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의 악마에 빗대 자신을 그리다
아웃사이더가 익숙했던 삶 속 고뇌
비극 계속 되자 강박증에 시달리고
환영·환청 삼켜져 끝내 서글픈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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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백조 공주(일부 확대), 1900, 캔버스에 유채, 트레챠코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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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앉아 있는 악마, 1890, 캔버스에 유채, 114x211cm, 트레챠코프 미술관 [AlexSoft, 2004,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문학 내용을 함께 다뤄서인지, 기사가 평소보다 약간 길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행복한 추석 연휴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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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타마라와 데몬, 1890, 트레챠코프 미술관 [pinterest.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늦은 밤이었다. 타마라 공주의 귓가에 정체 모를 속삭임이 닿았다. “그 대신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겠소.” 쇳소리는 또 한 번 이어졌다. “누구세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이건 꿈이 아니란 말인가? 타마라는 고개를 들었다. 심장은 뒤늦게 펄펄 뛰었다. “진정하시오.” 이번에는 이불 위로 두터운 손이 올라왔다. “나는 악마요. 하지만, 부탁이니 겁내지 마시오. 부디 진심만 믿어주시오.” 이 말에 타마라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몸이 굳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아침이었다. 침실에는 그녀 말곤 아무도 없었다. 힘이 탁 풀리는 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공주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에요?” “공주님의 약혼자가… 도적의 습격을 받고 죽었습니다.” 타마라는 이제 눕지도, 일어서지도 못했다. “도적이요?” “네. 도적이긴 한데, 눈빛이 이상합니다. 어디에 홀린 양…”
그 순간, 악마는 코카서스산맥에 있었다.
그는 충격에 빠진 타마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황하는 눈빛과 창백해진 얼굴을 모두 눈에 담고 있었다. 전날 밤 타마라를 찾은 악마. 그는 오래전 천상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타락 천사였다. “평생을 고독하게 살라”는 저주를 받고 내려온 불멸의 존재였다.
그가 수년, 어쩌면 수백년간 할 수 있는 건 인간 세상을 엿보는 일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타마라를 봤다.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그 모습에 반했다. 저주 따위는 잊은 채 육체와 마음을 욕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밑도 끝도 없이 찾아가 고백한 것이었다. 그녀의 약혼자? 도적을 홀려 죽여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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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타마라와 데몬, 1890~1891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악마는 문제의 밤 이후로도 구애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꿈과 현실 등 모든 세계에서 모습을 보였다. 타마라는 그를 두려워했다. 그러다 점차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언젠가부터는 그가 나타나 주기를 괜히 기다렸고, 심지어 어느 날에는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는 사랑의 불씨가 이성에서 비이성으로 옮겨붙는 과정이었다. 타마라는 결국 악마의 뜻을 받아주기로 했다. 끌어안고서 입까지 맞췄다. 그러나 그 순간, 타마라의 심장은 거짓말처럼 멎었다. 지금껏 가만히 벼르고만 있던 그것. 천상에서 내린 저주가 발동(發動)한 결과였다.
악마가 타마라의 시신을 들고 외쳐본들 하늘은 고요했다. 그는 다시 사랑도, 희망도 잃었다. 할 수 있는 건 또 긴긴밤 울음을 쏟아내는 일뿐. 이는 러시아 시인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시 『악마』의 일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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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앉아 있는 악마, 1890, 캔버스에 유채, 114x211cm, 트레챠코프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악마는 재차 코카서스산맥에 오른다.
늘 앉던 자리에서 몸을 웅크린다. 혼자다. 또 혼자다. 해가 뜨고 지고, 꽃이 피고 지고, 나비가 날고 떨어지는 세상에서 오직 그만은 피고 짐이 없이 혼자다. 그만은 기약 없이 세상을 외롭게 견뎌야 한다. 그것이 그의 저주이자 형벌의 본질이었다.
미하일 브루벨이 <앉아 있는 악마>를 통해 그 모습을 그렸다.
