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오징어 게임’ 벌어지나…美 싱크탱크의 ‘메모리 공급 과잉’ 경고 [칩칩팹팹]

AI가 바꾼 메모리 시장에도 남아 있는 증설의 시차
장기계약으로 불황 막는다지만 수년 뒤 수요 관건
공급 확대 필요치만 CSIS 과잉투자·가격 하락 경계


<‘편집자주>
‘칩칩팹팹(Chip Chip Fab Fab)’​은 AI 시대를 움직이는 반도체 산업을 쉽고 깊이 있게 풀어내는 연재입니다. AI 혁명의 핵심인 ‘칩(Chip)’과 이를 만드는 ‘팹(Fab)’을 잇는 이름으로, ‘칙칙폭폭’ 달리는 기차처럼 반도체 산업의 쉼 없는 진보를 담은 표현이기도 합니다. 복잡한 기술은 쉽게, 뉴스 이면의 이야기와 산업의 흐름은 깊이 있게 전하며, AI 시대를 이끄는 반도체의 현재와 미래를 독자들과 함께 읽어갑니다.


2006년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50나노 1기가 DDR2 D램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시장 전망을 보면 성장세가 아주 가파르죠? 하지만 2년 뒤 D램 가격이 폭락하면서 D램 제조업체가 줄 파산을 하게 됩니다. [삼성전자 뉴스룸]


[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 “SK가 모 의원실에 ‘혹시 발을 뺄 수 있나, 속도를 늦출 수 있나’하는 소리를 하고 다닌다.”

안녕하세요, 칩칩팹팹. 오늘은 메모리 반도체 공장 증설 우려를 다뤄볼까 합니다. 최근에 민형배 전님광주통합특별시장은 지난달 30일 광주상공회의소 주최 경제포럼 특강에서 이런 얘기를 전했습니다. 보도가 확산되면서 SK하이닉스의 투자 철회·속도조절 가능성이 불거졌었는데요.

이에 전남광주통합특별시는 “호남 투자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지역 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는 취지를 강조한 것”이라며 “SK하이닉스는 시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관련 협의를 이어가고 있으며, 투자 추진에 대한 기존 입장에도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며 급히 진화에 나섰습니다.

투자 철회설에는 선을 그었지만, 이번 논란을 계기로 짚어볼 문제는 있습니다. 지금의 공급 부족을 해소하려고 늘린 공장이 몇 년 뒤에는 공급과잉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이 발표되면서 가장 우려했던 지점이죠.

“이번엔 다르다”지만…증설 시차는 그대로
AI가 수요 바꿨지만, 여전한 공급과잉의 위험


키몬다가 2006년 출시한 모바일 D램. [키몬다]


최근 미국에서도 메모리 3사의 공격적인 증설 경쟁이 장기적으로 공급과잉을 초래할 수 있다는 미국 싱크탱크의 경고가 나왔습니다. AI가 메모리 수요를 폭증했지만, 대규모 투자가 시차를 두고 공급으로 쏟아지면서 가격이 급락하는 산업의 구조적 위험까지 없애지는 못했다는 진단이 나온겁니다.

미국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최근 공개한 ‘메모리 사이클을 넘어서(Beyond the Memory Cycle)’라는 보고서인데요. CSIS는 “오늘의 공급 부족을 해소하는 데 필요한 투자가 결국 이 산업의 다음 공급과잉을 낳는 조건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CSIS 미국혁신재건(RAI) 프로그램 책임자·선임연구원이었던 수자이 시바쿠마르, 인텔의 공동창업자 고든 무어 등과 반도체 정책 보고서 작업에 같이 참여한 CSIS 비상근 선임고문·조지타운대 연구교수인 찰스 웨스너, 40년 이상 미국 반도체 기업·단체를 대리하며 미·일 반도체 통상분쟁, 세마테크 설립, 대중국 통상분쟁 등에 관여했던 반도체 산업 전문 국제통상 변호사 토마스 하웰이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과 중국 업체들의 생산능력 확대가 맞물리는 상황에서 AI 수요 증가세가 둔화하면 2008년 메모리 치킨게임 때처럼 과잉공급과 치열한 가격경쟁이 재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자, 잠시 20년 전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2008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낙관적인 성장 전망 속에서도 공급과잉과 가격 붕괴를 겪었습니다. 2008년 초까지만해도 반도체가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D램 현물가격은 1월부터 12월까지 50% 하락했고 D램 업체들은 합계 70억달러의 손실을 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인을 멈추거나 물량을 조정하진 못했습니다. 막대한 고정비가 드는 메모리 산업에서는 가격이 떨어져도 단위당 생산비를 낮추기 위해 높은 가동률을 유지하려는 압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반도체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보면서, 여러 업체가 동시에 생산을 극대화했는데 결국 공급과잉이 가격 하락을 불러온 거죠.

[SK하이닉스 뉴스룸]


‘메모리 반도체 치킨게임’의 끝은 아주 혹독했습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덮치며 유럽의 주요 D램 생산업체였던 독일 키몬다는 2009년 파산, 일본 엘피다도 2012년 파산, 대만 프로모스도 청산 절차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입니다.

그래서 이런 ‘오징어 게임’을 피하기 위해서 최근 메모리 3사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게 장기 공급계약(LTA)입니다. 반도체를 원하는 고객들에게 미리 정확한 수요를 받아서 이를 생산과 투자 계획에 반영하는 방식입니다. 메모리 기업 입장에서는 수요 예측의 정확도를 높여 과잉생산 위험을 줄이고, 재고 부담도 더는 1석 2조인 셈이죠.

