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라라, 울면서 춤추던 밤들을 건너…“이젠 좋아서 하는 음악이길” [인터뷰]

2026 ACC 엑스뮤직페스티벌 공연
슬픔을 도파민으로 바꿔낸 해방구
상처와 한 털어낸 전자음악가의 독백
“이젠 좋아서 하는 음악이고 싶다”


키라라 [엑스뮤직페스티벌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적막을 깨고 명징한 선율이 걸어 나온다. 흐린 서울 아래 한강을 따라 투명한 신시사이저의 맑고 단정한 소리가 동그랗게 맺힌다. 어디서부터 시작이었을까. 다리 하나를 지나갈 때마다 ‘위이잉’ 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바람 같기도 기계음 같기도 한 소리, 아스라이 번지는 집회의 함성.

“그렇다, 병든 서울아…이 다정한 서울아…나라 없는 원통함에, 에이 나라 없는 우리 청춘의 반항은 이러한 것이어다.”

해방 직후 오장환 시인이 읊었던 ‘병든 서울’이 스크린 아래로 강물처럼 흘러간다. 국회의사당의 둥근 지붕이 눈에 걸릴 때, K-팝 응원봉을 들고 거리를 메운 청춘의 밤이 포개진다. “반항이여 반항이여 이 얼마나 신명나는 것이냐.”

키라라는 쉽사리 놓아버리지 않는다. 맑은 건반과 바람의 파열음을 주머니에 넣어둔 채 켜켜이 층을 쌓아 올린다. 소리가 잠시 숨을 고르는 틈으로 풍물패의 쇠가락이 비집고 들어선다. 농악의 신명과 전자음악의 비트는 유기적으로 맞물린다. 뒤섞여 뭉개지지 않고, 서로를 해치지 않으며 공존한다. 번갈아 맞부딪치며 점진적으로 폭발한다.

“농악과 테크노를 반반씩 섞은 게 아니에요. 마라탕 같은 거죠. 마라탕이 맛있는 이유는 물과 기름이 잘 분리돼 있기 때문이에요.”

지난 1일 2026 ACC 엑스뮤직페스티벌에서 공연한 키라라와 정은영 작가의 오디오 비주얼 협업작 ‘병든 서울’. 12.3 비상계엄 당시 거리 행진을 벌이던 도시의 상처에 키라라가 직조한 사운드가 광주에서, 요즘 들어 ‘테크노의 성지’로도 불리는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울려 퍼졌다. 키라라는 총 나흘간의 페스티벌에서 두 번의 무대와 한 번의 마스터클래스를 책임진 ‘올해의 얼굴’이다.

최근 헤럴드경제와 만난 키라라는 “ACC 무대는 료지 이케다를 시작으로 테크노 무대가 생기며 실험적이고 개념적인 예술을 하는 전자음악가 사이에선 되게 힙한 곳이 됐다”며 “섭외가 온 순간 솔직히 눈이 확 돌아갔다”며 웃었다.

키라라 [키라라 홈페이지]


“트랜스젠더의 한은 끝났다…사는 것 자체가 중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반죽처럼 섞지 않아요. A 뒤에 B가 나오는 빠른 호흡에서 ‘치고 빠짐’의 문법이죠.”

‘병든 서울’은 10년째 인연을 맺은 키라라와 정은영 작가의 최신작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2016년 ‘변칙 판타지’에서였다. “페미니즘 시각에서 바라본 여성국극에 게이합창단이 코러스”(키라라)를 맡은 작품의 음악을 키라라가 맡았다.

계엄 이후 서울을 담은 이 작품을 새로운 감각으로 빚어낸 것은 키라라의 음악이었다. 키라라는 이 작업의 핵심 키워드를 “병치”라고 했다. 고유성을 지닌 각기 다른 사람과 음악적 요소를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서로 다른 장르와 서로 다른 소리를 직조했다. 키라라는 “큰 소리와 작은 소리를 병치해 대비를 크게 만드는 작업이었다”고 했다. 농악과 테크노의 만남 역시 인상적이다. 키라라는 “농악과 테크노는 큰 소리의 음악, 사람을 흥분케 하고 도파민을 터뜨리는 소리다. 누구나 각성하게 만드는 꽹과리는 사람을 고양하는 힘이 있다”며 “두 소리는 BPM, 악기 구성, 저음역과 고음역의 분포처럼 물리적으로 닮은 게 많다. 전통과 현대라고 멀리 보지 않았다”고 했다.

