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공간에 울리는 다양한 목소리…‘2026 부산비엔날레’ 개막

‘불협하는 합창’…22개국 46팀 참여
(구)부산남고·스페이스 원지·부산현대미술관서 개최
다양한 매체로 연결·저항 가능성 탐색


2026 부산비엔날레 (구)부산남고등학교 운동장 전경. [김현경 기자]


[헤럴드경제(부산)=김현경 기자] 수업 시간표 옆에 ‘책걸상 이동 금지’라는 글자가 적힌 녹색 칠판. 지금도 학생들이 뛰어다닐 것 같은 익숙한 교실에 책상 대신 대형 모니터가 놓여 있다. 화려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영상은 낡은 학교와 다르면서도 묘한 공명을 이룬다.

2년마다 열리는 현대미술 축제 부산비엔날레가 ‘불협하는 합창(Dissident Chorus)’이라는 주제로 29일 막을 올렸다.

2026 부산비엔날레에는 22개국 46명(팀)의 작가가 참여해 설치, 사운드, 퍼포먼스, 영상, 조각 등 다양한 매체의 작업을 선보인다. 서로 다른 지역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들은 부산이라는 도시를 무대로 소리와 몸, 노동과 이동의 기억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이번 비엔날레는 부산현대미술관, (구)부산남고등학교, 스페이스 원지 등 세 곳에서 개최된다. 기존의 부산현대미술관 외에 폐교인 부산남고, 폐창고인 스페이스 원지를 전시 공간으로 선정해 역사적·생태계적 의미를 더했다.

아말 칼라프 2026 부산비엔날레 공동 전시감독은 28일 프레스 프리뷰에서 “사람들이 한데 모였을 때 형성되는 것이 소리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정치를 고민해 볼 공간이 생긴다. 주제에서 합창은 화음이 아니라 ‘다성’을 의미한다.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작가들 하나의 호흡 가운데 자기의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을 합창이라고 명명했다”고 밝혔다.

에블린 사이먼스 공동 전시감독은 “김진숙 활동가의 시위,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촛불 집회, 계엄 반대 집회 등 한국의 살아 숨쉬는 시위들이 상징적 의미로 다가왔다. 한 나라가 시위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이것을 기록해 왔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창조의 포인트로 작용했다”며 “많은 작가들이 장소특정적 작품으로 함께했고, 특히 한국 작가들은 70% 이상 신작으로 참여해 현실을 반영하는 전시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말 칼라프(왼쪽)·에블린 사이먼스 2026 부산비엔날레 공동 전시감독이 28일 프레스 프리뷰에서 전시를 설명하고 있다. [김현경 기자]


부산 영도구에 위치한 (구)부산남고는 1974년부터 올해 2월까지 고등학교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학교가 강서구 신축 교사로 이전하면서 생긴 빈 공간을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파티마 칼림 칸의 ‘엎질러진 물’은 집과 학교, TV 드라마를 통해 여성의 삶에 스며드는 규율을 살펴보는 작품이다. 교실에 놓인 책상과 시리얼 상자는 작가가 자수와 드로잉, 레이스, 인조 모발을 더해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돼 있다.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획일적인 규범이 만들어내는 인위성을 드러낸다.

이란과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알리아스카르 아바카스는 (구)부산남고 운동장과 부산현대미술관을 연결하는 장소특정적 작업 ‘주문’을 선보인다. 학교 운동장에 세 가지 색의 재활용 직물이 거대한 악보처럼 펼쳐지고, 관람객은 그 위를 걸으며 기하학적 패턴과 보호의 의미를 지닌 기호, 문양을 마주하게 된다.

부산 작가 박현성은 옛 급식실을 푸른빛과 조각, 소리로 채운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공간을 따라 이어지는 호스와 조명, 바닷속 생명체를 닮은 조각들은 폐교의 급식실을 낯선 바다의 풍경으로 바꾼다.

전시장에서 만난 박현성은 “학생과 교직원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공간이 버려진 것을 보고 생명력이 멈춰 섰다고 생각했다. 영도 앞바다에서 영감을 받아 전체 공간을 바닷속처럼 연출했다. 그 안을 탐험하면서 잃어버린 요소들을 찾아보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2026 부산비엔날레 스페이스 원지 전시 전경. [김현경 기자]


영도 바다 앞의 스페이스 원지는 과거 선박 장비를 임대 보관하던 폐창고다. 화물이 오가고 노동의 땀이 밴 이 전시장에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생존, 저항과 투쟁을 다룬 작품들이 자리한다.

