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당타이손도 놀란 지극한 샹송 사랑
“24시간이 모자라” 학업·연주 병행 강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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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 앨범 ‘쇼팽, 포레’를 낸 피아니스트 김세현 [크레디아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7개 음으로 이뤄진 하이쿠(Haiku·일본의 정형시)를 썼다. 쇼팽의 에튀드(Etude·연습곡)를 한 곡씩 공부할 때였다. 곡마다 떠오르는 이미지와 감정을 짧은 시로 붙잡았다.
“여러 번 연주를 하면서 에튀드가 시적인 영감을 줬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하이쿠를 보지 않아요. 오히려 그 틀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그날의 상황과 영감에 따라서 흐름에 맡기게 된 것 같아요.”
미국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에 다니며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복수전공하는 문학도. 열아홉 살의 김세현은 “문학과 음악은 스토리텔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문학 자체가 작곡가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기도 했다.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반대였다”고 돌아봤다.
지난해 프랑스 롱티보 국제콩쿠르를 만장일치로 제패하며 단숨에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린 김세현이 첫 데뷔 앨범을 냈다. 쇼팽과 포레, 거기에 포레의 작품과 포레의 가곡 ‘꿈을 꾼 후에’를 직접 피아노로 편곡한 곡, 샤를 트레네(Charles Trenet)의 샹송 ‘4월의 파리에서’를 담은 앨범이 워너 클래식을 통해 나왔다.
앨범 발매에 맞춰 기자들과 만난 김세현은 “누구나 피아노와 음악을 공부할 때 음반을 내는 것을 꿈꾼다. 그게 지금 내 나이에 실현될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이렇게 한때, 하나의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생애 첫 앨범을 내는 과정에서 수많은 질문이 오갔다. 그는 세상을 향해 내놓은 앨범의 속지를 직접 작성하며 그 고민을 털어놓았다. “꽃집 주인이 손님에게 다양한 꽃다발을 권하듯 청자의 취향에 맞춰야 할지, 미지의 정원으로 유혹해 경이로움을 일깨워야 할지, 통일된 예술적 비전과 광대한 풍경 속으로 이끄는 오디세이로의 초대여야 할지 끝없는 질문이 떠올랐다”고 그는 고백했다.
이 앨범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놓인 피아니스트의 기량과 음악성을 담아내는 작업이 아니다. 지금 김세현이라는 인간과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작업이었다. 김세현은 “앨범에 어떤 작곡가의 곡을 넣어야 할지가 첫 질문이었다”며 “쇼팽을 중심으로 페어링할 수 있는 작곡가로 그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포레를 넣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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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 앨범 ‘쇼팽, 포레’를 낸 피아니스트 김세현 [크레디아 제공] |
파리에 가고 싶어 롱티보 콩쿠르에 나갔다는 그에게 앨범의 시작점은 파리였다. 김세현과 파리와의 인연이 제법 끈끈하다. 클리블랜드 청소년 콩쿠르에서 우승한 2023년, 첫 유럽 연주를 한 곳도 파리였다. 그해 겨울, 파리의 곳곳을 거닐었다. 그는 “‘셰익스피어 앤 코’ 서점에서 호텔로 가는 길에 센 강을 건너야 했는데 해 질 녘 파리와 센강의 야경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며 “물에 비친 도시의 모습이 다음 날 연주 때도 영감이 됐다”고 회고했다. 지금까지 10번 정도 파리에 갔다는 그에게 파리는 그만큼 ‘특별한 공간’이 됐다.
쇼팽과 포레를 ‘페어링’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세현은 “우리(쇼팽, 포레, 김세현) 셋 중 누구도 파리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결국 모두 그곳으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며 “그 도시는 우리 세 사람의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이어주고 있다”고 앨범에도 적었다.
쇼팽의 연습곡은 데뷔 앨범에서 중심을 잡는 레퍼토리다. 12개의 연습곡(작품번호 25)을 중심에 두고 “노래 아니면 춤곡, 혹은 두 요소를 모두 넣은 곡들”로 앨범을 꾸렸다.
