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돈도 못 믿겠다”…러시아,예금 압류 공포에 현금 인출 급증

[타스/연합]

[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러시아에서 정부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예금이나 기업 자산을 압류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면서 현금 인출이 급증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군수산업 중심의 전시경제가 금융시스템과 재정에 부담을 키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러시아 중앙은행 자료를 인용해 8월 들어 첫 2주 동안 러시아 은행권에서 약 2864억 루블, 약 34억달러 규모의 현금이 인출됐다고 보도했다. 지난달에도 73억달러가 빠져나갔고, 6월에는 45억달러 이상이 인출됐다.

올해 누적 인출액은 이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2022년 한 해 동안 빠져나간 247억달러, 약 2조 루블을 넘어선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 최대 소매 금융기관 스베르방크의 고위 임원 타라스 스크보르초프는 올해 전체 현금 인출 규모가 침공 첫해의 거의 두 배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전쟁 초기 러시아 정부는 자본 통제와 급격한 금리 인상을 통해 자금 유출을 막았다. 이후 예금 금리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며 현금을 은행에 묶어두려 했지만, 최근에는 예금 몰수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커지면서 개인과 기업 모두 은행 밖으로 돈을 옮기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러시아 재무부 관계자는 WP에 “우크라이나의 무인기(드론)가 날아다니고 건물이 불타면서 은행에 돈을 맡겨두면 돈을 돌려받지 못할 거란 불안감에 러시아인들은 침대나 베개 밑에 현금을 두는 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중앙은행 고문을 지낸 알렉산드라 프로코펜코는 “사람들이 더 이상 러시아의 은행, 금융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며 “정부가 예금을 국유화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결과”라고 진단했다.

현금 수요가 늘어난 데에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러시아 에너지 시설과 전력망이 불안정해진 영향도 있다. 전력 공급 차질로 카드 결제가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면서 현금 거래가 늘었고, 여기에 예금 압류 우려까지 겹치며 대규모 인출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은행권의 유동성 부담도 커지고 있다. 전쟁 이후 러시아 정부가 군수 생산 확대를 위해 대출 확대를 유도하면서 금융권의 부실채권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예금 인출이 급증하자 은행들이 자금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전직 당국자는 “은행들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고 모든 현금을 다른 곳에 투자했는데, 사람들이 매달 5000억 루블씩 찾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금 인출은 러시아 정부의 국채 발행에도 부담을 주고 있다. 재무부는 전쟁으로 불어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려 했지만, 은행들이 유동성 부족으로 국채를 매입할 여력이 줄어들면서 지난달 예정된 국채 발행을 취소했다.

국채시장에서도 불안감이 커지며 러시아 정부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17%까지 치솟았다. 이에 따라 재무부는 추가 국채 발행을 연기해야 했다.

재정 상황도 악화하고 있다.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러시아의 재정적자는 6조4600억 루블, 약 761억달러에 달했다. 이는 올해 예상치였던 3조8000억 루블을 크게 웃도는 규모다.

러시아 중앙은행도 경기 둔화를 반영해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국내총생산(GDP) 대비 0.5~1.5%에서 0~1.0%로 낮췄다. 높은 금리가 민간 투자와 소비를 위축시키는 가운데 전쟁 비용이 재정 부담을 키우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예금 압류 우려는 자금의 해외 유출로도 번지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 자료에 따르면 올해 2분기에만 러시아에서 해외로 이전된 자금은 94억달러를 넘었다. 대기업과 자산가들도 정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돈을 옮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크렘린이 전쟁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대기업의 이익이나 자산을 압류할 수 있다는 불안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억만장자들이 보유한 기업들이 잇달아 국유화 대상이 됐다. 러시아 검찰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515억달러 규모의 자산이 국가에 압류됐다.

지난 6월에는 러시아 최대 농업기업 중 하나인 로사그로 설립자 바딤 모슈코비치와 연계된 76억달러 규모의 자산이 압류됐다. 모슈코비치는 이후 구금돼 대규모 사기 혐의로 기소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기업 관계자는 WP에 “정부가 현금이 필요하면 푸틴은 기업 자산을 싹쓸이할 것”이라며 “돈을 해외로 빼낼 수 있다면 당연히 빼낼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 유가 상승은 러시아 재정에 일시적인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 최근 중동 긴장으로 유가가 오르면서 지난달 러시아 국영 석유·가스 기업의 수입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60% 증가했다. 다만 올해 1월부터 7월까지의 누적 수입은 여전히 전년 동기 대비 11% 감소한 상태다.

러시아의 현금 인출 러시는 단순한 예금 이동을 넘어 전시경제에 대한 신뢰 약화를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된다. 전쟁 장기화로 재정적자가 커지고 금융권 유동성이 악화하는 상황에서, 개인과 기업의 불안 심리가 계속 확산할 경우 러시아 정부의 자금 조달 부담은 더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