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남성 소프라노’ 마리뇨“괴롭힘 이유였던 낭랑한 목소리, 지금은 세상의 선물” [인터뷰]

‘소프라니스트’ 사무엘 마리뇨 인터뷰
21일 예술의전당 바리데기 만난 헨델
자유로운 K-팝처럼 살아있는 예술 꿈꿔
“다름은 한계가 아닌 가능성의 증거”


남성 소프라노 사무엘 마리뇨 버스킹


남성 소프라노 사무엘 마리뇨가 3년 만에 한국을 찾아 바리데기와 엮은 헨델로 관객과 만난다. 윤창빈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열네 살 소년의 세상은 온통 무채색이었다.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또래 소년들의 목소리가 굵직하게 변해갈 때 그의 목소리는 종달새처럼 낭랑했다. 그 목소리는 따돌림과 괴롭힘의 이유가 됐다. 상처와 고통에 한때는 바꾸고 싶은 목소리였다. 심지어 의사를 찾아가 성대 수술까지 고민했다.

“예전엔 제 목소리가 제게 나쁜 것처럼 느껴졌어요. 바꾸고 싶은 것이었고, 노래로 경력을 쌓을 수 있다고 믿지도 못했어요. 그 시절엔 노래가 쉬운 것처럼 여겨져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게 얼마나 어렵고 기술적인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저 자신에 대한 확신도 없었어요.”

결핍이 예술적 무기가 되자, 소년의 세상은 색깔을 찾아갔다. 지금 그의 이름 앞엔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목소리를 지닌 오페라 가수’(영국 가디언)라는 수사가 따라온다. ‘클래식계의 신성’이 된 베네수엘라 출신의 남성 소프라노 사무엘 마리뇨(33)의 이야기다.

3년 만의 한국 공연을 앞두고 만난 그는 “한국 문화를 기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 새 프로젝트를 들고 왔다”고 말했다. 그는 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를 통해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과 헨델의 아리아를 노래한다. 한국 설화 ‘바리데기’와 헨델의 연결고리를 찾아 스토리텔링한 무대다.

“목소리가 저 자신은 아니에요”… 카스트라토 잇는 ‘자연산 고음’


“사람들이 저를 어떤 범주에 넣느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목소리는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구분보다 훨씬 복잡하니까요.“

마리뇨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희귀한 목소리’다. 그는 가성(Falsetto, 팔세토)을 훈련해 고음역을 구사하는 카운터테너와는 다르다. 변성기를 거치지 않는 ‘신체적 특성’ 덕분에 진성으로 여성 소프라노의 ‘최고 음역대’를 소화할 수 있는 지극히 드문 ‘소프라니스트(Sopranist)’ 혹은 ‘남성 소프라노’(male soprano)로 불린다.

그는 “카운터테너는 대화할 때 저음으로 이야기하지만,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못 한다”며 “이게 제가 가진 유일한 목소리”라고 했다.

마리뇨의 삶은 늘 경계를 넘고, 한계를 깨는 일이었다. 피아노와 성악을 공부했고, 베네수엘라 국립무용학교에서 발레를 배웠다. 그의 인생이 달라진 것은 소프라노 바버라 보니와 만나면서였다. 마리뇨의 음악적 출발점은 카스트라토였다.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데카에서 나온 첫 앨범 ‘소프라니스타’가 주목받은 것도 카스트라토를 위해 쓰였던 레퍼토리를 남성 소프라노가 불렀다는 데에 있다.

카스트라토는 17~18세기, 사춘기 이전 소년을 거세해 후두와 성대의 변화를 막고, 성인의 폐활량과 결합해 ‘높은 음역’을 유지하도록 만든 성악가다. 카스트라토가 사라지며, 이들의 레퍼토리는 여성 소프라노나 카운터테너가 가져갔다. 마리뇨는 카스트라토를 위해 쓴 레퍼토리를 자기 목소리로 되살린 성악가다.

그는 “어떤 의미에선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 같은 존재였던 카스트라토는 종종 키가 매우 컸고, 신체가 다르게 형성됐다”며 “이 배역을 노래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나조차도 모든 걸 완벽하게 부를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 역시 “목소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것을 되살리되 아주 조심스럽게,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고 한다.

‘소프라니스트’ 사무엘 마리뇨 [예술의전당 제공]


마리뇨는 남성 소프라노를 바로크 음악과 카스트라토에만 가두는 ‘편견’을 깨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시도를 했다. 지난해 데카에서 나온 ‘루미나(Lumina)’ 앨범은 그의 새로운 이정표다. 카스트라토의 레퍼토리를 되살린 첫 앨범에 이어, ‘소프라노’로서 더 넓은 음악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과정에서 음악과 목소리에 대한 그의 관점도 변했다.

그는 “화려하고 빠른 콜로라투라 아리아는 톡 쏘는 탄산과 반짝임을 더하는 ‘샴페인 한 잔’ 같다면, 서정적이고 연극적인 소리는 천천히,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는 레드와인 한 잔 같다”고 했다.

지금의 마리뇨가 우선시하는 것은 초고음, 초절기교가 아닌 ‘감정’이다. 그는 “내년이면 데뷔 10주년이 되는데 성악가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더 성숙해졌다”며 “이젠 모든 음표가 관객에게 감탄을 주는 것을 넘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길 바란다”고 했다.

