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웅’ 벗고 배불뚝이 거부된 톰 크루즈
![]() |
| 영화 ‘디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이맥스 스크린 위로 벨벳의 커튼이 카메라 조리개처럼 열린다. 본편의 서사가 채 시작되기 전, 관객과 스크린 사이에 놓여 있던 인위적인 장막이 먼저 걷힌다.
화면 안으로 밀려드는 것은 17세기 유럽 고전 명화를 화폭째 옮겨놓은 호사롭고 퇴영적인 공간. 세트인지 평면 회화인지 쉬이 분간하기 어려운 고풍스러운 소파와 침대, 박제된 시간성을 품은 앤티크 가구들이 도열해 있다. 침체된 정경 한가운데, 밀가루를 뒤집어쓴 듯 창백하고 무른 피부의 노인이 길고 나른한 하품을 뱉어낸다. 듬성듬성 성긴 머리칼 아래로 흘러내린 피부는 노욕(老慾)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듯 둔중하다. 곁에 웅크린 고양이의 털마저 윤기를 완전히 잃은 채 푸석하다.
노인은 애지중지해 온 늙은 고양이 매기의 입가로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기름진 참치 살점을 휘휘 저어 떠먹이려는 (욕망 가득한) 손길. 죽음의 문턱에 닿은 노묘는 그 마지막 호의마저 거부한 채 늙은 집사 위로 배설물을 쏟아낼 뿐이다.
그가 바로 지상 최고의 거부(巨富), 디거 록웰. 조부가 쥐었던 삽 한 자루로 대지의 심장을 뚫고 ‘검은 황금’을 길어 올린 개척 신화를 가문의 유산으로 숭배해 온 3대 석유 재벌이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디거(Digger)’(2일 개봉)은 지상에서 가장 막강하고 추악한 자본의 화신을 박제된 유리관 속에 밀어 넣으며 서막을 연다.
괴팍한 석유 재벌의 아침 일과를 훔쳐보는 시간. 그토록 안온한 고전적 관조는 러닝타임 30분이 지나면, 난폭하게 분쇄된다. 시추 시설 붕괴를 은폐하려는 디거(톰 크루즈)와 미국 대통령 컴슨(존 굿맨)의 밀담 중, 프레임 가장자리에서 무대 스태프의 거대한 손이 불쑥 난입하면서다. 배우가 대사를 잊고 얼어붙자, 카메라는 세트 밖으로 급격히 물러서며 조명 타워와 객석, 연출자의 격앙된 고함을 비춘다.
영화는 관객이 ‘현실’이라 믿었던 세계를 완전히 디집는다. 대체 이 영화는 무엇인가. 영화는 극중극의 액자 구성으로, 두 세계가 공존한다. 영화 초반 30분, 관객이 본 것은 연극 ‘파실 풀스’(Fossil Fools)‘의 리허설 장면. 톰 크루즈는 이 영황에서 연극 배우 커티스 마크슨과 그가 연기하는 디거 록웰을 오간다.
![]() |
| 영화 ‘디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영화 속 영화’가 아닌, ‘영화 속 연극’의 3중 액자 형식을 택했다는 점이다. ‘디거’의 결정적인 ‘미학 승부수’가 바로 이 장치에 있다. 영화 속 영화는 관객이 촬영장 밖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허구의 겹’을 벗어날 수 있는 안도감을 준다면, 연극은 무대와 객석의 ‘공존’을 통해 동시성을 전제한다.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잠시 그 세계를 믿어준다. 그것이 무대와 객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냐리투 감독은 이 암묵적 결탁을 영화 안으로 가져왔다. 그는 인도 매체인 힌두스탄 타임스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는 리얼리티 쇼 속에 있고, 모든 것이 퍼포먼스적이다”라며 “휴대전화 속에 너무 많은 서사와 파편화된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공동의 현실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파악하기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디거’가 극중극 형식을 가져온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흔히 연극을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하듯, 영화는 극중극을 통해 ‘작금의 현실’을 시각화하고, 이 현실을 ‘누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속 연극 ‘파실 풀스’가 보여주는 세계는 노골적이고, 단선적이며, 키치하다. 인물들은 놀랄 만큼 납작하다.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하는 대통령 컴슨은 허영과 과잉된 자의식의 화신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석유 재벌 디거는 자신의 욕망을 인류의 욕망으로 치환하고 가해자인 자신을 구원자로 만드는 지독한 장사꾼이다. 무능한데 ‘미국 우월주의’와 군사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을 한 몸에 떠안은 국방부 장관까지... 영화는 인물들의 무지와 편견을 조롱하기 위해 불편할 정도의 차별적 대사를 그리고, 이들을 ‘정치적 밈’으로 그린다.
