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 존재 내가 증명합니다” 故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있는 고백…오늘은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세상&]

14일, 제9회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35년 전 故김학순 할머니 최초 증언 기려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 곳곳서 기념행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14일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에 참석해 있다. 윤창빈 기자


[헤럴드경제=김도윤 기자] “정신대 존재 내가 증명합니다. 정신대 위안부로 고통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은 종군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고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고 하니 말이나 됩니까.”

1991년 8월 14일. 역사의 이름으로 증언하겠다며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기자회견에 나선 고(故) 김학순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이같이 말했다. 두려움에 침묵해야 했던 수십 년의 세월. 가슴에 묻어둬야 했던 응어리를 비로소 세상 밖으로 꺼내 놓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고 피해 사실을 증언한 첫 공개 기자회견이었다.

누가 나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은 꼭 하고야 말거요.

김 할머니는 참혹했던 16살의 봄을 증언했다. 느닷없이 위안부로 끌려가 중국 중부의 어느 일본군 주둔지에서 낮에는 중노동을 하고 밤에는 일본군을 상대했다. 전쟁이 터지자 중국인이 버리고 간 집을 위안소로 꾸민 곳에서 감금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지내며 군이 지급하는 쌀과 부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김 할머니의 증언은 계기로 이후 다른 피해자들의 증언이 잇따랐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는 운동도 본격화됐다. 공개 증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책임 인정과 사죄를 요구해 온 김 할머니는 1997년 12월 16일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노원구 월계동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지냈던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2000만원을 교회에 기탁했다.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써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14일 기자회견을 열고 위안부 피해 생존자 중 처음으로 피해를 공개 증언했다. [연합]


김 할머니가 세상 앞에 나선 지 꼭 25년이 지난 14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기려 제정된 국가기념일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행사가 열렸다. 김 할머니의 최초 증언 이듬해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린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해 국회, 정부, 시민단체 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했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이재명 대통령을 대신해 기념사를 대독했다. 이용수(98) 할머니를 바라보며 “대통령을 뵙고 싶다고 말씀 주셨다. 머지않은 시간에 자리를 준비하겠다. 건강해 주시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진실을 기억하고 피해자들의 존엄을 지키며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존경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며 “여성인권평화재단을 설립해 아시아 지역의 연대와 협력을 이끄는 중심 역할을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언급한 여성인권평화재단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연구를 체계적으로 축적하고 교육·전시·기념사업과 국내외 연대·협력 사업을 지속해서 추진하기 위한 독립 법인이다.

국회에서는 지난 6월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성평등부 여당 간사로 내정된 이수진 의원 등 10인이 재단 설립 근거를 담은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13일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에 고인이 된 피해 할머니들 흉상이 세워져 있다. [연합]


원민경 성평등부 장관은 “피해자분들의 삶과 용기를 기억하고 그 뜻을 미래 세대에 이어가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했다”며 “할머님들의 용기에서 시작된 발걸음을 이제 우리가 이어가겠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하겠다”고 강조했다.

성평등부는 평화의 소녀상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해 설치된 상징물과 조형물에 대한 실태조사도 실시해 추모 공간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계획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이 14일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윤창빈 기자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전국 곳곳에선 위안부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한 행사가 열린다.

정의기억연대는 오후 7시부터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나비문화제’를 열고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행사를 진행한다. 인근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었지만 지난 5월 6년 만에 철거된 상태다.

전북문화관광재단은 전북여성단체연합과 함께 오는 23일까지 전주 복합문화공간 ‘하얀양옥집’에서 ‘전쟁과 여성, 반전,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기념 전시를 연다.

부산시는 14일 부산시민회관 소극장에서 시민 200여명과 함께 기념행사를 열고 창작 퍼포먼스와 LED 촛불 점등식 등을 진행한다. 오는 21일과 28일에는 부산영화체험박물관 다목적영상홀에서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눈길’을 상영한다.

대구에서는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주관으로 이날 오후 7시30분부터 대구 범어대성당 드망즈홀에서 추모와 위로의 음악회가 열린다.

국내에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이용수, 박필근(98), 김경애(96) 할머니 등 5명뿐이다. 모두 90세 이상의 고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