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만명 더 굶을 수도”…‘괴물 엘니뇨’에 쌀 못 심고 옥수수 수확 90% 급감

태국·베트남 등 벼 파종 지연…케냐 옥수수 수확량 급감
인도 125년 만에 다섯 번째로 건조한 6월
NOAA “10~12월 매우 강한 엘니뇨 확률 81%”
파나마운하까지 가뭄 직격탄…“최악보다 더 나쁠 수도”
엘니뇨 현상이 표현되는 지구의 모습 <연합뉴스>

[헤럴드경제=서지연 기자] 쌀은 심지 못하고, 옥수수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 아직 정점에도 도달하지 않은 엘니뇨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의 농경지를 말려가고 있다. 올해 엘니뇨가 약 80년의 관측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수준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진짜 고비는 통상 엘니뇨가 절정에 이르는 연말이 될 것으로 보인다.

2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올해 엘니뇨의 영향으로 인도와 에티오피아, 파나마 등에서 이례적인 가뭄이 이어지고 있다. 태국과 베트남 등 아시아 주요 쌀 생산국에서는 벼 파종이 늦어졌고 케냐의 일부 곡창지대에서는 옥수수 수확량이 평년의 10분의 1 수준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엘니뇨는 적도 부근 중·동부 태평양의 바닷물이 평소보다 따뜻해지는 현상이다. 2~7년마다 나타나는데, 문제는 따뜻해진 바다가 전 세계의 바람과 비가 내리는 위치까지 바꿔놓는다는 점이다. 어떤 곳에서는 비가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는 폭우가 쏟아지는 식이다.

올해는 그 정도가 심상치 않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은 오는 10~12월 엘니뇨가 ‘매우 강한’ 수준에 도달할 확률을 81%로 보고 있다. 이 경우 태평양의 주요 관측 해역에서 3개월 평균 수온이 평년보다 2도 이상 높아진다.

일부 전망에서는 일일 해수 온도가 평년보다 3도 이상 높아질 가능성도 나온다. 예상대로라면 1982~1983년과 1997~1998년, 2015~2016년 발생했던 역대 최강급 엘니뇨를 넘어설 수 있다.

사만다 스티븐슨-칼 캘리포니아대 산타바바라 교수는 “3~4도의 차이는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릴 수 있다”면서도 “바다는 그렇게 큰 폭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엘니뇨가 통상 12월께 정점을 찍는데도 벌써 세계 곳곳에서 피해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는 지난 6월 1901년 현대적인 강우량 관측이 시작된 이후 다섯 번째로 건조한 6월을 보냈다. 최근 일부 지역에서 몬순 비가 늘었지만 여전히 상당수 지역에서 강수량이 부족하다.

에티오피아의 비옥한 고원지대는 최근 40년 사이 가장 건조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세계적으로 비가 많이 내리는 국가 가운데 하나인 파나마에서도 일부 지역은 지난 5월 초 이후 큰 폭풍우가 거의 내리지 않았다.

크리스 펑크 캘리포니아대 산타바바라 기후재해센터 소장은 이를 ‘조기 발병 엘니뇨’라고 표현했다. 엘니뇨의 충격이 예년보다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다.

당장 밥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화도 시작됐다. 동남아시아에서는 건조한 날씨 때문에 태국과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등에서 벼를 비롯한 작물의 파종이 늦어지고 있다.

폭염과 가뭄으로 토양이 갈라진 농경지. 이상기후가 옥수수와 밀 등 주요 곡물 생산량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게티이미지]


중미 과테말라에서는 지난달 일부 지역의 강수량이 평년보다 최대 85% 적었다. 비는 내리지 않는데 기온까지 평년보다 높아지면서 옥수수 등 농작물이 이중고를 겪고 있다.

케냐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기근조기경보시스템네트워크 소속 크리스 시토테 연구원은 최근 케냐 서부 주요 곡창지대를 돌아본 뒤 옥수수 작황이 놀라울 정도로 좋지 않았다고 전했다.

평소 9피트(약 2.7m)까지 자라던 옥수수가 올해는 5~6피트에 그쳤다. 농민들이 에이커당 통상 20~30포대를 거둬들이던 곳에서 올해는 불과 1~2포대밖에 수확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곳도 있다.

시토테 연구원은 “지난 10년 동안 현장조사를 해온 사람들조차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고 한다”고 말했다.

곡창지대의 가뭄은 결국 식량 가격과 기아 문제로 이어진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엘니뇨 때문에 올해 말까지 전 세계에서 약 5000만명이 추가로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겪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약 20% 늘어나는 규모다.

쌀과 옥수수처럼 세계인이 주식으로 먹는 곡물의 주요 생산지역에서 동시에 작황이 나빠질 경우 국제 곡물 가격을 자극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식량 수입 의존도가 높은 저소득 국가가 먼저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엘니뇨의 영향은 식탁에서 끝나지 않는다. 세계 교역의 핵심 통로인 파나마운하에도 다시 ‘가뭄 경고등’이 켜졌다.

파나마운하. [AP]


파나마운하는 빗물로 채워지는 호수의 물을 이용해 갑문을 작동시킨다. 비가 오지 않아 수위가 낮아지면 배에 화물을 가득 싣기 어렵고 상황이 더 나빠지면 하루에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 숫자까지 줄여야 한다.

실제 2023~2024년 엘니뇨 당시 극심한 가뭄으로 파나마운하 통항이 제한되면서 세계 해운과 공급망에 차질이 빚어졌다.

올해도 가뭄이 이어지자 파나마운하청은 선박의 최대 적재량 제한을 강화했다. 옥타비오 콜린드레스 운하청 대변인은 상황이 악화할 경우 하루 통항 횟수를 제한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폭염 기록도 심상치 않다. NOAA에 따르면 지난달은 세계 기온 관측이 시작된 1850년 이후 가장 더운 7월로 기록됐다. 2024년 7월과 같은 수준이다. 지크 하우스파더 버클리어스 기후과학자는 올해가 관측 사상 가장 더운 해가 될 가능성을 40%로 보고 있다.

문제는 과학자들조차 올해 엘니뇨가 어디까지 갈지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기존 기후모델은 과거에 발생했던 엘니뇨를 토대로 만들어졌는데 올해 엘니뇨가 과거 기록을 넘어설 정도로 강해지면 예측의 불확실성도 커진다.

스티븐 패튼 스미소니언열대연구소 연구원은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겪었던 최악의 상황만큼 나쁠 것”이라며 “어쩌면 훨씬 더 나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엘니뇨가 아직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재의 가뭄과 흉작은 ‘예고편’에 그칠 수 있다. 올해 말 예상대로 기록적인 엘니뇨가 찾아올 경우 그 충격은 농산물 가격과 세계인의 밥상은 물론 글로벌 물류까지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