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옥 예술감독 “‘오세훈의 아내’ 한때는 굴레…이젠 주어진 환경” [인터뷰]

고전 해체·언어 한계 넘는 신체극 장인
오는 18일 연극 ‘의자 고치는 여인’ 개막
AI가 답하는 시대에 극장은 ‘사유의 공간’


송현옥 극단 물결 예술감독이 연극 ‘의자 고치는 여인’을 다시 올리며 “힘들고 소외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환상이라는 원동력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며 작품의 의미를 되짚었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거칠고 비루한 현실을 샹들리에의 환상으로 버텨낸 ‘의자 고치는 여인’, 언어의 질곡을 벗겨내고 몸으로 쓴 시를 육화한 ‘밑바닥에서’, 체호프가 침묵 속에 묻어둔 무의식의 지층을 펼쳐낸 ‘5분간의 청혼’….

무대 위 활자 너머의 심연을 길어 올리는 연출가 송현옥(65)은 다양한 수사로 불린다. 영문학자, 연극평론가, 드라마투르그, 대학교수, ‘신체극’의 선구자….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수사는 바로 ‘오세훈의 부인’, ‘시장 아내’ 송현옥이다.

그럼에도 그는 늘 자기 자리를 지켜왔다. 1989년 연극 비평을 통해 공연계에 입문한 이후 후학을 양성하는 선생이었고, 언어와 맥락으로 무대를 해체했으며, 새로운 시도에 주저함이 없던 창작자였다. 이번엔 대표 레퍼토리인 ‘의자 고치는 여인’( 9월 18~20일까지, 나루아트센터)으로 돌아온다. “몸의 움직임도 출연 배우도 많아 무대에 한 번 올리기까지 몇 년이 걸린다”는 이 작품이 2024년 전국 공연 이후 2년 만에 관객과 만난다.

개막을 앞두고 서울 용산구 서울시장 공관에서 만난 송현옥 연출가(극단 물결 예술감독)는 주연 배우이자 딸인 오주원의 안면 골절 부상이라는 돌발 악재에도 담담했다. 그는 “플랜 A, B, C까지 세워뒀다”며 “라이브 무대는 늘 변수가 터지나 배우의 강한 의지와 진정성을 믿고 있다”고 했다.

비루한 일상 위로 쏟아진 샹들리에…그 여인은 행복했을까?


반세기가 넘도록 부서진 의자를 고치던 여인의 손엔 삶이 묻어있다. 손가락 마디마디 주름 사이로 갖은 기억이 새겨졌다. 열네 살 소녀 시절, 처음으로 간 약국에서 마주한 ‘약사의 아들’. 소녀의 눈엔 알약이 들어있는 유리병만큼이나 영롱한 세상이 번져간다.

“그 순간 무대 위로 샹들리에가 내려와요.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의 세계죠. 삶에서 환상을 꿈꾸는 건 인간만이 가진 특질이에요. 그 환상이 희망이 없는 사람들, 힘들고 소외된 삶을 살았던 이들을 견디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요.”

송현옥 극단 물결 예술감독이 9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서울파트너스하우스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기 드 모파상의 단편 ‘의자 고치는 여인’을 각색한 이 작품엔 송 연출가의 인장이 묻어있다. 그는 고전 속에서 늘 ‘오늘의 인간’를 찾았다. ‘인형의 집’에선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현대인을 인형으로 봤고, ‘오이디푸스’와 ‘햄릿, 여자의 아들’에선 진리를 좇는 남성적 세계관과 순리를 품는 여성적 세계관을 교차한다. 그는 “고전엔 시대와 나라를 초월하는 시간을 이기는 힘이 있다”고 강조한다.

“무섭고 두려운 존재인 시간을 이기는 힘의 근원엔 인간이 있어요. 인간의 보편적인 성질과 내면의 작동 방식, 관계의 역학은 불변하니까요. 고전의 토대 위에서 동시대의 옷을 입히고 오늘의 문제의식을 비춰볼 때, 고전이 가르쳐주는 울림은 무척이나 커요.”

이번 공연에선 초연 당시 객석과 나눴던 찬반 투표를 걷어내고, 무대 위 배우들의 토론으로 압축해 무대 미학의 유려함을 살렸다. 결정적 변화는 결말이다. 55년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남자를 무대 끝자락에 세워 화자를 전복한다. 모파상의 원작과 가장 큰 차별점이다.

“남자가 등장해 ‘당신이 본 것만이 진실인가’라고 반문해요. 남자는 화를 내면서도 곁에 선 아내의 눈치를 보며 창밖을 응시하죠. 창밖엔 17세 소녀가 눈을 맞으며 서 있어요. 프레임에 따라 진실은 달라져요. 하나의 시선을 깨부수고 싶었어요.”

‘의자 고치는 여인’은 송 연출가가 오래 품은 작품이었다. 수많은 작품을 올렸지만, 그는 인물들에게 감정을 내어주진 않았다. “연출가는 감정을 갖지 않아야 중립적인 시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의자 고치는 여인’을 다시 준비하는 올해는 마음이 달라졌다고 한다.

연극 ‘의자 고치는 여인’ [극단 물결 제공]


“이 여인에 대해 좀 감정이 생기더라고요. 나이가 들어 그런 것 같아요. 무대에서 배우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시간의 흐름을 형상화해요. 소녀였다가, 중년의 여성이었다가, 할머니가 되는 한 여인의 늙어가는 삶을 보여주죠. 그 장면에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저도 늙어가는 중이라 연민이 생겼나 봐요. (웃음)”

‘이단’ 취급받던 신체극, 이젠 대세


“이게 무용이야 연극이야?”