화폭에 가득한 악마의 모습은 거대한 공허함을 떠올리게 한다. 굳은 얼굴, 굳센 몸, 굳게 쥔 손에서는 이 존재가 품은 분노와 좌절이 새어 나온다. 저 멀리 붉은색과 의복의 파란색, 유리 조각을 흩뿌린 듯 펼쳐진 회색과 초록색, 보라색 빛깔은 투쟁과 체념 사이 충돌하는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곳곳 두텁게 쌓아올린 물감, 페인팅 나이프를 휘둘러 만든 입체감 또한 화폭 속 긴장감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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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앉아 있는 악마(습작), 1890 [artcyclopedia.ru,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그런데 제목도 악마, 내용도 분명 악마지만… 브루벨은 이 존재를 기괴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다.
악마라고 하면 흔히 따라오는 뿔도, 어금니와 꼬리 또한 따로 표현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이것은 사실, 『악마』의 내용을 빌려 그린 화가의 영적 자화상이라고도 볼 수 있었기에.
예술가는 종종 본인을 영웅에 빗대 표현한다. 현자로, 성인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의 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브루벨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을 구원받지 못한 존재에 겹쳐놓았다. 또 그게 하필이면 악마였다. 굳이 왜 그랬을까. 그가 이 영혼에 천착하게 된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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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바다 공주, 62x47cm, 핀란드 국립 미술관[kokoelmat.fng.fi,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1885년의 봄. 스물아홉의 브루벨은 눈에 띄게 말라가고 있었다. 그에 대한, 다소 믿기 힘든 이야기가 돌기 시작한 건 그 무렵부터였다.
브루벨이 한 여성을 붙잡고 무작정 청혼을 했다는 것. 소문의 실체였다. 상대는 피아니스트 에밀리 프라호바. 문제는 그녀에게 이미 짝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남편이라는 자, 미술사학자 아드리안 프라호프는 브루벨의 예술 활동을 도운 사실상 은인이었다. 그러나 악마가 타마라에게 그랬듯, 브루벨 또한 사정 따위 없이 다짜고짜 사랑을 고백했다는 내용이었다.
성급함은 늘 일을 그르친다. 이번에도 그랬다. 에밀리는 문제의 소문을 반기지 않았다. 내용이 퍼질수록 불쾌해하기만 했다. 에밀리는 브루벨과 점차 거리를 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간 에밀리는 브루벨을 위해 종종 모델로 나선 적이 있긴 했다. 다만 이는 선의였을 뿐, 결코 개인적 호감에 따른 일이 아니었다는 게 증명된 순간이었다.
이와 관련, 화가 콘스탄틴 코로빈이 한 호숫가에서 브루벨과 나눈 대화를 글로 기록한 적이 있었다. “제가 만든 흉터입니다.” “(…) 수술이라도 했어요? 아팠을 텐데요.” “(…)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랑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를 이해하는 데 큰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 너무도 아플 때, 저는 제 몸에 통증을 가했습니다.” 브루벨이 겪은 에밀리와의 실연은 이토록 깊은 고통이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랑에 실패해 모든 것을 잃은 존재, 코카서스산의 악마. 브루벨이 그에게 끌린 이유 또한 따져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그는 왜 실연당한 자기 모습을 인간 남자가 아니라, 굳이 악마라는 존재에 이입해 그렸을까. 단지 레르몬토프의 시 『악마』를 좋아해서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선 그의 삶과 예술관을 더욱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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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자화상, 1905, 러시아 미술관 [gallerix.ru,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브루벨은 1856년 러시아 중남부의 옴스크 지역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군법무관이었다. 비교적 안정적인 일이었다. 다만 부대 재배치가 있으면 수시로 이사를 해야 하는 직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반려자를 따라 성실히 터를 잡고 옮기기를 반복했다. 이는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나 맵고 아린 시베리아의 날씨 아래서는 더욱 그랬다. 어머니는 나날이 약해졌다. 결국 1859년에 죽었다. 사인은 폐렴이었다. “종이를 잘라 만든 작은 사람, 말, 여러 환상적인 형상…” 훗날 브루벨은 어머니를 떠올릴 때 이런 말을 하게 된다. 그녀가 종이를 이런저런 모양으로 오린 후 함께 놀아주곤 했다는 것이다. 열이 펄펄 끓어 병상에 누운 채로도. 어머니의 사망 당시 그는 고작 세 살이었다.
