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발레, 한국으로 중심 이동”…그런데 왜 인재들은 한국을 떠날까?

세계무대 장악한 ‘K-발레’ 30년
제1회 서울글로벌발레포럼 개최
한국 찾은 6개 발레단 수장들
한국인 무용수와 한국 발레 극찬


마린스키 발레 퍼스트 솔리스트 전민철, 보스턴 발레 세컨드 솔리스트 김석주,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수석 무용수 박선미, ABT 솔리스트 한성우/뉴시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지금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세계 정상급 발레단의 예술감독들이 바라본 한국은 더 이상 ‘변방’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러시아와 미국을 거쳐 이제 ‘발레의 중력’은 한국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거장들은 입을 모은다. 판단의 근거는 세계 유수 발레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인 무용수들에게 있다.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최초의 동양인 수석 김기민과 솔리스트 전민철,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수석 서희·박선미, 솔리스트 한성우, 파리 오페라 발레 에투알 박세은,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 최영규 등 세계 주요 무대에 한국인들이 포진해 있다. 불과 30년도 되지 않은 한국 발레가 압축 성장의 결실을 맺는 요즘이다.

사샤 라데츠키 ABT 스튜디오 컴퍼니 예술감독은 최근 한국 기자들과 만나 “역사를 돌아보면 발레의 중심은 이탈리아, 프랑스를 시작으로 여러 나라로 옮겨 다녔다. 지금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중심이 한국”이라며 “이곳에서 벌어지는 훌륭한 일들을 목격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잉그리드 로렌첸 노르웨이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은 “최근 몇 년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용수들을 배출해 왔다”며 “그 원천을 찾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경험하고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케이글로벌발레원에 따르면 포럼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마린스키(2명), ABT(7명), NDT(3명), 미국 보스턴발레단(7명), ABT 스튜디오 컴퍼니(2명)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무용수는 23명에 달한다. 발레단 수장들은 한국 무용수들의 태도와 기량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K-발레의 위상


러시아의 발레 명가 마린스키 발레단(2명), ‘미국 발레’를 이끄는 ABT(7명)와 보스턴 발레단(7명), 안무 거장 한스 판 마넨이 몸담았던 네덜란드 국립발레단(3명), ABT 스튜디오 컴퍼니(2명). 이곳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무용수는 23명에 달한다. 발레단 수장들은 한국 무용수들의 태도와 기량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테드 브랜슨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전 예술감독은 “한국 무용수들은 기술적·예술적으로 매우 잘 준비되어 있으며, 다재다능하고 자기관리가 철저하다”며 “특히 집중력이 뛰어나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어 다양한 스타일과 컴퍼니에 적응하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다”고 평했다.

23년간 이 발레단을 이끈 그는 2008년 NDT에 입단한 최영규를 오랜 시간 지켜봐 왔다. 브랜슨 전 예술감독은 “NDT에서 18년째 활동하고 있는 최영규는 한결같은 헌신과 성실함으로 수석 무용수가 됐다. 이런 점은 단체의 다른 무용수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며 “늘 성실하게 클래스에 임하고 모든 일을 다 해내면서도 모두에게 친절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직업윤리와 태도의 수준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극찬했다.

제1회 서울글로벌발레포럼에 참석한 6개 발레단 수장과 한국인 무용수들 [케이글로벌발레원 제공]


발레리나 서희가 수석 무용수로 있는 아메리칸 발레시어터(ABT)의 수잔 재피 예술감독은 “한국 무용수들에게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다재다능함”이라고 짚었다. 이날 함께 자리한 솔리스트 한성우와 최근 수석 무용수로 승급한 박선미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재피 감독은 “한성우는 훌륭한 클래식 무용수일 뿐 아니라 캐릭터 역할도 잘 소화해 유쾌하면서도 거의 모든 역을 완벽히 소화한다”고 했고, “박선미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체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호평했다.

한국인의 몸에 밴 예의와 상호 존중의 태도는 해외 발레단 수장들이 특히나 극찬하는 부분이다. 재피 감독은 “한국 무용수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가 윗사람을 존중한다”며 “리허설 때든 언제든 늘 인사를 하는데, 그 모습을 본 다른 미국인 무용수들까지 보고 배워 제가 오갈 때마다 인사를 한다”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젊은 세대가 앞선 세대와 역사를 존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미국에서 이런 부분은 쉽지 않고, 젊은이들이 윗세대보다 자신들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며 “한국 무용수들이 있어 단체에 존중과 예우의 문화가 생겼고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유리 파테예프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마스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2008년부터 16년간 마린스키발레단을 이끈 전 예술감독이자 김기민, 전민철을 발탁한 스승이다. 파테예프 마스터는 “한국, 특히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육 방식의 일부이자 동양 문화권 특유의 방식”이라며 “스승과 무용수 사이에 좋은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좋은 결과를 억지로 만들어내려 하지 않아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니 자연스럽게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고 설명했다.

