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곧았던 할아버지”…‘고창 만세운동’ 김승옥 선생 손녀의 ‘회상’ [서울N]

‘서울시 주최 광복절 행사 참석’ 일우 김승옥 선생 손녀 김규성씨
김승옥 선생, 고창서 독립운동하다 일경에 붙잡혀 옥살이
“공을 내세우면 공이 아니다” 생전 독립유공자 신청 거절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받고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일제 재판정 등 늘 당당했던 모습, 한번도 잊어본 적 없어
청렴하고 열심히 사는 삶, 할아버지가 물려준 최고의 유산”


1919년 전북 고창에서 ‘3·1 만세운동’ 주도했던 일우 김승옥 선생의 생전 모습. [김승옥 선생 아들 김녕만 씨 블로그]


[헤럴드경제=손인규 기자] “조국의 국토를 잃은 지 십수 년에 아직도 섶나무 자리가 편안한 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어찌 오늘날 이같은 고통을 당할 일이 없겠는가. 약간의 고통은 풀잎에 맺힌 이슬 위의 바람과 같은데 하루 같이 옛 땅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은 물이 동으로 흐르는 듯 변함없을 뿐이로다(김승옥 선생의 옥중 감상문 중 일부).”

“광복절 타종 행사 초대 전화 받고 ‘펑’ 하고 눈물 쏟아져”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지 81년이 지났다.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지금처럼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건 당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잃을 각오로 독립운동을 한 우리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잊고 지내더라도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우리는 나라를 되찾아 준 선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매년 다양한 광복절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번 광복 81주년을 맞아 서울시는 15일 독립유공자 후손 9인을 초청해 타종 행사를 진행한다. 타종 행사에 초대된 일우(一愚) 김승옥(1889~1962) 선생의 손녀 김규성(75) 씨는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헤럴드경제와 만나 “초대 전화를 받고는 눈물이 ‘펑’ 하고 쏟아졌다”며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할아버지 덕분에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행사를 하게 된 것 같아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김승옥 선생의 손녀로 1951년 전북 고창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김승옥 선생이 1962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집에서 3대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김씨는 “어린 시절 봤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항상 학처럼 흰 옷을 입고 곧은 자세로 앉아 무언가를 읽고 계셨던 기억이 난다”며 “엄한 편이시긴 했지만 집에 수시로 사람들이 드나들 정도로 동네에서는 중요한 어르신이셨다”고 떠올렸다.

일우 김승옥 선생의 손녀 김규성 씨. 그는 “평생 청렴하고 열심히 살아온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지금껏 부끄럽지 않게 살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손인규 기자


30세 김승옥 선생, 1919년 고창서 ‘3·1 만세운동’ 주도


김승옥 선생은 일본에 나라를 뺏긴 현실을 그대로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이에 30세가 되던 1919년 고향에서 마음이 맞는 두 명의 동지와 독립운동을 하자며 ‘혈서동맹’을 맺는다. 3·1 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그해 3월 21일 동네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가를 배포하며 1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붙잡힌 김승옥 선생은 감옥에 갇혀 갖은 고초를 겪게 된다.

김씨는 “할아버지는 일경한테 손·발톱이 다 뽑히는 고문을 당해 이후에는 글씨도 잘 쓰지 못하셨다”며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재판정에서 탁자를 뒤엎으며 자기 나라의 독립을 말한 게 무슨 죄냐고 오히려 일본 판사를 나무랐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렇게 힘든 일을 겪으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못 할 일이 없었다”며 “30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힘든 일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할아버지, 손·발톱 뽑히는 고문에 글씨도 잘 못쓰게 돼”


1년 6개월 동안의 감옥 생활 후 풀려난 김승옥 선생은 고향에 돌아가 다시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배움이 중요하다며 교육 운동을 하게 된다. 마음이 맞는 동지들과 고창청년회를 만든 김승옥 선생은 문맹 퇴치에 앞장서는 역할을 맡는다. 특히 “여성이 깨우쳐야 한다”며 여성 교육을 위해 1945년 고창고등여학교(현 고창 자유고)를 설립한다. 이렇게 나라의 독립과 국민의 문맹률을 깨우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김승옥 선생은 어떤 자리나 권력도 탐내지 않고 1962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청빈한 삶을 잊지 않으셨다고 한다.

2019년 전북 고창에서 열렸던 3·1 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배너. ‘김승옥 선생’이 적혀있다. [김승옥 선생 아들 김녕만 씨 블로그]


“여성이 깨우쳐야 한다” 던 선생, 고창고등여학교 설립


김씨는 “그 시절 모두가 가난했고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며 “다만 평생 청렴하고 열심히 살아온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지금껏 부끄럽지 않게 살아올 수 있었다. 그게 최고의 유산이 아니었을까 한다”고 말했다.

실제 김씨는 시골인 고창에서 자랐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까지 나와 간호사까지 된 성공한 여성이었다. 1973년 서울시 공무원으로 합격한 김씨는 서울로 올라와 서울어린이병원, 결핵병원, 보건소 등에 근무하며 아픈 사람들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아왔다.

김승옥 선생은 살아 생전에는 “공을 내세우면 공이 아니다”며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이 독립유공자 신청을 진행해 1991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추대됐다.

특히 김승옥 선생이 1962년 타계했을 때 고창군은 업적을 기리며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으면서 김승옥 선생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1991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는 김승옥 선생 유해. [김승옥 선생 아들 김녕만 씨 블로그]


김씨는 “지금도 매년 광복절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면 가족들과 현충원에 다녀온다”며 “할아버지를 한 번도 잊지 않았고 잊지 않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 퇴직 후 대학 강단에 서고,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사무총장도 역임한 김씨는 내년에 대학생이 되기 위한 도전을 준비 중이다.

김씨는 “가르치던 입장에서 다시 배우는 학생이 돼보려고 한다”며 “역사를 배워보고 싶은데 역사를 배우면서 다시 한번 할아버지를 느끼고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