브루벨의 이별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형제자매도 잃어야 했다. 이들 또한 커서 무엇도 되기 전에 세상과 등졌다.
아버지는 곧 새로운 인연과 조각을 붙였다. 새어머니가 된 이도 사랑이 많은 여인이었다. 다만, 그사이 당돌하게 큰 소년은 그때부터도 모든 이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 무렵 브루벨이 관심을 둔 건 그림과 음악, 연극이었다.
특히 뛰어난 건 드로잉이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최후의 심판》 모사본을 본 후 기억만으로도 이를 완벽하게 따라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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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리야 레핀, 볼가강에서 바지선을 운반하는 사람들, 1870, 캔버스에 유채, 131.5x281cm, 러시아 미술관. 이동파 그림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 [lj.rossia.org,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브루벨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법학부 학생으로 입학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이었다. 역시나 영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본인이 있을 곳을 다시 골랐다. 그곳은 임페리얼 아카데미 오브 아트, 제국 예술원이었다. 이때가 1880년.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당시 브루벨은 그 시절 러시아 화가치고는 다소 묘한 행보를 보였다.
그는 당장 러시아 내 존재감을 불리고 있던 일명 이동파라는 유파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는 예술을 통한 민중 계몽을 목적, 대륙 구석구석을 찾아가 직접 전시회를 여는 단체이자 운동이었다. 지주의 횡포, 서민의 애환, 아울러 사랑, 이별, 죽음 등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서사가 담은 그림을 그리는 게 핵심이었다. 이반 크람스코이를 필두로 일리야 레핀, 바실리 수리코프 등 유명세와 실력을 함께 다져가는 묵직한 예술인 상당수가 합류한 조직이기도 했다.
그러나, 브루벨은 그런 직관적인 서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스스로 “집착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 건 서사보다는 기법이었다. 선의 배치와 색채의 혼합, 그 티끌만한 차이가 자아내는 전혀 다른 밀도감에 심취했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니 그는 광야에 또 홀로 서 있었다. 집안에 이어, 집 밖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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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라일락, 1900, 캔버스에 유채, 160x177cm, 트레챠코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그런 브루벨이 프라호프의 작업 의뢰를 받은 건 어느 정도 우연에 따른 결과였다.
1883년, 프라호프는 브루벨에게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성 시릴 수도원 복원을 요청했다. 사실 프라호프는 브루벨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았다. 일에 차질이 없을 만큼 실력은 있되, 비싼 돈을 줘도 되지 않을 만큼의 화가. 그가 원한 건 이 정도였다. 브루벨이 거기에 맞아떨어졌을 뿐이었다.
브루벨은 본인도 놀랄 만큼 이 시기에 많은 공부를 했다.
기법에 대한 실험을 이어간 그에게 옛 비잔틴 양식은 새로운 영감을 안겼다. 선을 각지게 자른 후 줄에 끼워 넣고, 거기에 갖은 색채를 칠하는 일, 모자이크. 머나먼 시간을 달려온 이 방식은 그에게 외려 신선하고, 더욱 신성하게 다가왔다. “본질적으로 이것이야말로 내가 돌아가야 할 작업이다.” 브루벨은 키이우 한 성당의 흔적을 보며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브루벨은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도 잠시 둘러봤다. 산 마르코 대성당 등을 직접 보며 옛 거장의 손길에 재차 몰두했다. 다만, 이번에도 브루벨 말고는 누구도 과거 기법과 현대 예술의 접목 가능성까지는 따지지 않는 듯했다. 이렇듯 그는 기본적으로 늘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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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판, 1899, 캔버스에 유채, 124x106cm, 트레챠코프 미술관 [Scanned from Nina Dmitrieva. Mikhail Vrubel. Leningrad Khudozhnik RSFSR, Public Domain, wikimedia.org] |
꽂히면 득달같이 몰입하고, 매달리고, 천착하는 삶.
