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0주년은 악착같은 인내의 결과
“지름길은 없다…실패·삶 들여봐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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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프라노 조수미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마치 사자가 우리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것처럼, 빨리 무대에 나가 진짜 내가 이렇게 잘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데뷔 무대였지만 이미 백 번은 서본 사람처럼 분장실에서부터 무대를 갈망했죠.”
1986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 있는 주세페 베르디 극장. 오페라 ‘리골레토’의 질다 역을 맡은 스물세 살의 조수미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데뷔 석 달 전부터 이탈리아 여배우에게 연기를 배웠고, 이탈리아 억양과 표정, 걸음걸이, 목선까지 연습했다. 그렇기에 자신 있었다고 그날을 돌아본다. 세계 무대 데뷔 40년. 최정상에 올랐고, 지금까지도 왕좌를 지키고 있는 조수미의 눈빛은 여전히 스물셋 데뷔 시절처럼 형형했다.
최근 서울 삼성동의 한 호텔에서 만난 조수미(64)는“확실한 건 엄청나게 준비했다는 것”이라며 “소프라노로서, 동양인으로서 보여주기 위해 오페라 한 권을 다른 파트까지 다 외웠다”고 돌아봤다.
물론 올라선 자리를 지키기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조수미는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혼자였기에 수많은 것을 창조할 수 있었고, 견뎌냈기에 지금의 자신에 닿을 수 있었다. 40주년을 맞은 올해 스페셜 앨범 ‘컨티뉴엄(Continuum)’을 내고 전국 투어를 시작한 그는 올 한 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조수미는 “공연을 마친 뒤 새벽 1시 호텔로 돌아와 메이크업을 지우고, 하루의 피로를 푼 뒤 다음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 너무나 기쁘다”며 “노래하는 일이 정말 행복하다”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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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프라노 조수미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
그는 여전히 ‘기록의 아이콘’이다. ‘아시아인 최초’라는 기록은 지금도 조수미의 이름과 함께 나온다. 지난 2일(현지 시각)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마리아 칼라스 특별상’을 받았다. ‘세계적인 디바’ 조수미의 40년 여정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조수미는 “지난 3월 수상 얘기를 들었는데, 처음엔 믿기지 않아 ‘내가 맞냐’고 되물었다”고 했다. 1947년 제정 이후, 유럽의 음악가들에게 돌아갔던 이 상이 마침내 조수미의 손에 들렸다.
“한편으론 이 상이 저를 기다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듣던 음악이에요. 엄마가 9개월 동안 그의 음악으로 태교하셨다고 했거든요. 그를 흠모했고, 그래서 저를 프리마돈나로 만들었던 엄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시상식 전날 베로나에 도착한 조수미는 마리아 칼라스가 1947년 아레나 디 베로나 데뷔를 앞두고 묵었던 아카데미아 호텔에 투숙했다. 칼라스가 베로나 무대에 섰던 나이도 데뷔 당시 그와 같은 스물셋이었다.
“창문을 열면 아레나가 보였어요. 79년 전, 발목에 붕대를 감은 채 섰던 스물셋의 마리아 칼라스가 얼마나 떨렸을지 상상하니 묘한 전율이 일었죠. 저 역시 스물셋에 데뷔했으니까요.”
조수미의 화려한 경력은 ‘안락한 환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그는 국제전화 한 통을 하는 것도 레슨을 받는 것도 쉽지 않은, 주머니 사정이 여의찮은 유학생이었다. 콩쿠르에 참가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재학 시절 포스터에 적힌 상금이 눈에 들어와 ‘콩쿠르 사냥’이 시작됐다.
그는 “돈이 필요해서 콩쿠르를 시작했다”며 “1등을 하면 며칠간 살 수 있겠다, 며칠간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고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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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프라노 조수미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
국제 콩쿠르에선 나가는 족족 1위는 그의 차지였다. 유럽을 휩쓴 동양인 소프라노는 금세 에이전트의 눈에 띄었고, 마침내 베르디 오페라의 주역으로 이탈리아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 하우스 무대에 섰다. 동양인 여성 소프라노가 그 무대의 주인공을 맡은 것은 조수미가 처음이었다.
