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기념 아닌 동시대 플랫폼”…박서보미술관 개관

연희동 작업실 옆에 3년만에 준공돼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작가들 성장하는 문화 플랫폼 비전”


박서보미술관 외관. [박서보미술관 제공]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박서보가 없는 게 무슨 박서보미술관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박서보미술관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박서보를 기리는 공간이 아니라 그가 평생 해 왔던 일들을 그가 돌아갔음에도 지속될 수 있게 하고 하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

한국 단색화 거장 박서보(1931~2023)의 예술 세계를 계승하는 ‘박서보미술관’이 오는 2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문을 연다. 2023년 공사를 시작한 지 3년만이다. 작가의 생전 작업실 바로 옆에 자리한 미술관은 그가 추구한 예술적 가치를 바탕으로 동시대 미술과 소통하는 문화 플랫폼을 비전으로 삼고 있다.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이 18일 서울 서대문구 박서보미술관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김현경 기자]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은 18일 박서보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처음에는 미술관이 아니고 작은 기념관을 염두했다. 대지도 현재의 5분의 3 정도만 확보된 상태였다”며 “이후 아버지(박서보 작가)가 폐암 선고를 받고 예천에서 진행하던 공립미술관이 건축가 선정 문제로 난항을 겪으면서 기념관 대신 미술관을 먼저 짓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에 박 이사장은 매물로 나온 근처 땅을 사들여 설계를 변경하고, 기념관에서 미술관으로 개념을 확장했다. 이후 지난 5월 준공 허가를 받은 후 3개월이 지나 개관하게 됐다는 게 박 이사장의 설명이다.

이유진 박서보재단 이사는 “박서보의 작품과 관련된 숨겨진 이야기들을 전하는 것과 함께, 선생으로서 제자들을 키우고 선배로서 후배들을 이끈 철학을 이어서 다음 세대의 작가들을 소개할 수 있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며 “국내뿐 아니라 해외 여러 기관과도 연계해 작가들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 기능하는 공간을 비전으로 한다”고 말했다.

최문규 건축가(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가 설계한 박서보미술관은 지하 2층~지상 3층의 5개 층, 건축면적 2000㎡ 규모로 조성됐다. 3개의 전시실(SPACE Ø, SPACE 2, SPACE 3)과 워크숍 등 커뮤니티 공간(SPACE 1)으로 구성됐으며, 층마다 야외 정원이 있다. 다양한 콘텐츠를 다룰 수 있도록 미디어 사용 인프라도 갖췄다.

개관전으로는 박서보 화백과 베트남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여성 작가 흐엉 도딘(81)의 작품을 선보이는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이 내년 1월 3일까지 개최된다. 박서보의 회화 25점과 흐엉 도딘의 회화 17점 등 총 42점을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마동은 박서보미술관 부관장은 “다른 시대와 문화적 배경 속에서 작업해 온 두 작가는 오랜 시간 반복하고 축적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을 채우고 또 비워 왔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된다”며 “비워내는 과정이 오히려 깊이를 만들어 내는 역설에 주목했다”고 소개했다.

박서보미술관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전시 전경. [박서보미술관 제공]


박서보는 물에 불린 한지 위에 반복적으로 선을 긋고 밀어내는 ‘묘법’ 연작을 통해 행위와 시간의 축적을 화면에 담아냈다. 흐엉 도딘은 광물 안료를 수십 차례 겹쳐 쌓아 올리며 색의 층위 속에서 빛이 드러나는 회화를 구축했다.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화면의 요소를 절제함으로써 깊이 있는 회화적 공간을 형성한다.

SPACE Ø에서는 두 작가의 1990년대 작품을 통해 서로 다른 조형 언어가 교차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SPACE 2에서는 박서보의 흑색 한지 묘법과 색채 한지 묘법을 통해 묘법 연작의 변화와 확장을 살펴볼 수 있다.

SPACE 3에서는 두 작가의 백색 계열 작품을 중심으로 빛과 물질, 공간이 만들어 내는 깊이를 느낄 수 있다. 특히 8m 높이의 정사각형 공간 ‘큐브’에는 자연광이 쏟아지는 가운데 박서보가 작고한 2023년 작업한 대작 ‘묘법 No.230127’, ‘묘법 No.230128’, ‘묘법 No.230129’ 세 점이 전시돼 압도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또한 흐엉 도딘이 박서보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 가진 만남을 기억하며 제작한 회화 작품 ‘X.K.N.31’(2025~2026)도 전시된다.

박 이사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개월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해외 작가다.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3시간 정도 작품 세계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며 “아름다운 모임이어서 나중에 전시를 한번 함께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그동안 미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거나 주목을 받고 있음에도 일정한 높이 이상으로 올라가기 힘들었던 여성 작가들을 제 위치에 올려놓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서 “지금까지 소장한 전문 작가들의 90% 이상이 한국 여성 작가였다”고 말했다. 개관전에 흐엉 작가를 초청한 것도 여성 작가 발굴의 연장선에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서보 ‘묘법 No.230127’, ‘묘법 No.230128’, ‘묘법 No.230129’. [박서보미술관 제공]


박서보 작가가 살아서 미술관을 봤다면 정원을 가장 좋아했을 것 같다고 박 이사장은 말했다. 그는 “아버지는 칭찬하는 말을 못 했던 분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곳에서 10분 정도 보고 있으면 최고의 칭찬일 것 같다”면서 “말년에 아버지가 가장 즐거워하셨던 일이 정원을 보는 것이었다. 그림은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쏟아내는 일인데, 그 에너지를 보충받는 장소가 정원이었다. 아마 이 공간에 오면 또 이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보지 않으실까 싶다”고 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전부 재단에 기증한 그는 미술관이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한편 내년 1월 3일까지 열리는 개관전 이후에는 한국과 영국 작가로 이뤄진 ‘김치앤칩스’, 한국 남성 작가 류노아 등의 전시가 이어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