페스티벌 무대는 “키라라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그간 키라라가 해온 음악을 관통하고 키라라의 오늘, 혹은 내일까지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올해로 데뷔 13년차. 중학교 시절 클래지콰이의 음악을 들으며 ‘전자음악’의 세계에 접어들었고, 중학교 때부터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소위 말하는 ‘베드룸’ 뮤지션이다. 자신에게 가장 안락한 공간인 ‘방구석’에서, 침대 옆에 놓인 컴퓨터로 음악을 만든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수사는 많다. 한국대중음악상 두 번의 트로피(2017, 2026), 전자음악의 새로운 선구자, 트랜스젠더 여성. 수식어는 그를 설명하는 동시에 가둔다. 키라라는 그 어느 하나에 붙박이기를 거부한다.

키라라 [까미인터내셔널 제공]


“트랜스젠더의 한(恨)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정말 끝났어요. 솔직히 이제 한도 없어요.”

뜻밖의 선언은 아니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른다. 키라라의 디스코그래피는 늘 그와 그가 맺은 관계에서 출발했다. 3집 ‘사라(Sarah)’(2018)는 가까운 이를 잃은 슬픔에서 출발, 트랜스젠더에게 건네는 위로를 담았다. 수록곡 ‘레인 댄스(Rain Dance)’는 015B의 ‘텅 빈 거리에서’(1990)를 샘플링한 곡으로, 공중전화 앞의 고립을 소나기 속 춤판으로 옮겨 놓았다.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처절한 순간에도 몸을 흔들게 만드는 것. 키라라가 삶의 무게를 견뎌온 방식이자, ‘울면서 춤추는’ 키라라 음악의 원형이다.

2019년은 깊디 깊은 골짜기였다. 그는 홍대 앞이 ‘젠더’ 논쟁으로 들끓던 때, 자신의 정체성이 “이 진영 저 진영에 너무 많이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돌아봤다. 사람에 지친 그는 홍대를 떠나 영종도로 향했다. 지금은 “시골 동네에 있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그 무렵 고요 속에서 건져올린 ‘4’(2021)가 나왔다. 키라라는 이 앨범을 통해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며 느낀 박탈과 분노를 음악에 새겼다. 분노를 쏟아낸 뒤에야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그는 “4집을 내고 정확히 1년이 지나니까 4집 풍이 빠졌다”고 했다.

키라라는 데뷔 때부터 캐치프레이즈처럼 “키라라는 이쁘고 강합니다”라는 문구를 들고나왔다. 그의 공연도 이렇게 시작한다. “키라라는 이쁘고 강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춤을 춥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음악적 방향성을 한 문장으로 빚었고, 그는 꾸준히 자기를 설명했다. 키라라는 “이 음악은 트랜스젠더가 만들었다는 의미를 교묘하게 숨겨놓고 혼자 좋아했다”며 “이젠 그런 태도도, 그 말의 패러독스도 좋아하지 않게 됐다”고 했다. 그 시절엔 억지로 “예뻐지려” 애썼다고 한다.

“일부러 핑크색 아트워크를 만들기도 하고요.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니 작품이라도 그러길 바랐던 거죠. 이제 색은 중요하지 않아요. 핑크색이건 파란색이건 시뻘건색이든요. 솔직히 서른다섯 먹고 이뻐져서 뭐 해요. 그냥 살아간다는 것이 중요한 거죠.”

5집 ‘키라라’(2025)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지점’의 기록이다. 그 어떤 메시지나 정체성, 선언도 담지 않았다. 처음으로 “메시지가 없는 음악”을 해봤다고 한다. 정체성을 지우겠다는 선언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음악을 지속하진 않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 첫 결과물이었다. 키라라는 “나의 화두를 떠나보내야겠다고 느낄 때쯤 건강해졌다”며 “그 좋은 상태를 키라라의 원래 모습이라고 우기고 싶었다”고 했다. 이 앨범이 그에게 두 번째 한국대중음악상을 안겨줬다.

