 두 분의 가르침이었어요. 그렇기에 오늘의 연주와 내일의 연주도 달라야 한다는 게 연주자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15년 전과 같은 연주를 하고 있다면 아마 굉장히 혼이 날 것 같아요.”

피아니스트 손민수 [목프로덕션 제공]


스승에게서 받은 태도는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손민수는 임윤찬을 길러낸 스승이다. 손의 통증과 씨름하던 2017년, 그는 한예종 영재교육원에 들어온 열세 살 임윤찬을 만났다. 임윤찬은 “바흐는 우리의 가장 위대한 선조이자 근원”이라는 손민수의 조언을 바흐의 ‘골드베르크’ 앨범을 내며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손민수는 제자의 성취 뒤편에서 스승의 자리를 키우지 않았다. 흔히 알려진 ‘골드베르크 추천설’에도 “내가 추천하지 않았다”고 했다.

“거의 첫 레슨에서 평균율을 공부해 보자고 했는데, 골드베르크를 먼저 치고 싶어 한 건 윤찬이었어요. 어느 레슨엔가 변주 10개 정도를 먼저 공부해 왔더라고요. 놀랐지만, 다른 곡들을 먼저 공부하고 경험한 뒤에 다시 들어가 보면 좋겠다고 했죠. 그 시점을 정한 것도 윤찬이었습니다.”

손민수가 임윤찬을 비롯한 제자들 곁에서 지키려는 것은 정답을 내려 주는 권위가 아니라 함께 길을 찾는 겸허함이다. 그는 “내가 부족함투성이라는 걸 너무 잘 알기에, 학생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질문을 하는지 유심히 들으려 한다”며 “거기서 파생되는 질문을 계속 이어 가며 같이 찾아 나가는 것, 그게 제가 하는 작업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어 “가르치는 일은 제 연습 과정의 연장선이고 서로 주고받는 과정”이라며 “오히려 제가 더 많이 배우는 과정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클래식 음악계가 유독 영재 음악가, 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낸 ‘새 얼굴’에 환호하는 것도 눈에 띄는 현상이다. 손민수는 그러나 새로운 세대의 몫을 긍정했다.

“새로운 세대가 자기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건 너무 중요해요. 새로운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나은 면이 없다면 그 사회는 어디로 가는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는 그러면서도 “모든 연주자에게는 자기 몫이 있다”며 “나는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고 음악으로 소통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다만 한두 마디로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며, 더 지혜로운 대답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 그가 지금 바흐를 연주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여기에 닿아 있다.

“지금 우리는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빠른 선택을 강요받고 있어요. 어떤 목소리가 도드라지게 들리면 대다수의 목소리는 그 목소리를 따라가게 되죠. 그런데 바흐의 푸가는 모든 목소리가 다 중요하고, 하나의 목소리가 아무리 작고 여리더라도 들려야 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목소리들이 어떻게 조화롭게 함께 존재할 수 있게 하느냐예요.”

녹음은 독일 바이에른 알프스의 슐로스 엘마우에서 프로듀서 한스 키퍼와 함께했다. 한 음 한 음을 깊이 파고든 녹음을 마친 손민수의 바흐는 이제 관객과 만나는 무대(10월 27일, 예술의전당)로 향한다. 그는 “녹음이 한 음 한 음, 제가 들어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보는 과정이었다면, 연주는 연주자와 관객에게 주어진 한 번뿐인 시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공유하는 과정이 될 것”이라며 “바흐의 음악이 그날의 연주로 그치지 않고,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 새로운 의미를 계속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의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