이쯤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건, 브루벨의 생활상 또한 그다지 안정적이지만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브루벨은 수도원과 성당 등을 돌며 ‘가장 성스러운’ 작업을 하고 있는 한편, 돌아서서는 이와 반대되는 다소 불안정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브루벨은 1885년을 전후에 매독에 걸렸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브루벨을 만나러 온 아버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이런 말도 했다. 이렇듯 매독 따위는 차치하고서도, 애초 몸과 마음 모두 제대로 챙기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은 브루벨이 함께 일하는 동료 화가들에게 “아버지가 하르키우에서 숨졌다”는 뻔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
빨리 그곳으로 가야 하니 여비를 모아줄 수 있는 부탁과 함께였다. 그 돈은 아마 (프라호프의 예상에 따르면)유흥을 위해 쓰였을 가능성이 컸다. 이 밖에 그에 대해 “주정뱅이”라는 말도 나온 점을 볼 때, 아마 술 또한 굉장히 많이 마셨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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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보가티르(슬라브 서사시에 등장하는 전설적 중세 영웅), 1898, 캔버스에 유채, 321x229cm, 러시아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이런 와중에 유부녀 에밀리와의 문제의 소문도 퍼진 것이었다.
일과 일상 사이 차츰 깊어지는 모순. 브루벨은 이 간극에서 묘한 배덕감을 겪고, 차츰 신과 천사 아닌 악마를 떠올리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머릿속 악마가 레르몬토프의 시 『악마』에 이르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음악과 연극에도 관심이 컸던 브루벨은, 이미 20대 초반 시절에 『악마』를 원작으로 한 오페라를 감명 깊게 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그에게 악마란 그런 존재였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독하고 씁쓸한. 주류 세상과 동떨어지고 있는 점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 되돌아갈 수 없는. 짚어보니 본인 또한 그런 자리에 와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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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앉아 있는 악마(일부 확대), 1890, 캔버스에 유채, 114x211cm, 트레챠코프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브루벨은 그가 그린 <앉아 있는 악마> 속 주인공을 이렇게 표현했다. 다소 분열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설명이었다. 그만큼 브루벨이 지닌 고뇌가 깊었으며,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정의해보겠다는 의지가 묻어난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 그림은 역시나 공개와 함께 논란의 도마 위로 올랐다. 대부분 비평가는 화가 본인을 악마로 투영한 것을 놓고 비판에 나섰다. 천사 아닌 악마를 이토록 감성적으로 그렸다는 데 대해, 나아가 화폭 속 난해한 기법에 대해서도 혹평을 가했다.
브루벨의 주변 이들 또한 그림이 좋은 반응을 얻기가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브루벨도 한때는 이러한 분위기에 좌절해 초안 여러 점을 직접 파괴했다.
한편, 그의 파격적 시도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철도 재벌이자 미술계의 유명 후원자였던 사바 마몬토프였다.
마몬토프는 진작부터 브루벨이 품은 감성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앉아 있는 악마』를 통해 드디어 가능성을 폭발시켰다고도 여겼다. 그렇기에 후한 값으로 여러 그림을 의뢰하고, 한때는 자기 저택의 별채를 거처로 내어준 적도 있었다.
그쯤부터 브루벨의 삶이 풀리기 시작했다. 1896년, 마몬토프가 브루벨에게 100㎡ 공간을 채울 대형 그림 두 점을 의뢰한 일도 결정적이었다. 이는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기념하는 박람회에 걸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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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꿈의 공주, 1896, 캔버스에 유채, 750x1400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브루벨은 이 가운데 하나로 <꿈의 공주>를 기획했다.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먼 공주》를 바탕으로 한 작업물이었다. 무척 아름답다는 말뿐, 실제로는 본 적도 없는 공주를 위해 노래를 부르던 음유시인이 끝내 그녀에게 안겨 숨을 거두는 내용이었다.