![]() |
| [헤럴드뮤즈=윤병찬 기자] 할리우드 배우 톰크루즈가 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 서울 호텔에서 열린 영화 ‘디거’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편, 영화 ‘디거’는 꼰대 괴짜 재벌 디거 록웰(톰 크루즈 분)의 그린란드 빙하 시추 시설에서 발생한 작은 균열이 전 세계를 뒤흔들 역대급 대재앙이 시작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오는 3일 개봉한다. |
깊이도 없고, 입체적이지도 않은 이 인물들은 흥미롭게도 현실을 닮았다. 이 세계의 정치 언어가 이미 캐리커처처럼 납작해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정책이나 숙의, 역사적 맥락을 지운지 오래. 대통령은 정경유착의 산물인 미국의 시추 시설이 초래한 빙하 붕괴와 기후재난을 두고도 ‘러시아와 중국’이 합작 공세라 강변하고, 세계 1위 국방력으로 자연에도 맞설 수 있다고 천명하는 망상적 캐릭터다.
이냐리투 감독은 정교한 정치풍자를 만들지 않고, 희극처럼 변해버린 현실을 우스꽝스러운 희극으로 확대해 보여준다. 영화 속 연극을 만든 젊은 여성 연출가의 웅변이 이냐리투 감독을 대변하는 것처럼 읽힌다. 과장된 현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 혹은 미국 고위 관료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미 과장된 세계가 됐다는 직시에서 빚어낸 의도된 연출처럼 읽힌다.
‘디거’의 판을 쥐고 흔드는 주인공은 톰 크루즈다. 반세기 동안 ‘탑건’의 매버릭, ‘미션 임파서블’의 에단 헌트처럼 불패의 ‘미국 영웅’으로 살았던 그는 이 영화에서 세 개의 페르소나를 꺼낸다.
실재하는 슈퍼스타 톰 크루즈, 기후 재앙으로 카리브해 상공에서 실종된 딸의 비보를 듣는 연극 배우 커티스 마크슨, 무대 위에서 지구를 파멸로 몰아넣은 오만한 석유 괴물 디거 록웰이라는 세 겹의 자아다.
보형물로 일그러뜨린 안면과 부분 탈모, 축 처진 복부와 엉덩이를 드러낸 디거 록웰은 영웅 톰 크루즈의 날렵한 신체성을 완벽히 탈색시킨다. 세계를 구원하던 배우의 신체가 노욕과 부패로 얼룩진 미국 자본주의의 추악한 물신으로 전락하는 광경은 그 자체로 메타포를 만든다.
![]() |
| 영화 ‘디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
디거 록웰이 유럽 의회 청문회 단상에서 쏟아내는 약 10분간의 무삭제 원 신 원 테이크 독백 시퀀스는 상당히 흥미롭다. 전 지구인 앞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가해자가 자신의 책임을 둘러싼 논리를 쏟아낼 때다. 값싼 화석연료와 문명의 안락을 탐닉하며 지속 불가능한 번영에 무임승차해 온 것은 바로 인류 전체였다고 열변을 토하는 크루즈의 안광은 악인의 궤변을 넘어선다. 영웅의 얼굴을 빌려 관객을 공범의 자리로 강제 호명하는 이 순간, 스크린을 마주한 관객의 숨통을 조여오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의 각성을 불러와야 하나, 영화는 그러한 힘으로 밀어붙이진 못했다.
디거 록웰을 연기하는 배우 커티스와 연출가 한나(소피 와일드 분)는 시시각각 부딪힌다.