필리핀 출신 작가 조아르 송쿠야는 선원으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갑판 위 생활과 노동을 회화, 드로잉, 사운드로 표현했다. 100여 점의 연작 회화 ‘선원직 프로젝트’는 긴 항해의 시간을 담은 시각적 기록이다. 이 작품은 전시 장소의 역사와 이어지며 서로 다른 바다와 항구, 사람들의 풍경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한다.

벨기에 작가 브라힘 탈은 비엔날레 주제와 같은 제목의 사운드 설치 작품 ‘불협화음의 합창: 바다의 창조’를 선보인다. 합창단원 키에 맞춰 높이가 다르게 제작된 19대의 스피커에선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로 바다가 되고 싶은 열망을 노래하거나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연약하고 단편적인 목소리는 관객의 존재에 반응해 점차 높아지면서 하나의 합창을 이룬다.

탈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도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낙동강 하구 퇴적섬 을숙도에 있는 부산현대미술관은 이번 비엔날레의 주 전시장이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이곳에서는 28명(팀)의 작가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류성실은 허공에 멈춘 리프트 위에 12명의 유령 같은 마네킹이 서 있는 설치·사운드 작품 ‘만가지 꿈’을 선보인다. 음악이 시작되면 마네킹 입에 달린 금빛 술이 혀처럼 흔들리고 눈에서는 빛이 나온다.

15분 길이의 합창곡은 세계 일주 뒤 금의환향할 것을 요구받는 아이, 95세에도 원대한 꿈을 꾸며 달려야 하는 해골, 500년째 완수되지 않은 과업을 짊어진 소녀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세 인물은 모두 끊임없이 꿈꾸고 생산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강요받는다.

작가는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에서 사람이 국가의 가능성을 대신해야 한다는 집단적 열망이 교육과 대중매체, 사회적 기대를 통해 개인의 삶 속에 스며든 현실을 냉소적으로 표현한다. 국가가 정한 꿈과 높은 목표를 부여받고 끝없는 성장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한국 사회의 강박을 일깨운다.

2026 부산비엔날레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김현경 기자]


티안주오 첸의 ‘오션 케이지’는 설치미술과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몰입형 작품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래잡이를 이어가는 인도네시아의 외딴 마을 라말레라의 신화와 사회를 배경으로, 어부와 고래, 신과 조상이 서로 얽혀 있는 관계망을 미술과 안무, 음악으로 펼쳐 보인다. 작가는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종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끈다.

팔레스타인 작가 야잔 칼릴리는 39개의 캡모자에 시구절을 새긴 작업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언어처럼 지닌다’를 출품했다. 관람객이 모자를 사서 쓰고 나가면 시는 여러 사람의 몸과 장소로 흩어진다.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을 수 없고 한번에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모자를 쓴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가까이 설 때만 조각난 문장들이 잠시 이어진다.

작가는 종이 대신 군중을 시가 펼쳐지는 공간으로 삼았다. 소비와 유통을 따라 이동하는 모자를 통해 고통과 땅, 유산과 증언을 실어 나른다. 모자 판매 수익은 팔레스타인을 돕는 일에 쓰인다. 작품이 흩어지는 과정은 자원을 나누고 소외된 이를 돕는 행위가 된다.

세계적인 과학소설(SF) 작가 어슐러 K. 르 귄​과 예술가 그룹 5D은 르 귄이 직접 남긴 지도와 드로잉을 바탕으로 한 설치 작품 ‘축제’를 선보인다. 푸른빛의 지도와 두 개의 탑, 영상과 직물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관람객은 르 귄이 상상한 세계를 따라가며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에블린 사이먼스·아말 칼라프 공동 전시감독은 “이것은 지휘자가 없는 합창”이라며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어수선하지만 넉넉하게 어우러지는 가운데, 공식적인 이야기 너머에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들에 주파수를 맞춰 보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전시는 오는 11월 1일까지 이어지며 퍼포먼스, 워크숍, 토크, 라디오 프로그램 등 전시와 연계된 프로그램도 운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