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로빈슨 크루소로 불린 화가
희망의 그림은 차츰 더 복잡해지고
“미국 화가 중 가장 독창적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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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멕시코 만류(일부 확대), 1899, 캔버스에 유채, 71.4x124.8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Yorck Projec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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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바람이 불다(순풍), 1873~1876, 캔버스에 유채, 61.5x97cm, 워싱턴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바람이 분다. 캣보트의 돛이 부푼다. 바닷길이 열린다. 흰 거품이 떠오른다. 위를 보니 먹구름이 밀려온다. 문제는 없다. 비 냄새를 머금지 않았으니, 이는 그늘만 내려주는 고마운 존재일 것이다. “제군들. 기분이 어떤가?” 밧줄을 쥔 사내가 장난스럽게 다시 묻는다. 따라 나온 세 소년은 말이 없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편히 앉은 채, 비스듬히 눕고 기댄 채 먼 곳을 바라본다. 하늘색 하늘을 보고, 바다색 바다를 감상한다. 뒤로는 다른 범선이 고동을 울린다. 발밑에선 잡아올린 물고기가 펄떡인다. 가슴이 부풀어오른다. 소년들의 항해는 이제야 시작이다. 세상은 이토록 넓고, 무엇 하나 정해진 건 없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희망에 대한 그림이다. 제목은 <바람이 불어오다(순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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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멕시코 만류, 1899, 캔버스에 유채, 71.4x124.8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Yorck Projec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그리고, 또 한 번 바람이 분다. 조각배의 돛은 넝마가 된 지 오래다. 바닷길은 열리다 못해 갈가리 찢어졌다. 흰 거품도 불길해보이기만 한다. 하늘은 누렇게 떴다. 한편에선 용오름까지 솟구친다. “이제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선체에 기댄 사내가 다시 중얼거린다. “남은 건 죽음 뿐일까.” 역시나 답은 없다. 어떤 대답도 낼 수 없다. 상어떼를 외면한 채 그저 또 먼 곳을 보기만 한다. 흰 돛과 검은 십자가, 늘어진 밧줄은 무덤과 장례식을 떠올리게 한다. 떠다니는 붉은 기운 또한 비릿한 여운만 안긴다. 어디로도 갈 수 없고, 무엇도 할 수 없다. 앞선 바다는 가능성을 말했다. 이번 바다는 그 자체로 생존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절망에 대한 그림일까. 제목은 <멕시코 만류>다.
상반된 분위기의 두 그림은 한 화가가 빚은 작품이다. 설렘이 느껴지는 전자는 힘 있는 서른일곱 무렵, 낙담에 젖은 듯한 후자는 예순셋에 내놓은 결과물이다.
미국 출신 화가, 윈슬로 호머. 사실상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고도 미국 최고 화가 반열에 올랐지만, 말년에는 ‘로빈슨 크루소’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은둔 생활을 한 예술가. 호머는 대체 무엇을 보고 무슨 일을 겪었을까. 어쩌다 그의 삶도, 그의 바다 그림도 이토록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을까. 이것은 한 화가, 이보다도 앞서 한 인간의 세상을 보는 시선이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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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즐거운 나의 집, 1863년경, 캔버스에 유채, 54.6x41.9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이곳은 미국 남북전쟁의 전장. 북군 장군 넬슨 A. 마일스 휘하의 라파해녹 골짜기의 풍경이다.
구름 틈으로 오후의 햇빛이 내려온다. 주황색 텐트 천은 빳빳하게 마른다. 불붙은 장작 위 냄비는 연기를 뿜고, 양철 접시 위 건빵 조각은 금괴인 양 반짝인다. 앞에서는 보병 둘이 휴식을 취한다. 가만히 선 채로, 턱을 괴고 앉은 채로 감상에 젖어있다. 한 칸 뒤 몰려있는 군악대가 연주하는 노래는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
이는 화폭이 묘사하는 당시 상황을 돌아본 장군 마일스의 기록이다. 꿉꿉한 진지의 한가운데에서도 음악은 피어올랐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를 운명을 쥐고서도 모두가 박자를 맞추는 순간이 있었다. 전쟁 그림치고는 애틋한 작품이다. 이는 호머의 초기작인 <즐거운 나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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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전선의 포로들, 1866, 캔버스에 유채, 61x96.5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etropolitan Museum of Art, online collection,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그런가 하면, 호머는 가장 처절하게 그릴 수 있는 전쟁의 항복 장면 또한 옛 문법에 맞춰 그리지 않았다.