12개의 연습곡 중 ‘지금의 김세현’을 가장 잘 표현하는 곡으로 그는 ‘1번과 3번’ 연습곡을 꼽았다. 흔히 ‘아이올리언 하프’라는 별칭으로 불리지만, 김세현에게 이 곡은 “구름 한 점 없는 분홍빛 하늘로 들어 올린 솜사탕”을 떠올렸다. 그에겐 솜사탕의 달콤함에 푹 빠지곤 했던 어린 시절로의 회상이었다. 조각조각 떠오르는 기억이 그가 적은 짧은 시의 이미지다. 세 번째는 “유니콘이 되길 꿈꾸는 조랑말”을 떠올렸다.
그는 앨범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선 ‘상상력’에 의존했고, 앨범을 듣는 이들에겐 “억제도 부끄러움도 없이 상상력을 풀어놓으라”고 말한다. 이유는 바로 ‘하나의 명제’를 믿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는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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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 앨범 ‘쇼팽, 포레’를 낸 피아니스트 김세현 [크레디아 제공] |
김세현은 “레슨을 받으며 이 말을 알게 됐는데, 정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그동안엔 음악을 이해하고 분석하려고 했다면, 이제는 그 틀을 넘어 더 자유롭게 상상하고 싶다. 예술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많은 경우 자유로움일 것”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번 앨범은 김세현의 완벽주의도 엿보인다. 그는 “악기의 디테일과 연주, 음향과 편집까지 신경을 썼다”며 “전적으로 (전문가에게) 맡기는 분도 있지만, 난 그렇게 할 수 없는 성격이라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했고, 그 과정이 생각보다 길었다”며 웃었다.
앨범은 샤를 트레네의 ‘4월의 파리에서’로 문을 닫는다. 오래전부터 좋아한 곡이다. 롱티보 콩쿠르 우승 이후 혁명 기념일 연주를 앞두고 ‘쇼팽 콩쿠르’ 최초의 동양인 우승자이자 스승인 당 타이손에게 이 곡을 연주하고 싶다고 말하자 스승은 손사래를 쳤다.
그는 “당타이손 선생님이 어떤 곡들은 배워서 되지만, 이런 곡은 프랑스의 문화와 삶과 모든 것들을 흡수하고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곡이라고 우려를 표했다”며 “첫 레슨 때 이 곡을 들려주니 놀라더라. 이후 ‘이 곡을 쳐도 될까요’라고 물으니 ‘아무 데서나 쳐도 된다’고 말해줘 애착이 간다”며 웃었다.
지금의 김세현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유로움’이다. 레퍼토리를 고를 때도, 음악을 해석할 때도 정답을 찾기보다 마음의 결정을 따르고, 한계를 넘는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더 보여주기보단 덜어내는 것이 우선이다.
일상은 늘 치열하나, 그때도 우선은 역시나 피아노다. 학교에 다니며 연주 활동을 함께 하다 보니 시간 관리는 필수다. 학기 중엔 아침과 낮엔 연습을, 오후엔 수업을 듣고, 다시 돌아와 밤 10시까지 연습하는 강행군을 이어간다. 그는 “시간이 늘 아쉽다”며 “그래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정해야 하는데, 내겐 늘 피아노가 우선”이라고 했다.
데뷔 앨범을 내놓은 그의 연주 일정도 빽빽하다. ‘지휘 거장’ 정명훈과 올해만 국내에서 8번의 협연을 이어가고 있다. 오는 27일에도 정명훈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과 호흡을 맞춘다. 내년엔 도쿄필하모닉,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협연을 앞두고 있다. 다음 달 6일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앨범 발매 리사이틀을 갖는다.
김세현은 “계속해서 음악을 섬기는 마음으로 공부하고, 연주자 자신이 아닌 작곡가가 보이는 연주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들려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