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승객은 비행기 못 탑니다”…러 페스트 확산 우려에 시험대 오른 ‘항공 방역망’

2021년 한국 인천공항에서 작업자들이 아시아나 항공기 내부에 소독제를 뿌리고 있다. [게티이미지]

[헤럴드경제=정목희 기자] 이륙 직전의 비행기 안. 전염병 전문가 데이비드 프리드먼 교수는 두어 줄 앞에 앉은 남성을 유심히 바라봤다. 온몸이 땀에 젖은 채 누가 봐도 아파 보이는 모습이었다. 독감인지, 코로나19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나쁜 병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승무원이 이 승객과 짧게 대화를 나누더니 기장과 함께 돌아왔다. 기장은 승객이 비행하기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프리드먼 교수는 “기장이 땀에 젖은 환자를 한 번 보더니 ‘상태가 말이 아니니 내리셔야겠다’고 하더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미국 앨라배마대 버밍햄 캠퍼스 명예교수로, 여행자 사이의 감염병을 추적하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참여한 인물이다.

지난 7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이와 같은 현장 판단은 미국 당국이 감염병을 막기 위해 항공사에 기대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다. 항공사는 감염병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차단하는 비공식 ‘최전선’의 역할을 맡고 있다. 사스(SARS)와 에볼라, 코로나19 등 세계적 유행이 잇따르면서 이 체계는 갈수록 확대·강화돼 왔다.

이 시스템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러시아에서 폐렴형 페스트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있는 실험실 기술자 사망 사건이 발생해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당국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시베리아·극동 페스트 연구소에서 일하던 직원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을 굳게 닫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가 코로나19를 겪었던 터라 외딴 지역의 희귀병 한 건이 세계적 재앙으로 번질 수 있다는 가정이 억지 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동안 항공 방역망이 완벽히 기능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 세계를 잇는 항공망이 질병을 퍼뜨리는 통로인 동시에 조기 경보 장치로도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프리드먼 교수는 “예전과 비교하면 대규모 유행의 전조가 되는 희귀 사건에 대응하는 능력이 훨씬 나아졌다”고 말했다.

승무원이 병을 진단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승객에게서 아픈 기색이 보이는지 살피는, 이른바 ‘수동 감시’를 한다. 여기에 항공기 오수(汚水)에서 새로운 감염병 위협을 찾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고, 주요 국제공항 허브에서 공기를 채취하는 계획도 추진되고 있다. 미국은 보건 상태나 감염병 유행 가능성을 이유로 입국을 제한하거나 거부하는 권한을 사용하고 있다.

한 승객이 마스크를 착용한 채, 기내에 자신의 짐을 올려놓으며 비행 준비를 하고 있다. [123RF]


실제로 지난 4월 미국 당국은 네덜란드 크루즈선에서 치명적인 안데스 한타바이러스가 퍼진 뒤 이 배에 탔던 미국인 승객 18명에게 42일간의 격리 조치를 내렸다. 일부 승객은 네브래스카대 의료센터에서 격리를 마쳤는데, 이는 대부분의 전염병에 적용되는 노출 후 지침을 크게 웃도는 기간이었다.

한 달 뒤인 5월에는 트럼프 행정부가 에볼라가 확산하던 콩고민주공화국에 최근 다녀온 외국인과 일부 비시민권자의 미국 입국을 막았다. 그로부터 두 달 뒤에는 이례적으로 콩고에서 돌아오는 미국 시민의 항공편 탑승도 제한했다. 제3국에서 먼저 21일을 보내야만 탑승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른바 ‘탑승 금지(Do Not Board)’ 명령이다.

우간다나 남수단에서 21일 이내에 출발하는 일부 미국 시민과 미국 국적자는 공중보건 입국 검역 시설을 갖춘 미국 공항으로만 들어오도록 했다. 21일은 치사율이 매우 높은 출혈열인 에볼라의 최대 잠복기다. 이런 여행 제한 조치는 30일마다 갱신되며 현재도 유효하다.

프리드먼 교수는 러시아의 의심 사례 한 건이 더 큰 유행으로 번질 경우 미국이 최근 러시아 특정 지역을 다녀온 사람에게 ‘탑승 금지’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나마 다행인 점도 있다. 대부분의 페스트 감염은 무증상 상태에서 퍼지는 일이 드물다는 것이다. 프리드먼 교수는 “페스트는 누군가가 아주 심하게, 눈에 띄게 아플 때까지는 전염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항공기 오수 검사를 확대해 왔다. 2022년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일부 국제선을 대상으로 시범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국내 공항 몇 곳으로 넓혔다. 다만 이 시스템은 아직 페스트를 가려내도록 설계돼 있지 않다.

호주 콴타스항공과 퀸즐랜드대 연구팀은 항공기 오수를 활용한 전 세계 유전체 감시 체계를 제안했다. “미래 팬데믹을 조기에 경고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연구팀은 배관이 막히지 않게 하면서 시료를 더 쉽게 모으는 장치도 개발했다. 예전처럼 “배출 차량 밑에 양동이를 받치는” 방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빠르게 퍼지는 병원체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비행기 내 질병 전파를 연구해 온 비키 허츠버그 에모리대 데이터과학센터 설립 소장은 “오수 검사로 뭔가는 알 수 있겠지만 이미 늦을 수 있다”며 “카자흐스탄에서 애틀랜타를 거쳐 오스틴까지 날아갔다면 결과가 나올 때쯤 그 사람이 어디 있을지 누가 알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