북군의 프랜시스 채닝 바글로 장군이 멋스러운 군복 차림새로 뒷짐을 진다. 표정은 당당하고, 허리춤에 찬 장검은 든든하다. 남군 군인 무리는 소총을 내려놓으며 패배 의사를 밝힌다. 다만, 이들은 고개까지 숙이지는 않는다. 외려 상대를 똑같이 바라본다. 맨 왼쪽 청년은 아예 주머니에 손까지 찔러넣고 있다. 결국 이곳 아메리카 대륙을 재건해야 하는 건 너희가 아닌 우리 함께이지 않은가.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양 당당해보이기도 한다. 분명 승자와 패자가 갈라져 있으나 그 차이가 커보이지는 않는다. 호머는 이번에도 뻔하게 그리지 않은 것이다. 항복에 이어 닫혀버리는 그림 아닌, 항복에 이어 이제부터 ‘같이’ 짜야 할 판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그림을 내놓았다. 이는 분명 열린 결과물이었다. 역시나 초기작에 속하는 그림의 제목은 <전선의 포로들>이다.
두 화폭 모두 호머가 나이 서른 언저리의 청년일 때 구상해 내놓은 작품이었다.
앞서 <바람이 불어오다>에서도 짚었듯, 호머는 이 시기에만 해도 주로 ‘나아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여러 캔버스 위로 흩뿌리고자 한 건 성장과 도전, 화해와 화합의 기운이었다. 심지어 호머는 뉴욕 기반 잡지 『하퍼스 위클리』의 통신원으로 남북전쟁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도 그런 예술관을 가졌다. 비슷한 자격의 동료 대다수가 흩뿌려진 피와 시신을 주제로 글과 그림을 빚을 때, 그만큼은 감성과 여운을 찍어 바를 줄 알았다. 잡지사가 내린 방침(“너무 참혹한 그림은 팔리지 않으니 그리지 말라”는 식의)도 영향을 줬겠지만, 애초 본인 의지부터도 강했을 것이다. 이는 호머가 <전선의 포로들>의 열린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거듭 수정을 가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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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밝은 쪽, 1865, 캔버스에 유채, 32.4x43.2cm, M.H. 드 영 기념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평면이 입체를 이기기는 어렵다. 호머의 이러한 그림은 공개와 함께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한 평론가는 “첫 출품작만으로도 자기 역량을 명확히 각인한 몇 안 되는 젊은 예술가(즐거운 나의 집)”라고 호평했다. 미술 비평가 피터 셸달은 “남북전쟁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말해주는 회화(전선의 포로들)”라고도 했다. 호머는 스물아홉 나이로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뽑혔다. 프랑스 파리로 유학도 했다. 만국 박람회에 작품이 걸리는 영광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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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채찍놀이, 1872, 캔버스에 유채, 55.8x91.4cm, 버틀러 미국 미술관 [butlerart.com, Bridgeman Art Library,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1870년대.
남북전쟁 이후 호머는 두 눈을 아름다운 시골, 그곳의 꿈꾸는 청년과 자라나는 아이들로 옮겼다. 평화, 생기, 아울러 옅어지는 화약 냄새 속 솟아나는 새로운 가능성. 무대가 달라졌을 뿐, 호머는 앞서 그가 전장에서 포착해 그린 여러 그림과 비슷한 감성의 작품을 길어올렸다. 가령 1872년작인 <채찍 놀이>가 그랬다. 세상은 풋풋하다. 아이들은 맨발로 서로를 밀고 잡아당기며 논다. 꼬마들은 밤보다 낮에 더 자란다. 맞닿는 건 기분 좋은 단풍 바람, 들리는 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일 것이다. 들판은 학교를 품고, 꽃과 씨를 쥐고, 악동의 까진 무릎과 발바닥을 머금는다. <바람이 불어오다>도 비슷한 시기에 그린 작업물이었다. 특히나 완성 시점이 미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1876년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채찍 놀이>와 마찬가지로 싱그러운 분위기를 품은 이 그림을 놓고 <뉴욕 트리뷴>은 “우리가 기억하는 그 어떤 전시회에서도 이 그림과 견줄 만한 작품은 없다”고 극찬했다. 두 화폭은 전쟁 후유증에 젖은 미국인을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도 다시 자라날 수 있고,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위안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호머의 위상은 덩달아 높아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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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칠판, 1877, 종이에 수채, 50.1x32.3cm, 워싱턴 국립 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 C.,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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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일몰 속 스쿠너선, 1880, 종이에 수채 등, 25x35cm, 포그 미술관 [Harvard Art Museums.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호머는 이 무렵 수채화를 그리기에도 천착했다.