지금은 장르의 탈경계가 ‘대세’가 됐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2008년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에서’를 재해석한 연극이 무대에 오르자 공연계는 발칵 뒤집혔다. 적당한 ‘반보’면 충분한데, ‘서너 보’를 껑충 뛰어넘은 송 연출가의 시도는 ‘이단’이 됐다. 그를 ‘신체극 선구자’로 부르는 이유다.

그의 연극 인생이 처음부터 신체극(Physical Theatre·피지컬 시어터)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해럴드 핀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언어의 극단’을 탐구한 뒤, 모든 언어를 초월해 조망하는 ‘메타 언어’로서 육체로 향했다. 한국 철제 조각 1세대 선구자인 선친(고 송영수 조각가)의 아틀리에에서 자란 성장 배경도 영향을 미쳤다.

“언어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추상 조각과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언어로도 표현을 할 수 있지만, 가장 진실한 언어는 즉발적으로 나오는 몸의 언어라고 생각했어요. 시(詩)처럼 직설을 지우고 은유의 몸짓을 무대에 올리고 싶었어요.”

송현옥 극단 물결 예술감독은 영문학을 전공하고 연극비평과 드라마투르그, 대학 교수로 언어를 다루는 일을 오래도록 해왔으나 연출가로는 신체극을 통해 ‘몸으로 쓰는 시’를 보여주고 있다. 임세준 기자


2008년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에서’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신체극을 선보였으나 국내에선 “난해하고 어렵다”는 반응이 따라왔다. 하지만 돌파구는 밖에서 열렸다. 2008년 러시아 모스크바 셰프킨·슈킨 연극학교와 고르키 문학연구소 초청으로 현지 무대에 올랐을 때였다.

‘밑바닥에서’와 ‘5분간의 청혼‘을 본 현지 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기립박수를 보내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30년간 체호프만 천착해 왔다는 노교수가 찾아와 “체호프의 텍스트 밑바닥에 있던 무의식의 지층을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된 시간이었다”며 손을 맞잡았다. 그때 그는 회한을 씻어내며 눈물을 쏟았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연기’라는 현지 극장장의 한마디가 한국 연극계에서 느낀 서운함과 안타까움을 털어줬어요. 제가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죠.”

몸으로 쓰는 연극은 그의 예술관에 맞닿아 있다. 그는 “사유를 담는 언어의 가치는 존중해야 마땅하나, 몸의 언어는 사람들에게 직관적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연극 ‘의자 고치는 여인’ [극단 물결 제공]


“요즘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시대로 접어들었어요. 무엇이든 AI(인공지능)에 물어보면 답이 금방 나오잖아요. 현대인에게 극장의 의무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거예요. 스스로 유추하고 느끼는 경험의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차기작에서도 그는 질문을 던진다. 유엔(UN·국제연합) 인권 분야에서 활동한 지인의 경험에서 출발한 창작극 ‘소수 의견’을 준비 중이다. 개인의 기억에서 집단의 기억으로, 기억이 역사를 만들고 각 집단과 국가가 기억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만들어가는지의 틈새를 파고드는 작품이다.

한때 굴레였던 ‘오세훈 아내’, 지금은 ‘주어진 환경’


올곧게 자기 궤적을 그려왔지만, 그의 이름 앞엔 늘 오세훈의 아내’라는 프레임이 씌워졌다. 젊은 날엔 이러한 수사가 돌부리처럼 마음에 걸렸다. 예술가로서의 독자적 존재성을 잠식해 들어오는 그늘이기도 했다.

“예전엔 제 작품이 나오는 기사에서도 ‘오세훈 아내’라는 수식어는 제발 지워달라고 읍소했어요. 어떤 무대를 올려도 정치인의 아내라는 외피가 본질을 덮으니까요. 그땐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다가왔어요.”

지금의 그는 어떤 수사에도 담담하고 초연하다. 지난 2월 40년간 지켜온 교단을 떠나며 내면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난 탓이리라. 연구실을 나오기 전 책상을 어루만지던 순간, 그는 마치 생의 종막을 예행연습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연구실을 나설 때 문득 ‘지금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돌아본다.

송현옥 극단 물결 예술감독이 9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서울파트너스하우스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오세훈 아내’, ‘정치인 아내’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과거엔 굴레였다면, 지금은 그저 제게 주어진 하나의 ‘환경’으로 받아들여요. 남편이 대중의 사랑과 지지를 받는 것은 더없이 고마운 일이지요. 가족으로서 제가 부정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 환경에 휘둘릴 이유도 없어요. 기획팀에서 이번 공연을 소개하며 ‘오세훈 아내’라는 문구를 넣었는데,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하며 웃었어요.“

학창 시절 그의 수첩 맨 앞장엔 늘 여덟 글자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평범지중 비범(平凡之中 非凡·평범함 속에 깃든 비범함)’이라는 글자다. 그토록 비범한 예술혼을 벼려내고자 불면의 밤을 지새웠던 그는 이제는 ‘삶의 순리’에 몸을 맡긴다.

“계획성보단 직관이 앞서는 것이 늘 장점이자 단점이었어요. 이제는 직관을 믿고 물 흐르듯 유영하려 해요. 너무 기쁘지도, 너무 슬프지도 않게 살자, 그렇게 물 흐르듯이 살다 간 사람이 저라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