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흔 굿즈 폐기에 제2의 드루킹 논란
부산국제영화제 일정 취소 등 파행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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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한 영화관에 걸린 ‘암살자(들)’ 포스터. [연합뉴스]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974년 8·15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이 반세기를 건너 2026년 가을 극장가와 정치권을 동시에 뒤흔들고 있다. 허진호 감독의 장편 극영화 ‘암살자(들)’이 개봉 11일 만에 누적 관객 204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 가도를 달리는 가운데, 영화를 둘러싼 역사 왜곡 논란은 여야 정쟁과 사법 고발을 넘어 국제영화제 보이콧, 포털 여론 조작 공방으로까지 번졌다.
영화는 1974년 8·15 저격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는 형사 철구(유해진 분), 군사정권의 보도 통제에 맞서는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환(박해일 분), 현장을 발로 뛰는 신입 기자 영일(이민호 분)의 추적을 축으로 당시 사건과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를 교차시킨다. 실존 사건과 인물을 모티브로 삼으면서도 기록의 공백에 영화적 상상력을 결합한 팩션(Faction)이라는 점이 거센 논란의 뇌관이 됐다.
갈등을 촉발한 핵심 장치는 현장에서 발사된 총탄의 행방을 둘러싼 오랜 의혹들이다.
당시 특별수사본부는 재일교포 문세광의 38구경 5연발 리볼버에서 5발, 청와대 경호관의 응사 1발 등 총 6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영화는 영부인을 관통한 탄두가 감식 기록상 명확히 특정되지 않은 점, 현장 검증 이전 경호실에서 탄피를 신속히 거둬 갔다는 과거 국정감사 증언, 고도 근시 문세광의 경호망 돌파 등 과거 지상파 탐사보도 프로그램들이 제기했던 미제 의혹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논란의 정점은 주인공들이 도달하는 가설이다. 극 중 인물들은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추진되던 지하철 1호선 차관 커미션 의혹과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경색된 대일 외교 관계의 반전을 위해, 중앙정보부 내 고위 세력이 일본 야쿠자, 우익 인사와 결탁해 조작된 ‘암살 소동극’을 기획했다는 추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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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유해진[영화 ‘암살자(들)] |
극 중 한 회장(정우성 분)의 대사를 통해 “각하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며 과대망상으로 일축하는 반론을 병치하지만, 서사 전반의 미장센과 복수형 표기인 ‘암살자(들)’이라는 제목, 결말부에 실제 8·15 저격 당시 아카이브 영상을 교차 배치한 연출은 사건의 배후에 정권 핵심부가 개입되어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는 것이 일각의 주장이다.
영화가 공개되자 보수 진영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육영수여사기념사업회 등 유족 단체들은 격앙된 반응을 쏟아냈다.
재단 측은 수사 및 공판 기록상 탄환 궤적과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포섭 공작이 명백히 규명돼 있음에도 중정 개입설을 유포하는 것은 사자(死者)의 명예를 훼손하는 역사 왜곡이라고 규탄했다. 이종배 전 서울시의원은 제작사 대표와 허진호 감독, 각본가들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서울경찰청에 고발했다.
전선은 해외 무대로까지 급격히 확장됐다. ‘암살자(들)’이 오는 11월 개막하는 제37회 싱가포르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공식 선정되자, 국민의힘은 소속 국회의원 전원 명의로 영화제 조직위원회에 개막작 선정 철회를 요구하는 공식 서한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서한을 주도한 주진우 의원은 “영화는 살해당한 피해자의 가족을 가해 의혹의 당사자로 뒤집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끔찍한 프레임을 씌웠다”며 “희생자와 유족을 모욕하는 패륜적 역사 왜곡물에 국제영화제의 권위를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보윤 수석대변인과 최은석 원내수석대변인 역시 원내 의견을 수렴해 다음 주 중 서한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확인했다.
자금줄을 겨냥한 압박도 거세다. 주 의원은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와 영화에 한국산업은행(출자 펀드 140억 원 및 프로젝트 투자 4억 원)과 IBK기업은행(참여 펀드 142억 5,000만 원 및 직접 투자 20억 원) 등 총 306억 원에 달하는 공적 자금이 투입됐다며 즉각적인 자금 회수와 수사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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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암살자들’ [하이브미디어코프 제공] |
이에 대해 산업은행 측은 “해당 투자는 모태펀드 및 민간 위탁운용사(GP)의 독립적인 투자심의를 거쳐 집행된 것”이라며 “출자자(LP)인 은행이 개별 영화나 제작사에 대한 투자 결정을 좌우하거나 개입할 수 없는 구조”라고 선을 그었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여당이 극영화를 상대로 음모론과 색깔론을 펼치며 정쟁의 도구로 삼고 있다”고 맞받았다.
