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해지는 보이스피싱과의 전쟁
지급정지 제한 외화계좌 ‘구멍’ 노려
“외화계좌 지급정지 시스템 정비시급”
금융감독원이 상품권을 이용한 자금세탁을 막기 위해 판매 한도를 낮추자 보이스피싱 조직들이 ‘외화계좌’를 새로운 통로로 삼기 시작했다. 원화계좌는 보이스피싱 피해가 확인되면 금융회사가 지급정지 조치를 할 수 있지만 외화계좌는 전산상 즉각 묶기 어렵다는 허점을 노린 것이다. 외화계좌 역시 원화계좌처럼 신속한 지급정지가 가능하도록 사각지대를 조속히 메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련기사 6면
▶상품권 막으니 ‘외화계좌’ 노렸다=18일 경찰 등에 따르면, 울산 울주경찰서는 13일 검찰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의 협박 전화를 받고 외화계좌로 2억6000만원을 송금한 40대 여성 A씨의 신고를 접수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피싱 조직은 A씨에게 범죄 연루를 빌미로 겁을 준 뒤 무관함을 입증해야 한다며 주식을 처분해 자금을 모으도록 지시했다. A씨는 이렇게 마련한 2억6000만원을 지정한 외화계좌로 송금했고, 은행 직원의 확인에는 “사촌에게 빌려주는 사업자금”이라고 답했다.
은행 직원은 국내 친척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준다면서 외화계좌로 거액을 송금한 점을 수상히 여겨 거래를 계속 주시했다. 10여분 뒤 A씨가 3000만원을 대출받고 약 590만원의 주식 매도자금까지 추가로 확보하자 추가 송금을 막기 위해 피해자인 A씨 계좌부터 우선 차단했다. 은행마다 외화계좌 지급정지 가능 여부가 달라 타행으로 자금이 빠져나가기 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거래 내역을 재차 살피던 직원은 중고 휴대전화 구매 흔적까지 발견해 A씨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고, 한 에어비앤비 숙소에 ‘셀프 감금’된 상태임을 확인했다. 직원의 설득 끝에 A씨가 경찰 출동을 요청했고, 출동한 경찰은 A씨를 보호해 경찰서로 이동시켰다.
▶“대출 받으려면 달러 거래실적 필요” 사기=최근 들어 외화계좌를 이용해 피해금을 빼돌리는 보이스피싱 의심 거래가 부쩍 기승을 부리고 있다.
외화계좌 대포통장으로 불과 1시간 사이 수천만원의 자금이 10여 차례 잇따라 들어왔다가 10분도 지나지 않아 달러 등으로 환전돼 빠져나가는 식이다. 최근 3년간 외화계좌를 악용한 은행권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금 입금 건수는 총 165건 수준에 그치는데, 지난주 들어선 의심 사례가 평소보다 급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은 상품권을 이용한 보이스피싱 자금세탁을 막는 조치가 강화되면서 외화계좌가 새로운 우회로로 떠오른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최근 금융감독원은 대형마트 등 상품권 발행사와 협의해 무인 키오스크의 상품권 구매 한도를 종전 1회 500만원에서 1일·1회 100만원으로 대폭 낮춘 바 있다.
이에 피싱 조직들은 일부 은행의 지급정지 전산망에서 외화계좌를 선택할 수 없는 공백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국내 은행 상당수의 시스템이 원화계좌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범죄 의심 정황이 뚜렷하거나 피해 신고가 접수돼도 외화계좌에는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따른 지급정지 조치를 즉각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은행별 대응 역량에도 편차가 있다. 6월 금감원이 은행권의 외화계좌 실태 점검에 나섰지만, 외화계좌에서 조회할 수 있는 정보나 지급정지 대응 수준은 여전히 은행마다 제각각인 것으로 파악된다. 사기 수법도 외화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소비자들의 허점을 파고드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출이 필요한 소비자에게 “신용등급을 높이려면 외화 거래실적을 만들어야 한다”며 외화계좌를 개설하거나 다른 사람 명의 외화계좌로 돈을 보내도록 유도하는 수법이 쓰이고 있다.
당국이 관련 전산 시스템을 정비하고 피해금 환급 과정의 실무 기준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금융소비자들은 대출 실행이나 신용등급 상향 등을 빌미로 타인 명의 외화계좌에 거액 송금을 요구할 경우 보이스피싱을 의심해야 한다.
유혜림·이영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