참사를 휴머니즘적 고뇌로 복원하려는 커티스의 부르주아 리얼리즘, 현실 자체가 이미 ‘삼류 촌극’이기에 그로테스크한 캐리커처만이 진실을 폭로할 수 있다는 한나의 급진성은 팽팽히 맞선다. 커티스는 자신이 만들고 있는 이 연극이 지독하게 과장되고 평면적이라며, 시종 희극으로 만들어내는 연출의 작법을 고통스러워 한다. “연기는 진실해야 하고, 진실한 연기만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을 수 있다”고 믿는 배우다.
하지만 백악관 관료들이 재앙을 군사 안보와 밈의 언어로 환원하는 극중극은 터무니없어 보일 지라도, 너무나 얄팍하기에 역설적으로 우리가 목도하는 탈진실 시대의 정치를 소름 돋도록 닮아 있다.
결국 영화는 정치 풍자에 안주하지 않고 자본 권력의 냉혹한 생리를 직시한다. 디거가 투신자살하고 대통령이 사망해도 시스템은 권력을 이양하며 균열 없이 영속된다. 권력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고, 미국은 무너지지 않는다. 사망한 대통령의 마지막 장면은 흥미롭게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얼굴과 똑닮게 연출됐다.
![]() |
| 영화 ‘디거’ 속 대통령 컴슨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
영화는 모든 인물을 조롱하고 비튼다. 배우와 연출가의 갈등을 중재하는 존재는 흥미롭다. 연극 ‘파실 풀스’의 제작비를 댄 ‘실질적 전주’다. 바로 디거의 조카이자 자본의 상속자인 케니 록웰(제시 플레먼스 분)이다. 그는 커티스의 연기에 경의를 표하면서 어릴적 본 자기 삼촌의 이야기에 욕하고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에 작품의 판권을 사들인다.
그는 가문의 죄악을 참회하기 위해 연극을 기획하고 투자한 것이 아니다. 대중이 비극을 희화화된 조롱거리로 소비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으로 ‘체제’를 향한 저항 의지를 거세하기 위해 이 연극을 올렸다. 배우와 연출가의 날선 대립은 이 엄청난 투자자의 화술에 거둬진다. 예술 위의 자본인 셈이다.
‘디거’의 마지막 한 방은 영화의 끝에 다다라야 베일을 벗는다. 재앙은 무대가 아닌 연극이 끝난 후 극장 문을 열고 나서는 ‘결말 시퀀스’에서 드러난다. 우레 같은 박수를 받은 배우들이 커튼콜까지 마치면, 객석엔 난데없이 환경 비상사태 행정 방송 ‘레벨4’가 울려 퍼진다. 너무도 익숙하게 방독 마스크를 쓰고 최소 2000여석은 달하는 공연장을 떠나는 관객들의 모습이 이어진다. 무능하고 멍청한 권력자들을 비웃으며 현실로 돌아왔을 땐 연극보다 더 참담한 디스토피아가 그려진다. 거리는 침수돼 자동차들이 폐차장처럼 쌓여있고, 피지컬 로봇이 삐걱거리며 걸어다닌다.
눈치 빠른 관객은 135분 내내 이냐리투 감독이 노골적으로 흘려둔 힌트들을 연결고리 삼아 결말을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정전과 누수가 일쑤인 낡디 낡은 백스테이지는 정전과 누수가 일쑤라 무대에서조차 붉은 양동이로 떨어지는 물을 받는다. 그런데도 거울로 대본을 띄워 읽고, 영상통화를 하는 최첨단 기술이 공존한다. 초반부터 흩뿌려진 복선들을 회수하는 결말의 풍경이 바로 근미래의 지구다. 연극은 대형 투자자의 거금이 들어가 유례없는 웅장한 세트와 그래픽으로 무장하지만, 백스테이지는 잿빛 해수로 침수돼 군인과 드론이 배회하는 디스토피아다.
영화의 시작을 알린 조리개는 허구로 향하는 문이 아니었다. 이미 무너진 현실을 마주하도록 극장 안에 가두는 장치였다. 극장 문을 나선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이 세상이야말로 가장 거대하고 부조리한 ‘파실 풀스(Fossil Fools)’의 무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