정치권의 전방위 압박과 여론의 분노는 극장가 현장 굿즈로까지 번졌다. 멀티플렉스 극장 메가박스는 4일 공식 입장문을 내고 영화 ‘암살자(들)’의 관람객 증정용 ‘오리지널 티켓’ 디자인 논란에 대해 고개 숙였다.
논란이 된 오리지널 티켓은 1974년 사건 당시 국립극장 기념식장을 연상시키는 티켓 본체 위에 총탄 자국이 인쇄된 투명판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관객이 투명판을 겹치면 연단과 관람석, 태극기 위에 총탄 자국이 포개어지도록 연출, 영부인이 절명한 국가적 비극을 오락성 소재로 삼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주진우 의원을 비롯한 정치권 역시 “패륜 굿즈”라며 전량 폐기와 극장 대표의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메가박스는 “역사적 비극과 참혹한 사건이 지닌 엄중함과 무게를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며 “불편함을 느끼신 분들과 사건 당시 아픔을 겪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촉박한 제작 일정 탓에 담당자들이 영화를 사전 관람하지 못한 상태에서 배급·제작사와 협의해 제공받은 한정된 이미지만으로 굿즈를 제작했다”고 해명했다. 메가박스는 개봉 당일 소진되고 남은 티켓 수량을 관객에게 추가 배포하지 않고 즉시 전량 폐기하기로 결정했으며, 향후 역사적 사건이나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굿즈 제작 시 사회적·윤리적 영향을 검증할 내부 심의 절차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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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가박스 ‘암살자(들)’ 오리지널 티켓. [메가박스 인스타그램] |
포털 사이트 평점 게시판도 새로운 전장으로 비화했다. 네이버는 ‘암살자(들)’ 평점 게시판에서 특정 세력의 비정상적인 매크로 트래픽을 감지, 기본 정렬 방식을 추천순에서 최신순으로 긴급 임시 변경한 뒤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대한민국 최대 포털의 추천 시스템이 매크로 하나에 뚫렸다는 것은 제2의 드루킹 사태가 방치되고 있다는 자백”이라며 국정감사에서 네이버의 여론 관리 및 평점 시스템을 철저히 검증하겠다고 날을 세웠다. 이에 네이버 측은 “시스템 공격에 의한 비정상적 평점 왜곡을 막기 위한 통상적인 어뷰징 방어 조치”라고 설명했다.
원외 장외투쟁도 본격화된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5일 충북 옥천군에 위치한 육영수 여사 생가를 직접 방문해 현장 기자회견을 열고 공세를 이어갈 예정이다.
논쟁의 핵심은 영화가 1974년 사건을 어디까지 역사적 사실로 재구성했느냐에 있다.
허진호 감독은 논란 이후 유튜브를 통해 “이렇게까지 폄하될 줄은 몰랐다”며 “배우와 스태프들이 치열하게 작업했는데 ‘역사 왜곡 프레임’이 씌워지면서 배우들까지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어 가슴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허 감독은 일각에서 제기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배후설’을 분명히 부인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를 죽이라고 시켰다는 내용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이는 상식적으로 모순되고 개연성도 없기 때문”이라며 “과거 지상파 다큐멘터리 등에서 다뤄졌던 현장 탄피와 총격 궤적 관련 기록을 토대로 영화적 가정을 펼쳤을 뿐, 특정한 정치적 목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KOBIS)에 따르면 ‘암살자(들)’은 개봉 11일 차인 10월 3일 하루 15만 5,086명을 동원하며 누적 관객 204만 5499명을 기록했다. 2026년 한국 영화 개봉작 중 아홉 번째로 200만 관객을 넘어선 성적이다.
그러나 스크린 밖의 현실은 갈수록 얼어붙고 있다. 물리적 충돌과 안전 우려로 인해 허 감독과 주연 배우들은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과 야외 무대인사를 전면 취소했고, 서울 극장가 무대인사마저 줄줄이 백지화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