그렇기 때문에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SK하이닉스 ADR(주식예탁증서) 나스닥 상장 이후 진행한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더 이상 경기 순환적 사업이 아니다”라며 구조가 명확하게 변화했다고 강조했습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도 미국 인디애나 팹 기공식 이후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설령 다운턴이 오더라도 급격한 하락이 아닌 완만한 감소나 보합에 가까운 형태가 될 것”이라고 얘기했죠.

근데 CSIS는 정반대의 반박을 내놓았습니다. AI가 등장하면서 메모리 수요의 종류와 생산 우선순위를 바꾸는 변화는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범용D램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라는 상품으로 수요가 옮겨가면서 기존 가격·규모 중심의 경쟁을 기술·고객 인증 경쟁으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메모리 치킨게임에서 관찰됐던 수요 증가와 공급 지연으로 가격이 오르고, 증설 경쟁으로 공급 과잉으로 넘어가는 구조적인 사이클은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여전히 새 메모리 공장에는 약 150억~200억달러가 필요하고, 건설에만 2~3년 이상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소수 기업이 시장을 장악하는 과점 구도가 만들어져도 공급의 경직성과 치열한 경쟁 때문에 시장이 안정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CSIS는 “부족기에 높아진 가격을 보고 여러 기업이 증설에 나서도 신규 공급이 시장에 도착할 때는 수요가 달라져 있을 수 있다”며 “막대한 고정비를 투입한 공장은 가동 이후 높은 생산량을 유지해야 단위당 비용을 낮출 수 있어, 가격이 하락해도 공급이 신속하게 줄어들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전제가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집니다. 만약 “AI 수요가 현재 속도로 계속 증가한다면” 신규 생산능력이 큰 조정 없이 흡수될 수 있다고 강조했거든요. 그러면서 “공급과잉 여부는 수요 증가세와 증설 속도의 조합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HBM에 쏠린 투자…빈자리 노리는 중국
범용 메모리의 공백, 중국에는 기회다


2025년 2분기~2026년 2분기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 [카운터포인트리서치 제공]


문제는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팹 증설을 늦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고대역폭메모리(HBM)가 가장 단가가 비싸고 잘 팔리고 있습니다. 같은 웨이퍼를 투입해도 D램을 층층히 쌓는 HBM의 특성상 HBM에 집중을 하면 범용D램의 생산량은 낮아지는 구조에요.

범용D램과 낸드 공급이 위축되면 중국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CSIS는 “중국의 추가 생산 능력은 세계 범용 메모리 부족의 일부를 완화할 수 있지만, 향후 공급과잉과 가격 하락, 덤핑 및 무역마찰 위험을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미 제가 기사로 몇 번 소개해드렸듯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 창신메모리(CXMT)는 전세계 D램 매출 기준 시장 점유율에서 10%를 기록하면서 메모리 3사에 이은 4위로 자리잡았습니다.

특히 HBM 외에 메모리가 문제입니다. AI 데이터센터에만 메모리가 쓰이는 것이 아니거든요. 자동차, 통신장비, 산업 시스템, 의료기기, 방산 분야에 쓰이는 범용 D램들이 문제입니다. CSIS는 “주요 3사가 HBM과 AI 최적화 메모리에 더 많은 생산능력을 투입할수록 비용이 낮은 중국 공급자들은 범용D램 수요를 충족하는데 더 큰 역할을 맞출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이러한 확대가 업계에 익숙한 과잉투자 패턴을 따른다면, 잉여 생산능력·덤핑·가격 붕괴의 또 다른 순환을 낳는 동시에 범용화됐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메모리 소자의 공급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겁니다.

미국에 공장만 늘리면 해결될까
공급망 강화 위한 보조금, 다음 공급과잉 부를라


마이크론은 지난 8월 미국 뉴욕주 클레이 메가팹 공사 현장에서 첫 콘크리트 타설을 완료했다. 이날 행사에는 하워드 러트닉(왼쪽 다섯 번째) 미국 상무장관과 산제이 메흐로트라(왼쪽 여섯 번째)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 등이 참석했다. [마이크론 SNS]


미국 입장에서는 크게 2가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먼저 공급망 측면입니다. CSIS는 “상업적 HBM 생산에 필요한 제조·적층·패키징·수율 확보·고객 인증 역량 상당 부분이 아시아에 집중돼 있다”며 “총공급이 늘어도 미국이 우려하는 지리적 집중 문제가 자동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자꾸 한국 메모리 기업에게도 범용 D램을 미국 내에서 생산하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CSIS는 “신규 투자가 HBM과 서버용 메모리에 집중돼 전체 생산이 증가하더라도 범용 메모리의 공급 제약은 남을 수 있다”며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이든 증설하기보다 필요한 제품과 공정의 병목을 겨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공급과잉에 대해서도 우려했는데요. CSIS는 “정부 지원과 민간투자를 조정해 다음 공급과잉 사이클에 보조금을 대는 데 그치지 않으면서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공장을 안 짓자니 당장의 수요를 놓치고, 중국의 영향력을 키우는 꼴이 됩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호황만 보고 늘리자니 몇 년 뒤 쏟아질 물량이 걱정입니다. 장기 공급계약은 이번에야말로 메모리의 ‘오징어 게임’을 끝낼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다르다’는 업계의 자신감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은 지금의 호황기가 아니라, 새 공장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시점일 겁니다. 과연 이번에는 미래 예측에 성공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