스물셋의 동양인 신인 소프라노가 첫 리허설에서 노래를 시작하자 깐깐하고 보수적인 ‘오페라 본토’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처음엔 다들 ‘뭐야, 누구지?’ 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노래를 딱 하니까 다들 놀라는 거예요.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꽃을 받은 날이 바로 데뷔 무대였어요. 그 무대를 본 지휘자 카라얀의 비서가 절 그에게 소개했어요. ‘수미 조의 무대는 꼭 봐야 한다고요.’”
카라얀과의 첫 만남도 생생하다. 지금도 두 사람의 만남은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마에스트로가 나를 처음 보자마자 ‘머리카락을 만져봐도 되느냐’, ‘가까이서 눈을 봐도 되느냐’고 했다”며 “마치 매일 지냈던 가족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며 웃었다.
세계 각국의 극장을 오가며 조수미에게 요구된 것은 노래 실력만이 아니다. 그는 언어를 익히고, 지휘자와 연출가, 함께 무대에 서는 동료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요구를 정확하게 전달하며 까다롭고 꼼꼼하게 자기 자리를 만들어갔다. 다음 시즌에 다시 초대받을 수 있도록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타고나는 것 같아요. 노래만 잘하고 무대 존재감이 좋은 것으로는 한 달은 갈 수 있겠죠. 하지만 40년이라는 세월을 세계 각국의 극장에 다니면서 내 위치를 확인하고, 실력뿐만 아니라 내 포지션을 확립한다는 건 모든 게 쉽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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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프라노 조수미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
세계적인 명성, 이정표라는 상징, 한 번도 내려온 적 없는 ‘최정상’의 자리…. 그는 40년의 긴 세월 동안 “잃은 것도 있다”고 돌아본다.
“포기했던 건 아무래도 사랑, 우정, 이런 거겠죠. 친구가 없어요. 친구가 되려면 만나서 식사도 하고 여행도 같이 해야 되는데, 전 혼자 있는 시간에 해야 할 게 많아서 친구가 없어요. 그게 조금 아쉬운 것 같아요.”
사랑도 포기한 것 중 하나였다. 유학길에 오른 것이 실연으로 인한 상처였고, 유학 중에도 빨리 돌아가 ‘사랑’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지만, 조수미의 삶은 늘 ‘음악’이 먼저였다. 그는 “요리도 잘하고 성격도 착한데 지난 10년간 남자들이 접근한 적이 없다”며 웃었다.
그가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존재는 가족이었다. 조수미는 “어떻게 보면 제일 기본적인 걸 다 희생했다”고 읊조렸다.
‘보통의 삶’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고립의 시간’은 그에게 창조로 돌아왔다. 조수미는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나에 관해 깊이 탐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시간 동안 깨우친 것은 “예술엔 지름길은 없다”는 것이다. 후학 양성과 인재 발굴에도 사명을 갖고 있는 그가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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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프라노 조수미 [SMI엔터테인먼트 제공] |
조수미는 “요즘 아이들은 ‘열심히 하면 당장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있다’, ‘콩쿠르 1등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의욕이 넘치는데, 살아보니까 숏컷은 없더라”며 “막연하게 꿈을 꾸기보다는 이렇게 가야 되겠구나 하는 자극이 됐으면 좋겠다. 이 자극이라는 터닝 포인트가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술은 재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 실패의 경험, 삶과 사람을 들여다보며 숙성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볼 거 다 보고, 지나갈 거 다 지나가고, 자동차가 지나가면 먼지도 마시고, 길을 걷다 꽃도 보고, 지나가다 넘어진 사람이 있으면 병원에도 데려가고…. 이런 모든 게 하나하나 쌓이고 쌓여 예술이라는 게 되는 거예요.”
기념일이면 누구나 뒤를 돌아보기 마련이나, 조수미가 40년을 기념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그는 어제보다 내일을 본다. 40주년을 맞아 발매한 스페셜 앨범 ‘컨티뉴엄’ 역시 지나온 궤적을 갈무리하는 마침표가 아니다. 다음 달 열리는 공연(9월 4일, 예술의전당) 역시 40년 커리어를 스토리텔링 콘서트 형식으로 구성하면서도 내일을 이야기한다.
“저의 40년을 마주하며 ‘나도 다시 뭔가를 해봐야겠다. 나도 아직 꿈이 있고, 더 피고 앞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40주년이라고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기념하고 싶지 않아요. 전 지금, 더 아름다워지는 시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