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원유 매장량보다 많은 650억배럴 손에 쥔 트럼프…‘석유패권’ 승부수

마두로 축출 8개월 만에 베네수엘라와 ‘오일 딜’…17개 유전 개발
생산량 55% 확보·원가 우선구매권까지…중·러의 중남미 영향력 차단
시설 복구에 최소 수년…미국기업 투자·베네수 국민 반발은 변수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거리에 유전이 그려진 벽화 옆을 한 시민이 걸어가고 있다.[AP=연합]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거리에 유전이 그려진 벽화 옆을 한 시민이 걸어가고 있다.[AP=연합]


[헤럴드경제=서지연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축출한 지 8개월 만에 미국 전체 원유 매장량보다 많은 650억배럴 규모의 베네수엘라 원유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했다. 이란 전쟁으로 글로벌 원유 공급 불안이 커진 가운데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과 러시아의 중남미 영향력을 차단해 서반구 ‘석유 패권’을 틀어쥐겠다는 구상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28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와의 석유 개발 합의를 발표하며 이를 “전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석유 합의”라고 자평했다.

합의에 따라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과 가까운 현지 사업가 알레한드로 베탕쿠르의 회사 ‘노스 아메리칸 블루 에너지 파트너스(NABEP)’는 향후 100년간 베네수엘라 미개발 유전 17곳의 개발권을 갖는다. 미국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원유의 55%를 확보한다.

17개 유전의 추정 매장량은 650억배럴에 달한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국인 베네수엘라 전체 매장량 3030억배럴의 5분의 1을 넘는다. 미국의 원유 매장량이 약 460억배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합의 대상만 미국 전체 매장량의 약 1.4배에 달한다.

미국은 NABEP의 비경영 지분 35%를 갖고 생산량의 20%를 원가로 우선 구매할 권리도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 국방부 전략자본실(OSC)이 매우 낮은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있는 ‘페니 워런트’ 방식을 활용하는 방안도 거론됐다.

미국 정부가 사실상 투자자로 참여해 지분과 원유 구매권을 확보하는 이례적인 구조다. 다만 미 국방부는 OSC가 민간기업의 지분을 직접 취득하지 않으며 법률상 대출과 대출보증 등의 방식으로만 자본을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는 이란 전쟁으로 글로벌 석유 공급망의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대규모 원유 공급원을 확보했다는 의미가 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이지만 생산 원유가 휘발유 등에 적합한 경질유에 집중돼 있어 항공유 등 생산에 필요한 중질유 상당량을 수입한다. 베네수엘라는 미국 정유시설에 적합한 중질유가 풍부하다.

베네수엘라 원유를 지렛대로 서반구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계산도 깔렸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주 대륙에서 미국의 배타적 영향력을 강화한다는 이른바 ‘돈로 독트린’을 내세워왔다. 이번 합의를 계기로 베네수엘라에 상당한 규모의 미군이 주둔할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중남미에서 세력을 넓혀온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견제도 한층 강화될 수 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제 분야의 성과로 내세울 수 있다는 점도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호재다. 이란 전쟁 이후 국제유가 상승이 미국 내 물가 부담으로 이어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합의를 대대적으로 부각하면서 감소한 미국의 전략비축유(SPR)도 다시 채우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650억배럴의 원유가 실제 시장에 공급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투자다. 베네수엘라는 과거 외국 기업의 자산을 몰수한 전례가 있고 정치·치안 불안도 여전하다. 오랜 경제난과 제재로 석유 생산시설이 크게 낙후돼 대규모 복구 작업도 필요하다. 베네수엘라 원유 생산량을 과거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최소 10년에 걸쳐 수십억달러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기대처럼 이번 합의가 단기간에 국제유가를 끌어내리기도 쉽지 않다. 개발되지 않은 유전에서 실제 원유 생산량을 대폭 늘리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만큼 당장의 글로벌 공급 확대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 석유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투자에 뛰어들지도 미지수다. 마두로 전 대통령 체포와 미국 압송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베네수엘라 투자를 독려했지만 정치적 불확실성과 투자 위험을 이유로 기업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여왔다.

베네수엘라 내부의 반발도 합의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할 변수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오랫동안 석유자원에 대한 국가 주권을 강조해온 만큼 자국 핵심 자원을 사실상 미국에 넘겼다는 비판이 커질 수 있다.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이 선거를 통해 집권한 권력이 아니라는 점도 향후 정권 교체 시 합의가 유지될 수 있을지를 둘러싼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