키라라 [키라라 홈페이지]


“할 수 있어서 했다”…영웅 아닌 ‘레퍼런스’


2017년 첫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 그는 이 시상식 최초의 트랜스젠더 수상자였다. 그때는 꺼내지 않았던 단어는 공식 석상에서 나왔다. 지난 2월 이 자리에서 그는 “트랜스젠더가 만든 앨범이 올해의 일렉트로닉 앨범”이라는 소감에 박수와 함성이 커졌다. 누군가는 ‘용기’라 했지만, 키라라는 그조차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어서 했다기보다 할 수 있어서 한 거예요. 언제라도 그 단어를 꺼내고 싶었을 거예요. 부모님도 저를 적당히 포기하셨고 제힘으로 돈을 벌고 있으니, 이젠 눈치 볼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잃을 게 없으니, 말할 수 있을 때 말한 거예요.”

소수자 인권을 지키려 앞장서고자 했던 때도,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삶을 위해 목소리를 내려 한 때도 있었다. 20대 중반, 10여년 전을 돌아보며 키라라는 “그때의 난 거리에서 시위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마치 “‘100분 토론’ 뒷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태도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 무렵엔 회원 수가 4~5만 명에 달하는 청소년 성소수자 다음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그는 “누군가가 나를 롤모델로 삼는 건 과분한 무게”라고 했다. 게다가 타인의 눈에 “영웅이라 비친다 한들 거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키라라는 말한다. 단지 “본보기이기보다 ‘이런 삶도 있다’는 레퍼런스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다.

“트랜스젠더 음악가가 있듯, 트랜스젠더 변호사와 요리사, 증권 해설가도 많아지면 좋겠어요. 그동안의 전 학교에서의 성별, 사회에서의 성별, 가면을 쓴 삶을 살지 않으려 애써왔어요. 한국의 트랜스젠더들이 벽장 밖으로 걸어 나와 맷집을 키우고 쪽수를 늘리면 좋겠어요.”

키라라 [까미인터내셔널 제공]


그가 바라는 것은 ‘한 명의 상징’이 아닌 ‘백 명의 평범함’이다. “트랜스젠더가 비극적으로 죽는 영화가 아니라, 국밥집에서 엄마 생각하며 우는 평범한 드라마, 혹은 트랜스젠더가 악역으로 나오는 영화처럼 정체성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온 몸을 던진 삶과 음악이었다. 때론 투쟁해야 했고, 때론 연대해야 하는 날들이었다. 그는 “이전까지는 음악보다 메시지가 앞에 있었다”고 돌아본다. 이제 그는 ‘이쁘고 강한’ 키라라가 아닌 ‘키라라는 키라라’라고 스스로를 세운다.

키라라는 주 4~5일, ‘9 투(to) 6’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처럼 음악 작업을 한다. 하나의 음반이 나오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 9개월 정도. 6집 역시 곧 그 과정에 들어간다. 내년 겨울~내후년 봄이면 그의 새로운 음악이 나온다.

“음악을 하지 않아도 내가 소중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키라라는 “마당있는 집에서 개를 키우고 커피 내려 마시면서, 심심하면 턴테이블을 틀고 신선처럼 음악 짓는 삶”을 꿈꾼다. 당장의 계획은 오직 ‘음악을 위한 음악’, ‘예술로서의 음악’을 하는 것. 그는 “다프트 펑크처럼 예술적 성취를 이루면서도 사람들을 직관적으로 춤추게 만드는 기깔난 음악”, 이를 통해 장르를 넘어 “한국대중음악상 종합 분야” 후보에 오르고 싶다고 했다.

“음악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이젠 음악을 제 인생의 수단으로 쓰느냐 목적으로 쓰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저는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음악을 했던 사람인데, 이제는 그냥 음악이 좋아서 하는 사람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