브루벨은 죽어가는 음유시인을 그렸다. 그에게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공주도 담았다. 장소는 배 위. 밑에서는 종이 같은 파도가 요동치고 있다. 인물은 창백하고, 몸통은 매끄럽다. 주변에는 보석 가루같은 색채가 가득하다. 무엇 하나 뚜렷한 건 없지만, 그렇기에 더 꿈결 같다. 생명을 걸고서라도 아름다움에 도달하고자 하는 한 예술가의 욕망. 브루벨은 이를 표현했다고 한다. 다만, 이 또한 “기괴하다”라거나 “난해하다”는 식의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이 그림은 전시실에 남아 있을 수 없다.” 박람회 심사위원회의 최종 결정도 이랬다.
이에 브루벨보다도 먼저 분노한 이는 마몬토프였다.
마몬토프는 박람회 옆 부지를 빌렸다. 이곳을 또 다른 세트장으로 꾸몄다. 간판까지 올렸다. 거기에는… ‘심사위원회로부터 거부당한 화가 미하일 브루벨의 장식화 전시회’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사람은 화가 이름보다도 당장의 상황에 흥미를 보였다. 신문 《모스콥스키 리스토크》는 “예술 기사에서는 오직 브루벨의 그림과 관련한 내용만 언급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신문은 브루벨의 그림에 대해 “너무나 강렬해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정도”라고 보도했다. 몇몇 매체는 “사람들이 비웃었다”, “명성을 얻기 위한 가식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실었지만, 브루벨의 이름값이 높아지는 상황은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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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백조 공주, 1900, 캔버스에 유채, 트레챠코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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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날아오르는 악마, 1899, 캔버스에 유채, 138.5x430.5cm, 러시아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이런 가운데, 브루벨은 유명 오페라 가수 나데즈다 자벨라와 연인 관계를 맺는다.
이번에는 마음이 통했다. 과거 에밀리의 사례처럼 일방적 구도이지 않았다. 둘은 곧 결혼해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브루벨은 오페라에서 ‘백조 공주’, ‘눈 아가씨’, ‘볼호바 공주’ 등 역할을 맡은 나데즈다를 위해 직접 무대 장치와 의상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코카서스산맥의 악마처럼, 한때 홀로 광야에 선 듯했던 브루벨은 어느덧 채워지고 있었다. 삶도, 사랑도, 예술도 그랬다. 1899년, 마흔셋 나이의 브루벨은 다시 한번 악마를 그렸다. 이번 악마는 다리를 쭉 편 채 비상한다. 약하지도, 외롭지도 않다. 제목 또한 <날아오르는 악마>. 이것은 힘과 자신감의 표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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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쓰러진 악마, 1902, 캔버스에 유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Mikhail Vrubel, CC0, commons.wikimedia.org] |
하지만 그의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브루벨은 1900년을 전후로 극심한 편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 브루벨 앞에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 놓였다. 두 손 모아 만나기를 기다렸던 첫 아이. 이 아기는 구순열을 안고 세상 빛을 봤다. 울음소리는 옅었고, 팔다리에도 큰 기운이 없었다. 어머니와 형제자매를 줄줄이 잃어야 한, 어릴 적 외로움의 트라우마가 재차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브루벨이 눈에 띄게 이상해진 것은.
일단, 브루벨은 악마를 또 그렸다. 눈을 형형하게 뜨고 있는 악마였다. 그러나 단지 그뿐, 서늘한 산맥 위 부러진 몸통을 둔 채 신음하고 있는 존재였다. 주위의 모든 것은 뒤죽박죽이었다. 색은 부서지다 못해 일그러졌다. 악마는 끝내 날아오르지 못했다. 되레 고독을 곱씹던 그때보다도 못한 상황에 이르렀다. <쓰러진 악마>였다. 이 또한 브루벨의 내면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브루벨은 이 그림을 광적으로 붙들었다.