초기 단계에선 몇몇 비평가에게 “먹물 병 든 아이가 그려도 이보다는 낫겠다”는 식의 조롱도 받았다. 다만, <칠판>과 <일몰 속 스쿠너선> 등 높은 완성도의 그림을 내놓은 후로는 그런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들어갔다. 사실 호머는 그림을 막 시작할 때 삽화가로도 이름을 알릴 만큼 예술 폭이 넓은 화가였다. 애초에 보통 내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니 돈도 차츰 모일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호머의 미래? 그의 그림만큼 내내 기운찰 게 확실해보였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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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북동풍, 1895, 캔버스에 유채, 87.6x12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etropolitan Museum of Ar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호머의 피부는 빨갛게 그을려 있었다.
북해의 바람은 매서웠다. 짙은 소금향은 코끝을 시큰하게 했다. 이곳에 감성은 없었다. 기도와 미신 섞인 풍습만 있을 뿐이었다.
호머는 1881년, 마흔다섯 나이로 영국의 소규모 어촌 마을 컬러코츠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날 것의 풍경 앞에서 말을 잃어야 했다. 남자와 소년은 매일 아침 바다로 향했다. 여자와 소녀는 매일 밤낮으로 그물을 뜨고, 잡아 온 생선을 손질했다. 그러다가도 날이 험악할 때면 떠나가는 배, 들어오는 배를 보며 수시로 손을 모았다. 이들 사이 오가는 담소는 많지 않았다. 따뜻한 햇살도, 청아한 달빛도 흔치 않았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도 사연을 품고 있는 듯 처연했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 존재는 눈물이 고일 만큼 끈끈했다. 어쩌면 절대다수의 보통 시민은 이런 환경에 있는 게 아닐까. 호머는 이같은 생각과 함께 본인의 궤적을 되짚어봤을까. 확실한 건, 이 무렵부터 그의 그림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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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여덟 번의 종소리, 1887, 캔버스에 유채, 64x76.7cm, 애디슨 미국 미술관 [Addison Gallery of American Art, Public Domain, wikimedia.org] |
호머는 이제 마냥 평화와 향수를 자극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놀이보다는 노동, 화합보다는 생과 사가 오가는 급박한 순간 등을 화폭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동은 1년7개월 뒤 미국 메인주의 프라우츠 넥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이어졌다. 프라우츠 넥 또한 찌르는 바닷바람이 부는 거친 해안가였다. 이곳 해안에서 고작 75피트(22.86m) 거리의 개조한 마구간이 그의 거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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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산들바람, 1881년경, 종이에 수채 등, 35.6x50.8cm, 보스턴 미술관 [ PaintingDb,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호머는 이렇게 희망의 화가에서 한순간 절망에 더 치우친 화가가 되고 말았을까.
단 한 번의 큰 충격으로? 단순히 그렇게만은 볼 수 없을 듯하다.
호머의 <산들바람>은 컬러코츠 마을 주민인 두 여인이 바구니를 든 모습을 담고 있다. 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보란듯 두 팔을 걷은 채 우직하게 걸음을 이어간다. 자연의 기세 따위에도 물러설 기색 따위 보이지 않는다. 비록 저 끝에 있는 게 평생을 해오던 노동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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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생명선, 1884, 캔버스에 유채, 72.7x113.7cm, 필라델피아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그런 한편, 호머의 <생명선>은 한 사내가 난파선 내 정신을 잃은 승객을 구조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바다 위 삶을 지탱해주는 건 밧줄과 힘줄밖에 없다. 보이는 건 파도뿐이지만, 끝까지 놓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고 버텨본다. 두 화폭 모두 뚜렷한 희망도 없고, 어떠한 낭만도 깃들어있지 않다. 호머는 그럼에도 이들 모두를 꿋꿋한 자태로 그렸다.
우리네 삶은 희망을 좇아야만 의미가 있는가.
