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태풍이 바꾼 ‘사이판 여행 지도’

이스트베이, 마나가하 대신 새 거점 관광지 부상
해변·리조트 없어 원시자연 특성 그대로 간직
산악 코스·동부해안 코스 합친 정글투어 인기
‘신성한 섬’ 포비든 아일랜드, 성산일출봉 연상


한 관광객이 사이판의 새로운 관광 거점 ‘이스트베이’에서 다이빙을 시도하고 있다. 김명상 기자


태풍이 휩쓸고 간 사이판은 심각한 피해를 봤지만, 역설적으로 관광 생태계의 내실을 다지는 전환점을 맞기도 했다. 섬 관광의 상징이던 마나가하가 회복을 위해 일시적으로 빗장을 잠그면서, 그간 개발에서 소외됐던 동부 해안과 산악 지대의 원시적 풍경이 새로운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인파가 빠져나간 해변과 숲은 사이판이 지닌 원시 자연의 가치를 웅변했다. 번잡함에서 벗어나 한적한 여유를 온전히 누리고자 하는 여행자에게 지금의 사이판은 확실한 안식처로서 ‘당장 가야 할 곳’이 되고 있다.

▶닫힌 마나가하, 이스트베이가 대안으로=사이판의 보석’이자 해양 액티비티의 천국으로 불리던 마나가하섬은 8월 초 현재까지 관광객의 출입이 금지된 상태다. 섬 내 시설과 기반 시설 피해 복구는 물론, 섬 내부를 채우고 있던 대형 나무들이 태풍이 몰고 온 강풍에 무더기로 부러지면서, 이곳을 번식지로 삼던 바닷새들의 서식 환경이 심각하게 훼손된 탓이다.

마나가하섬의 부재 속에서 스노클링과 해양 액티비티를 대체할 새로운 거점으로 떠오른 곳이 바로 섬 동쪽 라오라오베이 인근의 ‘이스트베이’다. 잔잔하고 얕은 바다가 이어지는 서부 해변과 달리, 이스트베이는 수직에 가까운 바위 절벽이 바다와 직면한 거친 지형을 자랑한다. 마땅한 해변이 없어 호텔과 리조트가 들어서지 못하는 환경은 역설적으로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조건을 만들어 원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게 했다.

현지 가이드는 이스트베이를 두고 “마나가하섬처럼 알록달록한 수중 환경은 물론, 해안 절벽에 형성된 해식동굴 명소인 그로토의 거친 지형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설명했다.

해안에 들어서면 수심이 얕은 연안에 형성된 산호초 사이로 나비고기와 앵무고기, 박스피시 무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바다 쪽으로 몇 걸음 더 나아가면 수심이 급격히 깊어지는 낭떠러지 수중 지형이 나타난다.

이스트베이 수중 생태계의 가장 큰 특징은 야생 거북이의 집단 서식지라는 점이다. 현지 가이드는 “많이 볼 때는 거북이를 17마리까지 만났다”며 “등딱지가 바위 색과 똑같아서 바로 옆에 있어도 못 알아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땐 직접 물속으로 내려가 살짝 깨워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가끔 무리에서 이탈한 독수리부리 매가오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 역시 이 부근이다.

이스트베이의 하이라이트는 높이 4~5m의 점프대다. 배우 이시영이 이곳에서 뛰어 내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를 모은 장소다. 인간의 공포심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높이라서 선뜻 나서기 어렵지만, 용기를 내 뛰어들면 환상적인 물속 세계가 펼쳐진다.

시내에서 이스트베이로 가는 도로는 정비가 돼 있지 않고, 사유지라 입구가 자물쇠로 막혀 있어 가이드 없이는 입장이 불가하다. 현재 현지 여행사 ‘사이판 어드벤처’ 홈페이지나 ‘PIC 사이판’을 통해 투어를 예약할 수 있다.

▶정글투어로 사이판의 다른 면을 보다=사이판의 대표적 이동 상품은 크게 북부 투어와 정글 투어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정글투어는 태풍의 여파로 당분간 동선이 재편돼 운영된다. 기존에 각각 따로 운영되던 ‘산악 코스’와 ‘동부 해안 코스’를 하나로 통합한 투어다. 한 번의 이동으로 섬 중앙의 고지대와 동남부의 원시 절벽 지형을 동시에 둘러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통합 코스를 둘러본 한 관광객은 “사이판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섬이 이렇게 넓고 다채로운지 처음 알았다”며 감탄했다.

동부 코스의 중심축인 ‘포비든 아일랜드(Forbidden Island)’는 시각적으로 제주 성산일출봉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전망대에 서면 짙은 곤색의 태평양 바다가 수직 절벽에 부딪히며 거센 흰 파도를 만들어낸다. 원주민 차모로인들 사이에서는 신들이 쉬어가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던 곳이다. 섬 주위는 태평양의 강력한 조류가 직접 부딪히는 험준한 해안 절벽으로 이뤄져 있지만, 섬 정상부는 거대한 평원처럼 평평하게 깎여 있어 대조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포비든 아일랜드에서 멀지 않은 ‘탱크비치’는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적 역사를 증언하는 현장이다. 1944년 미군 상륙 작전 당시의 교전 흔적이 여전히 해안에 남아 있다. 해변 구석이나 바위틈을 살펴보면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던 벙커 잔해나 녹슨 탄피 같은 전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산악 코스의 최고도 지점인 ‘타포차우산’ 정상은 해발 474m로 사이판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사륜구동 차량을 이용해 비포장 자갈길을 올라 정상 전망대에 서면 섬 전체가 360도로 펼쳐진다. 산이 섬 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서 날이 좋으면 서쪽의 에메랄드빛 라군 및 마나가하섬, 동쪽의 깊은 태평양 바다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정상 중앙에는 받침대를 포함해 약 5m 높이에 달하는 예수 그리스도 동상이 태평양을 향해 서 있다. 화려한 치장 대신 투박한 콘크리트로 제작돼 현지에서는 ‘콘크리트 지저스’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스페인 지배로 가톨릭 문화가 깊게 자리 잡은 사이판에서 이 동상은 전쟁 이후의 평화를 기원하고자 세워졌다.

타포차우 산기슭의 ‘산타루데스 야외성당’은 현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신과 성모 마리아가 거룩하게 보호한 땅’으로 통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섬 전역이 맹렬한 폭격을 받았음에도 이 야외성당과 동굴 제단만은 포탄 피해를 면했기 때문이다.

성당 한쪽에 자리한 우물에서는 사시사철 용수가 솟아 나온다. 이 물은 오랫동안 주민들에게 ‘치유의 성수’로 여겨졌다. 특히 이 물을 머리에 적시면 지혜를 얻는다는 현지 속설이 있어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이 찾기도 한다. 지난 태풍에도 성당 주변을 둘러싼 보리수나무의 가지는 피해를 입었으나, 성당 건물과 우물 자체는 파손 없이 온전한 형태를 유지해 ‘거룩한 땅’이라는 옛 명성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사이판=김명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