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한령, OTT, 코로나도 버텼는데 AI 못버텨”
전투·감정선 담은 시퀀스를 AI로 대체 결단
“시청자, AI 아닌 ‘얼마나 재미있느냐’가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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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영 모피어스 스튜디오 대표가 서울 마포구 소재 모피어스 스튜디오에서 드라마 ‘김부장’에 사용된 가상 이미지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은 다중노출 합성 촬영. 임세준 기자 |
인공지능(AI)으로 전 산업계가 변혁을 맞고 있다. 방송, 드라마, 광고, 영화 등 영상 콘텐츠도 AI 시대를 거치며 거센 변화의 시기를 지나는 중이다. 만드는 것은 제작자이지만, 소비자는 대중이다. 업계가 AI의 파고를 넘는 중에도 대중은 AI에 대한 거부감을 쉽사리 거두지 못했다. 어색한 움직임, 부자연스러운 표정, 어딘가 이질적인 색감. ‘AI가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중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이런 통념을 깨부순 건 SBS 드라마 ‘김부장’이었다. 극 중 3분 분량의 시퀀스가 100% AI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방송 후 열흘이 지나서야 뒤늦게 알려지면서다. 눈으로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수준의 기술, 그리고 그 기술로 완벽하게 구현해 낸 영상은 AI를 향한 대중의 벽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잘 만든 이야기 앞에서는 기술의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김부장’이 증명한 셈이다.
이 시퀀스를 만든 건 150개 이상의 AI 모델을 연결해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는 플랫폼 ‘에이크론(AICRON)’이다. 그 뒤에는 23년간 영화·드라마 VFX(시각특수효과) 프로듀서로 일하며 후반 작업의 문법을 몸으로 익혀온 이수영 모피어스 스튜디오 대표가 있다. 서울 마포구 모피어스 스튜디오 사무실에서 이 대표를 만나 AI 시대 영상 제작 현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피어스 스튜디오가 ‘김부장’의 AI 프로젝트를 제안받은 것은 지난해 12월이었다. 대종상과 청룡영화상을 수상 경력의 VFX 슈퍼바이저인 류재환 모피어스 스튜디오 부대표가 프로젝트를 총괄했다. AI로 3분 분량, 그것도 전투와 감정선이 모두 담긴 시퀀스를 통째로 대체하는 것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이 대표는 “그때만 해도 AI가 실사 분위기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드라마 제작진은 결단을 내렸다. 모피어스는 자사 플랫폼 에이크론으로 완성한 결과물로 제작진의 신뢰에 부응했다. 이 대표는 도전이 호평을 이끌어낸 이유로 “시청자는 ‘AI가 만들었는가’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재미있느냐’를 기준으로 작품을 본다”는 점을 꼽았다.
‘김부장’ 이후 AI에 대한 대중의 진입장벽은 눈에 띄게 허물어졌다. 방송사와 제작사들은 앞다퉈 AI 제작 시스템 도입을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현장의 온도는 다르다.
이 대표는 “‘김부장’에서 3분을 통째로 AI로 제작하기로 한 결정은 성공했지만, 다른 제작진들에게 ‘당신이라면 결정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못 한다’고 답한다”고 전했다. AI에 대한 신뢰, 즉 리스크에 대한 확신이 아직 충분치 않아서다.
오랫동안 영상 업계에 몸담아온 이 대표가 AI 플랫폼이란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인 이유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한한령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습격도, 코로나도 버텼는데 AI는 정말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가 AI에 먹히기 전에 먼저 AI로 무언가를 만들어보고자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2019년 모피어스 스튜디오를 설립했고, 2월 에이크론을 정식 론칭했다. 구성원은 모두 VFX 업계에서 20년 이상 경력을 쌓은 전문가들로 꾸려졌다.
회사의 철학은 명확하다. 제작의 처음부터 끝까지 AI로 완성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CG(컴퓨터그래픽) 작업을 AI로 한다고 해서 제작비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진 않는다. 캐스팅과 로케이션, 특수효과 비용 중 5~10% 정도 절감될 뿐”이라며 “‘김부장’의 AI 장면은 5일 치 드라마의 촬영 프로덕션 비용을 절감한 사례다. 여기서 ‘김부장’의 가치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플랫폼과 도구가 개발되면서 AI 영상 콘텐츠 제작의 허들은 낮아졌다. 하지만 양질의 영상물을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대표는 “사람들이 봤을 때 AI 작업은 마우스 클릭 ‘딸깍’ 한 번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하지만 ‘김부장’만 해도 3분을 만드는 데 3달이 걸렸다. 광고나 드라마처럼 퀄리티의 장벽이 높은 영역으로 올라가면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 그는 ‘김부장’ 작업 이후 “1억원짜리 제작물을 500만원에 해달라”는 식의 제안은 모두 거절했다. “비싼 것이 다 좋지는 않지만, 좋은 것 중에 싼 것은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런 면에서 이 대표는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그 끝에는 항상 사람이 있다”는 점을 거듭 밝혔다. 각본부터 촬영, 연출, 특수효과 등 영상 제작의 많은 단계에 AI가 침투하고 있지만, 결국 그중에서도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은 실제 현장의 경험과 노하우라는 설명이다.
그는 “흔히 ‘도메인 노하우’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한 분야에서 최소 10~20년 이상 있었던 이들이 갖고 있는 업에 대한 통찰”이라며 “이것은 성공과 실패를 몸소 경험해 오면서 내재화된 감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초보자들이 AI로 85점짜리를 만들 때 100점짜리를 만드는 세밀한 작업은 결국 사람의 몫”이라며 “몇천 개의 컷 사이에서 좋은 것을 구분해 영상을 만드는 것은 경험과 문법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손미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