희망이라는 수단 없이, 그 순간 자체를 목적으로 두는 여정 또한 의미 있지 않은가. 인간이란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고향을 향한 애착, 업에 임하는 자부심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다. 거창한 꿈과 목표 등 딱히 무언가를 쥐고 있지 않더라도 일어설 수 있는 주체였다. 그러니까, 호머의 회화에는 변화가 있었지만 회화관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나아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저 조금 더 깊어졌을 뿐이었다. 희망의 개념을 더 깊숙이 파내고, 그것의 형상을 보다 넓은 각도에서 봤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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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멕시코 만류(일부 확대), 1899, 캔버스에 유채, 71.4x124.8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Yorck Projec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그렇다면, <멕시코 만류> 또한 단지 절망의 그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림 속 풍경은 분명 막막하다. 파도는 조각배를 곧 집어삼킬 듯하고, 상어는 곧 떨어질 먹이를 두고 아가리를 벌린다. 그런데도 사내는 아직 배 위에 있다. 공포로 머리를 감싸고, 슬픔으로 우짖을 만도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는 바다를 본다. 무엇을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듯 생각을 이어간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행동 덕에 삶의 가능성은 닫히지 않는다.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나마 기적이 고개 내밀 여지 또한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그림 또한 결국은 희망에 대한 그림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그것이 꽃길이 아닌, 가시밭길로 포장된 형상이라 할지라도. 물론 호머가 이를 정확히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관람객이 <멕시코 만류>의 서사를 물었을 때, 호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왼쪽 위 흐릿하게 보이는 배의 형상. 이는 호머가 그림을 다 그린 후 수정 작업에서 추가로 그려 넣었다고 한다. 이 또한 황량한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한 의도였을 터라는 분석도 연구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본인의 ‘메시지’가 잘못 전달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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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강풍, 1883~1893, 캔버스에 유채, 76.8x122.7cm, 우스터 미술관 [Bridgeman Art Library,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어느덧 생의 말년에 접어든 호머는 이러한 별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프라우츠 넥에서 대체로 조용히 삶과 붓질을 이어갔다. 호머를 미술에 눈뜨게 한, 평생 각별한 관계를 이어온 아마추어 수채화가인 어머니가 1884년에 숨졌다. 다혈질의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1898년에 사망했다. 호머는 이러한 시간을 마주하며 고립의 벽을 더 높이 세우고 있었다. 프라우츠 넥의 혹독한 추위를 피해 떠난 몇 번의 여행을 빼면, 거의 모든 시간을 이곳에서 쌓아올렸다. <뉴욕 이브닝 포스트>는 호머를 두고 “미국 화가 중 가장 독창적인(독특한) 인물 중 하나”라고 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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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슬로 호머, 오른쪽과 왼쪽, 1909, 캔버스에 유채, 71.8x122.9cm, 워싱턴 국립 미술관 [The Yorck Project, National Gallery of Ar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오른쪽과 왼쪽>. 생의 끝자락에 닿은 호머가 그린 이 그림을 놓곤 지금도 학계 내 해석이 분분하다.
사냥꾼이 엽총을 쏜다. 총탄이 향한 곳은 이제 막 날아오르려는 흰뺨오리 한 쌍이다. 왼쪽의 수컷은 여전히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오른쪽의 암컷은 목을 숙여 다시 물속으로 내려앉길 택한다. 사냥꾼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언뜻 보면 암컷이 사지로 몰린 듯하지만, 이를 확신할 수 있는 상처와 핏자국 등 단서는 잘 보이질 않는다. 총탄을 맞았는지 피했는지, 정신을 잃었는지 단지 위급 상황을 피해 각자 방법으로 도망치고 있는지 모두 모호하다. 새벽과 저녁, 구름과 안개 등 배경 또한 불분명하다.
호머는 이것으로 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가. 희망의 각도와 모양에 천착한 그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놓인 두 오리로 빗대 내린 결론은 무엇인가. 살면서 직접 보고 겪어보니, 우리 생과 희망 모두 정답을 두고 있지는 않다는 것. 그러니까, 저마다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 혹시 그런 건 아니었을지. “그림 속 가장 큰 파도의 방향과 잔파도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호머는 이러한 질문도 받았다. 반응에 따라선 제작 의도를 엿볼 수도 있었다. 다만, 호머의 답변은 알려지지 않았다.
호머는 1908년에 뇌졸중을 앓았다.
이에 따라 언어와 근육 기능에 일시적인 불편함도 겪었다. 이후 <오른쪽과 왼쪽> 등을 작업할 수 있을 만큼 회복도 했지만, 되찾은 건강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1910년에 죽었다. 향년 일흔넷. 사망지는 역시나 프라우츠 넥 작업실이었다.
호머의 말, 그리고 호머가 남긴 그림은 그 시절 가장 미국적인 아포리즘으로 통하기도 했다.
세상은 언제나 순풍을 안기지 않는다. 때로는 길이 닫히고, 돛이 찢어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리케인이 깔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희망이라도 그것을 희망하는 한 삶은 닫히지 않는다. 한때는 꽃길만 좋은 줄 알았는데, 살아 보니 덤불 또한 가치가 있더라. 호머는 말없이 하고자 한 말은 이 말이지 않았을까.
Elizabeth Johns, Winslow Homer :The Nature of Observa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Cross, William R., Winslow Homer : American Passage. New York : Farrar, Straus and Giroux
Griffin, Randall C., Winslow Homer : An American Vision, London : Phaidon Pre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