현재 마린스키의 뛰어난 아웃풋은 그가 발탁한 한국의 발레돌 전민철이다. 지난해 입단해 첫 시즌을 마친 전민철은 이날 “마린스키에서 파테예프 선생님께 정말 많은 걸 배웠고, 특히 ‘몸으로 말하는 법’이 가장 많이 성장했다”며 “역할마다 작품과 버전에 따라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배우며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한예종 김선희 교수,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에게도 거듭 감사 인사를 건네 스승에 대한 예우와 바른 인성을 증명했다.

유수 발레단이 바라본 한국 무용수들은 입단 때부터 ‘완성형’에 가깝다. 미코 니시넨 미국 보스턴발레단 예술감독은 “한국 무용수들은 학교 과정에서부터 현대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접해본 덕분에 컴퍼니 생활과 새로운 스타일에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게 적응한다”며 “완성된 패키지로 다른 나라 무용수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래서 오히려 어떤 예술적 색깔을 입히고 개인의 기술을 잘 개발해 줄 것인가가 발레단 입장에선 즐거운 고민”이라고 했다.

수잔 재피 감독 역시 “한국 무용수들은 완벽한 테크닉과 깊은 예술성을 지니고 스튜디오에 들어온다”며 “학교에서 배출되는 단계부터 이미 세계적 무대의 출발선에 완벽히 부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성장해 발레 교육을 받고 세계 발레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무용수들도 한예종을 비롯한 학교 교육의 강점으로 ‘기본기’를 꼽았다. 전민철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기본기를 다졌다면, 지금은 기본기를 활용해 나만의 매력을 만들며 성장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박선미 역시 “한국 학생들은 기술적인 면에서 대단히 뛰어나다”고 강조했다.

“인재들은 왜 한국을 떠나는가”…향후 100년을 바라보며


발레계의 지형도를 바꿨지만 한국 발레계의 토양은 여전히 빈약하다. 뛰어난 기량의 무용수들이 전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 꽃을 피웠으나, 발레 전문 학교의 부재, 콩쿠르와 입시 위주의 교육, 취약한 제작 기반과 예술 생태계의 한계는 한국 발레가 넘어야 할 과제다.

미코 니시넨 감독은 “한국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기본기의 강점은 교육기관에서의 훈련 방식과 교육 시스템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빠른 성장으로 이어진다”며 “한국은 이렇게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하는데, 왜 그들은 한국에 남지 않는지 질문해야 한다”고 짚었다.

제1회 서울글로벌발레포럼 [케이글로벌발레원 제공]


그러면서 니시넨 감독은 “이 뛰어난 인재들을 국내에 수용하고 붙잡아 둘 수 있도록 어떻게 변화하고 적응해야 하는지 역시 함께 물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현재 한국 발레는 짧은 시간 동안 양적·기술적 성장을 이뤘으나, 생태계를 아우르는 기초 체력은 부족하다. 창의적 안무가의 숫자는 턱없이 적고, 해외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스타 무용수에게 의존해야 관객을 모을 수 있는 구조다.

수잔 재피 감독은 “훌륭한 안무가를 찾는 것은 전 세계 발레계의 공통된 난제”라면서도 “젊은 세대가 클래식과 현대 발레가 조화된 다양한 글로벌 안무를 접하며 창의성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크리스토퍼 햄슨 스코티시발레단 예술감독은 “창의적인 인재를 육성하는 것은 단기적인 성과가 아니라 국가와 지역사회의 장기적인 문화적 투자를 통해 이뤄진다”고 덧붙였다.

무용수들이 한 명의 예술가로 잘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비단 기량 향상만을 위한 교육이 아니다. 사샤 라데츠키는 “헌신적이고 집중력이 뛰어난 무용수들일수록 스스로에게 가혹한 완벽주의에 빠지기 쉽다”며 “지도자들은 이들을 로봇이 아닌 개개인의 인격체로 대하며 리스크를 감수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발레는 지난 30년을 발판 삼아 백년지대계를 구상하고 있다. 테드 브랜슨 전 감독은 “한국이 지난 수십 년간 눈부신 성장을 이뤄낸 것은 분명하다”며 “트레이닝뿐만 아니라 안무와 예술의 가치, 사회적 유의미성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이어가고, 정부와 민간의 지원 속에서 발레의 중심지로 더욱 단단히 자리 잡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케이글로벌발레원의 예술감독으로 이 포럼을 이끄는 김선희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는 “세계 무대에서 자리 잡은 이 무용수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발레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훌륭한 발레 강국이 되고, 세계 발레의 미래를 이끄는 글로벌 플랫폼의 역할을 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