1902년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예술세계》 주최 전시회에 걸렸을 때, 브루벨은 여전히 자기 그림 앞에 있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매일. 두 손에는 화구를 잔뜩 든 채였다. 그는 그림을 내놓고도 여전히 그리고 있었다. 고치고, 덧칠하고, 닦아내기를 수백번 반복하고 있었다. 관람객이 보든 말든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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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쓰러진 악마(습작) [belarus-travel.livejournal.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브루벨은 <쓰러진 악마>에만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의 전기 작가 V. M. 도미테바에 따르면 브루벨은 하루 14시간 이상 그림을 그렸다. 가족과 대화도 거의 하지 않고, 당연히 손님도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혼잣말을 했다. 하루에 한 번 외투를 걸치고 창문을 여는 일. 스스로 “산책”이라고 부른 이 행동만이 작업과 혼잣말 외 유일한 휴식이었다. 그저 ‘열심히 산다’라고 말하기에는 집착 수준이 심했다. 아내 나데즈다조차 두려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는 (…) 지나치게 자신만만해졌어. 사람들을 대할 때 수줍어하는 태도도 사라졌어. 그저 쉼 없이 말을 쏟아낼 뿐.” 나데즈다는 언니에게 이런 말을 전하기도 했다.
역시나였다. 브루벨은 1902년에 발작했다. 누군가가 영혼을 잡아당기는 듯 소리를 질렀다. 브루벨을 본 의사는 그에게 매독성 감염 진단을 내렸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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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여섯 날개의 세라프, 종이에 수채 등, 알렉산드르 푸시킨 박물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브루벨의 삶은 사실상 거기서 멈췄다.
그 후로도 입원과 회복을 이어가며 그림을 종종 그렸지만, 역시나 끝없는 수정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령 1906년 당시 브루벨의 그림 모델이 돼준 시인 브류소프에 따르면, 이 ‘괴짜’ 화가는 “배경을 다시 그리고 싶다”며 화폭의 일부를 거듭 지웠다. “브루벨이 내면의 악마를 지우려고 애쓰는 듯보였다”고 브류소프는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그 무렵 브루벨은 반쯤 눈이 멀어 있었다. 환영과 환청에도 시달렸다. 자신을 그리스도로, 어느 날은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으로, 또 언젠가는 모스크바 총독으로 칭하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를 살며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산치오 등과 함께 바티칸 벽화를 그렸다는 주장도 진지하게 했다. 그는 더 이상 그가 만족할 만한 그림을 내놓지 못했다. 악마 시리즈 또한 여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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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브루벨, 라일락, 1901년 버전, 트레챠코프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브루벨은 1910년 4월에 숨졌다. 향년 쉰네 살. 결정적 사인으로는 폐렴이 꼽힌다.
브루벨에게 악마란 이상과 고통이 함께 빚은 그만의 상징이었다. 그렇기에 그토록 혼미해질 때까지도 놓을 수 없었으리라. 보석과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실험적 기법은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회화 세계를 팽창시켰다. 아카데미즘이나 이동파 사실주의로는 장악하기 힘든 모더니즘의 영역에서 가장 높이 깃발을 든 기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세계에서 온 메신저였다.”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장례식장에서 그를 이렇게 기리기도 했다. 타마라를 잃은 악마와 달리, 브루벨은 그의 혼미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일지.
드미트리예바, N. A., 미하일 브루벨 : 삶과 예술., 모스크바 : 뎃스카야 리테라투라
키리첸코, E. I., 러시아 양식 : 민족적 고유성 표현의 탐색, 민중성과 민족성, 18세기~20세기 초 러시아 미술에서의 고대 러시아 및 민속 미술 전통., 모스크바 : 갈라르트
수즈달레프, P. K., 브루벨 : 인물, 세계관, 방법론., 이조브라지텔노예 이스쿠스트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