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에 맞서 손잡은 시진핑·푸틴…“미국 중심 아닌 다극화 세계”

3개월 만에 정상회담…시진핑 “세계 다극화 역량 강화”
푸틴 “중러 전략협력은 국가관계 모범”…대 서방 공동전선
중·러·인도·이란 SCO 집결…‘두개의 전쟁’ 속 비 서방 결속
5월 20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회담 후 다도 행사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

[헤럴드경제=서지연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와 제재, 군사력을 앞세워 국제질서를 재편하는 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개월 만에 다시 만나 ‘세계 다극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맞서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비(非)서방 세력의 결속을 강화하겠다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 전쟁이 동시에 이어지는 상황에서 중국·러시아·인도·이란 정상들이 상하이협력기구(SCO)에 집결하면서 이번 회의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과 서방 중심 질서에 맞서는 외교 무대로 부각됐다.

31일(현지시간)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SCO 정상회의가 열린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서 양자 정상회담을 했다. 두 정상의 만남은 지난 5월 푸틴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 이후 약 3개월 만이다.

시 주석은 회담에서 “중국은 러시아를 포함한 각국과 함께 SCO 발전 대계를 논의하고 싶다”며 “글로벌 거버넌스 개혁을 이끄는 한편 평등하고 질서 있는 세계 다극화를 추진하는 역량을 강화하고 싶다”고 밝혔다.

미국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세계 다극화’는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를 견제할 때 지속적으로 내세워온 핵심 외교 구호다.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와 경제제재를 외교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이란에 대한 경제·군사 압박까지 강화하는 시점에 나온 만큼 대미 견제 메시지가 담겼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시 주석은 현재 국제정세에 대해 “불확실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요인이 명확히 늘어나고 있다”고 진단하며 러시아를 비롯한 SCO 회원국들과 글로벌 거버넌스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푸틴 대통령도 중국과의 전략적 연대를 강조했다. 그는 “오늘날 복잡한 지정학적 상황 속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포괄적 파트너십과 전략적 상호 협력은 국가 간 관계의 모범”이라고 말했다.

이어 SCO뿐 아니라 유엔과 브릭스(BRICS), 주요 20개국(G20) 등 다자기구에서도 중국과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미국과 서방이 주도해온 국제기구와 경제질서에서 중러의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경제 분야에서도 양국은 밀착을 과시했다. 푸틴 대통령은 에너지와 산업, 우주, 교통·물류 분야에서 주요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며 이달 중순 중국 컨테이너선이 북극항로(NSR)를 따라 첫 정기 운항을 시작한 점과 양국 농산물 수출이 34% 증가한 점 등을 강조했다.

인공지능(AI)을 포함한 첨단기술 협력도 확대한다. 푸틴 대통령은 “AI 기술을 포함한 디지털 혁신이 양국 경제 발전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며 중국과 관련 분야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중국으로 공급하는 ‘시베리아의 힘-2’ 가스관 사업도 논의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가스관이 완공되면 러시아는 연간 500억㎥ 규모의 천연가스를 중국으로 수출할 수 있다. 서방의 대러 제재로 유럽 시장이 축소된 러시아로서는 중국이라는 대체 시장 확보가 더욱 중요해진 상황이다.

다만 공급 가격 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지난 5월 정상회담에서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중국 측은 이번에도 구체적인 가스관 논의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번 SCO 정상회의에는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뿐 아니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 등 17개국 정상이 참석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고 이란 역시 미국의 군사 공격과 경제 고립 압박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와 이란이 중국·인도와의 관계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SCO가 미국과 서방의 압박에 대응하는 비서방 국가들의 외교·경제 협력 무대로서 존재감을 키우는 모습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모디 총리와 별도로 회동했고 페제시키안 대통령도 모디 총리와 만났다. 이란 전쟁 발발 이후 페제시키안 대통령과 모디 총리가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는 무역 압박을, 러시아에는 우크라이나 문제를, 이란에는 군사·경제 압박을 동시에 가하는 상황에서 시진핑과 푸틴이 꺼내 든 ‘다극화’ 메시지는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국제질서에서 벗어나겠다는 중러의 전략적 이해가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