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란 달러시스템서 퇴출한다더니”…정작 구멍은 ‘미국의 오래된 은행’

위장회사·외국은행 거쳐 미국은행 달러 결제망 접근…제재 딜레마
100년 넘은미국은행 환거래 계좌가 ‘그림자금융’ 최종 결제통로
2차 제재 대신 ‘접근 차단’...전문가 “미국 은행도 책임서 못 벗어나”
이란 테헤란의 한 건물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려진 광고가 걸려 있다. [로이터]

[헤럴드경제=정목희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이란을 국제 금융망에서 완전히 고립시키겠다며 전방위적인 제재를 밀어붙이고 있지만, 정작 제재의 ‘뒷문’ 역할을 하는 곳은 다름 아닌 미국 은행들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5일(현지시간) 서방 당국자와 전문가들을 인용해 매년 수십억달러 규모의 이란 자금이 미국 은행의 환거래 계좌를 거쳐 이동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법의 적용을 받는 개인이나 기관이 이란과 관련된 거의 모든 금융거래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강력한 제재가 시행 중이지만, 이란은 복잡한 ‘그림자 금융망’을 통해 미국 달러 결제 시스템에 우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란이 주로 활용하는 방식은 미국 은행에 직접 계좌를 개설하는 대신 해외 위장회사를 앞세우는 것이다. 홍콩이나 아랍에미리트(UAE), 중국 등지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뒤 미국 은행과 환거래 관계를 맺고 있는 현지 금융기관을 통해 자금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환거래은행은 서로 다른 국가의 은행들이 상대국에 직접 지점을 두지 않고도 국제송금과 결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계좌를 개설해주는 시스템이다. 전 세계에서 이뤄지는 달러화 거래는 최종적으로 미국 금융기관의 청산망을 거쳐야 하는 만큼, 이란 입장에서는 해외 금융기관을 한두 단계 거치면 미국 은행과 직접 거래하지 않고도 달러 결제망에 접근할 수 있다.

이란이 위장회사와 환전업체, 해외 금융기관 등을 복잡하게 연결해 실제 거래 주체를 감출 경우 최종적으로 결제를 처리하는 미국 은행도 해당 자금이 이란과 연계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거래를 승인할 수 있다고 WSJ는 설명했다.

최근에는 이집트 국영은행 방크 미스르(Banque Misr)의 UAE 지점이 이란의 미국 금융망 접근을 도운 금융기관으로 지목됐다.

미 재무부에 따르면 방크 미스르 UAE 지점은 2024년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미국 내 환거래 계좌를 이용해 이란의 그림자 금융망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있는 103개 업체를 위해 최대 18억달러(약 2조4000억원)를 처리했다.

재무부는 이 지점이 미국 은행 3곳에 달러화 환거래 계좌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해당 은행들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방크 미스르는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JP모건체이스와 씨티그룹 등을 환거래은행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방크 미스르 UAE 지점이 미국 금융기관에 환거래 계좌를 개설하거나 유지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절차에 착수했다.

문제는 이 같은 사례가 일부 금융기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 재무부는 2024년 한 해 동안 미국 은행을 거쳐 이동한 이란 관련 자금이 약 90억달러(약 1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한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이란의 자금줄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경제적 추방 작전(Operation Economic Outcast)’을 가동하고, 미국과 해외 금융기관에 이란 관련 거래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기관에는 이란과 거래를 지속할 경우 미국 달러 금융 시스템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 있다는 2차 제재 가능성까지 경고하고 있다.

미 재무부는 이란의 위장회사를 가려낼 수 있는 ‘위험 신호’도 금융권에 제시하고 있다. UAE에 소재하면서 소유구조가 지나치게 불투명한 기업이나, 홍콩에 등록돼 있으면서 중국 은행 계좌를 사용하고 온라인상 활동 흔적이 없는 기업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 역시 이란의 달러 결제에 이용된 금융기관을 어느 수준까지 제재해야 할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실제로 재무부는 방크 미스르 UAE 지점에 곧바로 2차 제재를 부과하는 대신, 미국 은행의 환거래 계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위의 조치를 택했다.

미국 금융 시스템에서 외국 은행을 완전히 퇴출할 경우 해당 금융기관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질 뿐 아니라 해당 국가 경제와 국제 금융시장에 연쇄적인 충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란 테헤란의 한 외화 환전소에 이란 지폐가 전시돼 있다. [AP]


특히 환거래 시스템은 국경 간 결제를 실물 현금 이동 없이 처리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국제금융의 핵심 인프라로 꼽힌다. 외국 기업이 달러를 송금하면 미국 청산은행이 송금 측 계좌에서 달러를 차감하고 상대방 계좌에 같은 금액을 더하는 방식으로 거래가 완결된다.

미국 은행 입장에서도 환거래 업무는 수수료뿐 아니라 예치금 확보와 해외 고객 대상 금융서비스 확대 등을 통해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이다.

따라서 미국 금융기관에 대한 제재까지 강화할 경우 이들이 환거래 업무 자체를 줄일 가능성이 있다. 이는 미국 금융산업에 부담을 줄 뿐 아니라 국제 금융망에서 미국 은행의 역할을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WSJ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