마리뇨에게 오해와 혼동은 일상이다. 카운터테너와 소프라니스트는 엄연히 다른 음역과 발성을 가지지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쉽게 이해시키진 못한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도 굳이 문제가 되거나 끊임없이 짚어야 이유도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그 차이를 혼동해도 굳이 바로잡지 않아요. 제 목소리가 저 자신은 아니니까요. 전 그냥 저예요. 모든 목소리는 저마다의 색깔,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요. 중요한 건 그 목소리로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느냐는 거죠. 이젠 먼저 듣고, 그다음에 분류하는 시대로 나아가길 바라고 있어요.”

마리뇨는 음악은 물론 의상에서도 낡은 관습을 통쾌하게 부숴왔다. 2021년부터 검은색 턱시도 연주복을 벗어 던지고, 화려한 치마와 드레스, 메이크업을 선보이며 젠더의 경계를 넘었다. 마리뇨는 “우리는 종종 오페라가 성별에 있어 경직돼 있다고 생각하지만, 카스트라토 시대에는 목소리와 성별, 배역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유연하고 다채로웠다”고 말했다.

남성 소프라노 사무엘 마리뇨. 윤창빈 기자


“학창 시절 성별의 벽을 허물었던 프린스와 마돈나에게서 깊은 영감을 받았어요. 지금의 K-팝에서도 비슷한 에너지를 목격해요. 시각적·예술적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해 내는 자유로움이요. 관습에 도전하는 것은 오페라의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살아있는 예술로 지키는 거예요.”

마리뇨에게 삶의 모든 순간마다 경계를 허무는 일은 사실 “매우 개인적인 일”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인생 전체에서 ‘다르다’는 것은 사람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소리를 내야 하는지,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경계를 넘는 건, 자유로운 상태로 남는 것을 의미해요. 진화하고, 놀라움을 주고, 제가 선택한 예술가이자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유요. 전, 제 ‘다름’이 한계가 되길 원치 않아요. 그것이 가능성의 공간이 되길 원해요. 제가 자부심을 느끼는 건, 목소리가 한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었어요.”

“버려진 자들의 상처를 노래하다”…바리데기와 헨델의 만남


그가 ‘바리데기’ 설화를 접한 것은 우연이었다. 3년 전 한국에 왔을 당시 서점에서 발견한 이 이야기가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바리데기를 자신의 음악으로 무대에 올리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다. 여기에 18세 바로크 음악의 정수인 ‘헨델’을 얹었다. 마리뇨는 이 공연을 “라자냐와 같다”며 “헨델 한 층, 바리데기 한 층, 사무엘 마리뇨 한 층이 섞였는데 굉장히 잘 맞는다”며 웃었다.

그가 ‘바리데기’ 설화와 18세기 헨델에서 찾은 공통 분모는 ‘버림받은 자’들의 이야기였다. ‘버림받은 공주’ 바리데기는 부모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향하는 인물이다. 그는 ‘로델린다’, ‘줄리오 체사레’,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 등의 작품에서 서로 다른 인물의 감정을 한국 설화와 겹춰둔다.

“헨델의 오페라 속 인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개 버림받은 상처를 지닌 비극적 캐릭터가 많아요. 오페라 역사상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 고통과 상실을 품고 있는 인물들이 있어요.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상처 입었던 인물들의 내면을 목소리로 어루만지고, 그 비탄을 숭고한 사랑과 구원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 깊이 몰입하고 있어요.”

사무엘 마리뇨 데카 앨범 커버 [데카 제공]


유년 시절 그를 짓눌렀던 고통과 외로움은 그가 세상과 깊이 소통할 수 있는 예술적 언어가 됐다. 지금도 지난 시간은 가끔 찾아온다. 그는 “괴롭힘의 이유였던 목소리, 매정한 리뷰들은 어릴 적의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하지만 달라졌다는 것을 안다.

“베네수엘라에는 ‘토르티야를 완전히 뒤집다(Darle la vuelta a la tortilla)’는 속담이 있어요. 판세를 180도 바꾼다는 의미죠. 제 목소리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한때는 고통의 근원이었던 것이 강점이 됐고, 커리어가 됐고, 사람들을 연결하는 방식이 됐어요. 세상에 저 자신을 나눌 수 있는 이유가 된 거죠.”

마리뇨는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을 믿는다. 그는 “가끔은 우리를 힘들게 했던 것이 나중에 가장 큰 힘이 되기도 한다”며 “자신을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로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에게 ‘아직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신의 그 부분을 지우지 말라. 언젠가 그것이 당신의 가장 큰 선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마리뇨 자신이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따라갈 이정표가 없던 시절 ‘남성 소프라노’로 자신의 길을 개척한 마리뇨는 존재 자체로 혁신이다. 그는 “더 많은 남성 소프라노가 무대에 서고,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보는 건 큰 기쁨”이라며 “그들이 나의 또 다른 버전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저 사람이 자신의 방식으로 해냈으니,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해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도 들려줬다.

그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비욘세, 마이클 잭슨 등을 들으며 자랐고, K-팝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마리뇨는 “그 모든 것이 내 음악적 자산의 일부”라며 “노래 안에 나 자신을 담는다”고 했다. 바리데기와 만난 헨델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공연을 마친 뒤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각색한 음악극을 독일 무대에 올린다. 싯다르타 내면의 목소리를 맡아 이번에도 음악과 연극의 경계를 넘는다. 마리뇨는 “관객에게 아름다운 소리만 주고 싶지는 않다. 하나의 경험을 주고 싶다”는 바람이다.

“제 삶 모든 것의 중심엔 늘 관대함이 있어요. 제 노래가 누군가의 힘든 순간을 위로하고, 상처 입거나 외로운 밤에 위안과 기쁨을 준다면 그것으로 예술의 소명은 다한 거예요. 음악뿐 아니라 세상에 건넸던 따뜻한 친절로 기억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