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러시아산 경유 제재 해제…푸틴과 통화 뒤 발표

트럼프, 푸틴과 통화 직후 발표
러시아산 경유 제재 6개월 해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한 뒤 러시아산 경유를 미국과 세계 시장에 공급받기로 합의했다고 9일(현지시간) 발표했다. 미 재무부는 같은 날 러시아산 경유 거래를 내년 4월 7일까지 허용하는 한시적 제재 완화 조치를 내놨다. 다만 구체적인 공급 물량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에만 담겼고, 크렘린궁은 수치를 제시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루스소셜에 “러시아가 미국과 세계 시장에 즉시 30만t 이상의 경유를 공급하고, 11월 중 50만t, 그 직후 100만t을 추가 공급하기로 했다”고 적었다. 이후 러시아 정유시설 상태에 따라 300만t이 더 들어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발표대로라면 총 480만t을 웃도는 규모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호르무즈 해협 ‘완전 통제’와 이번 합의가 맞물려 미국과 세계의 경유 가격이 빠르게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농민과 목장주, 트럭 운전사를 위한 가격 인하가 최우선 과제라는 점도 내세웠다.

다만 크렘린궁은 구체적 공급 시기와 물량은 언급하지 않았다. 크렘린궁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통화에서 “러시아는 미국과 세계 시장에 석유와 석유제품을 공급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부총리는 타스통신에 “경유 수출 제한을 예정보다 앞당겨 즉각 해제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르면 10월 중 미국에 공급을 시작할 수 있으며 내수 물량도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러시아산 경유의 판매·인도·하역·수입을 내년 4월 7일 0시 1분(미 동부시간)까지 허용하는 임시 일반면허를 발급했다. 미국으로의 수입도 허용 대상이다. 그 밖의 대러 제재는 유지되며, 러시아 중앙은행·국부펀드·재무부와 관련된 계좌 거래는 면허 범위에서 빠졌다.

미국은 2022년 3월 행정명령으로 러시아산 원유와 석유제품, 액화천연가스(LNG), 석탄 수입을 금지해 왔다. 이번 면허는 경유 거래만 한시적으로 열어준 조치다.

이 조치의 배경은 치솟은 경유값 때문으로 읽힌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평균 경유 가격은 8일 기준 갤런당 6.28달러로,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의 대이란 전쟁 개시 이후 70% 뛰었다. 지난달 하순에는 6.5달러를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은 11월 3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다.

러시아발 공급 차질도 가격을 밀어 올렸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정유시설 드론 공격으로 내수 연료난이 심해지자 7월 8일 생산업체의 경유 수출을 금지했다. 이후 세 차례 연장해 10월 31일까지 유지하기로 한 상태였다.

제재 완화는 러시아가 먼저 요구해 온 사안이기도 하다. 푸틴 대통령은 이달 1일 러시아에 경유는 충분하지만 제재 탓에 세계 시장에 공급하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로이터는 소식통을 인용해 푸틴 대통령의 특사 키릴 드미트리예프가 지난달 워싱턴에서 러시아 주요 석유기업 전체에 대미 경유 수출 면허를 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협상에 시장은 반응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 경유 선물은 발표 직후 5% 가까이 내려 갤런당 4.64달러에 거래됐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물량이 작아 가격을 끌어내리기엔 역부족이라고 본다. 초기 물량 30만t은 약 225만 배럴이다. CNN은 러시아의 수출 금지로 시장에서 빠진 물량이 하루 약 80만 배럴이며, 10~11월 공급분 80만t을 합쳐도 미국 수요의 하루 반 분량이라고 짚었다. 원자재 분석가 로리 존스턴은 이번 합의를 “알맹이 없는 발표”라고 평가절하했다.

피커링에너지파트너스의 댄 피커링 최고투자책임자는 CNN에 연말까지 공급이 많아야 5~6% 느는 정도라고 내다봤다. 도움은 되지만 세계 경유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준은 아니라는 진단이다.

러시아가 약속한 물량을 댈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미 댈러스 연방준비은행은 8일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올여름 러시아 정제능력이 최대 60% 줄었다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는 이번 주에만 러시아 정유소 4곳을 타격했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엑스(X)에 “푸틴에게 주는 선물은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썼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에너지 시설을 파괴하지 않으면 러시아 정유소 공격을 멈추겠다는 상호 조치를 미국에 제안했다고 공개했다. 합의 발표는 우크라이나 대표단이 마이애미에서 스티브 위트코프 특사, 재러드 쿠슈너와 종전 협상을 벌이는 가운데 나왔다.

미 의회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대러 제재법을 공동 발의한 리처드 블루먼솔 상원의원(민주)은 이번 합의가 의회의 입법 취지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공화당 소속 돈 베이컨 하원의원도 지금은 제재를 풀 때가 아니라 푸틴의 전쟁 자금줄을 죄는 데 쓸 때라고 꼬집었다. 진 샤힌·척 슈머·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상 민주)은 공동 성명에서 우크라이나와 유럽 동맹에 대한 배신이라고 규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러시아 에너지 부문을 겨냥한 제재 법안에 서명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