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방어 효과 잠시뿐 “근본 해결책 아냐”
“미국 도움 없인 엔화도 못 지켰다” 日 내부서 ‘통화 패전’ 비판
1998년 금융위기 데자뷔…美 “시간 벌어줬으니 정책 바꿔라”
![]() |
| 지난 3일 일본 도쿄에서 행인들이 환율을 표시한 전광판을 지나가고 있다. 지난달 31일 미국과 일본 정부가 개입한 이후 엔화 가치는 달러당 155엔까지 올라갔으나, 12일 159엔까지 떨어지면서 개입 효과가 무색해졌다. [EPA] |
[헤럴드경제=서지연 기자] “일미 통화동맹의 완성”이라는 평가가 나온 28년만의 미·일 협조 외환시장 개입을 두고 일본 내부에서는 오히려 “통화 패전”이라는 자조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도움 없이는 엔화 가치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현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일본 경제가 직면한 문제는 환율이 아니라 금리와 재정정책 등 거시경제 운용 실패에 있다는 뼈아픈 자기반성이 담겼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12일 ‘미·일 협조 개입은 통화 패전이다’라는 제목의 해설 기사에서 이번 협조 개입을 단순한 외환시장 안정 조치가 아니라 일본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난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번 협조 개입은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 당시 일본은 금융기관 부실채권 문제와 금융 불안으로 엔화 가치가 급락하자 미국과 함께 엔화를 사들이는 공동 개입에 나섰다. 이번에도 엔화가 달러당 160엔 안팎까지 밀리면서 일본 정부는 단독 개입을 반복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미국과 공동 대응에 나섰다.
닛케이가 주목한 것은 ‘협조 개입’ 자체가 아니라 그 배경이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시장 개입으로 엔화 약세를 막으려 했지만, 시장은 일본은행(BOJ)의 더딘 금리 정상화와 느슨한 재정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엔화 약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시장이 정책 변화를 요구하며 엔화를 팔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국의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이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일본이 엔화 하락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협조 개입을 아르헨티나 통화 지원이나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 지원과 같은 ‘거래(deal)’의 하나로 설명했다. 일본이 도움을 요청했고 미국이 응한 것이라는 의미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 역시 일본이 거시경제 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엔화는 다시 약세로 돌아갈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베선트 장관은 닛케이 인터뷰와 CNBC 인터뷰에서 “일본이 적절한 정책을 실시하면 엔화는 보다 정상적인 균형 가격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아시아 국가들의 통화가 엔화 움직임과 밀접하게 연동돼 있다는 점을 들어 미국이 협조 개입에 나선 배경을 설명했다. 미국 입장에서도 엔화 급락이 아시아 금융시장 불안과 미국 국채 시장 변동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의미다.
![]() |
| 지난달 31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내각 회의에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 자리에 ‘할 일 : 일본 엔화 50억~100억 달러 매입’이라고 써진 종이가 놓여있다. 미국과 일본 정부가 이례적으로 엔화 가치 부양을 위해 공조한 것은 미국이 장기 국채 금리 급등을 막으려는 조치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로이터] |
닛케이는 이번 상황이 1998년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고 지적했다.
당시에도 일본은 금융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정치적 부담 때문에 부실채권 처리를 미뤘다. 결국 미국의 협조 개입으로 가까스로 시간을 벌었지만, 개혁은 지연됐고 일본은 이후 장기 디플레이션과 금융위기를 겪었다.
당시 일본을 찾은 로런스 서머스 미국 재무부 부장관(후일 재무장관)은 일본 정부를 향해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이 열려 있는 동안 반드시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압박했다. 미국이 시장 개입으로 시간을 벌어준 만큼 일본이 구조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28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이 일본에 보내는 메시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베선트 장관 역시 협조 개입으로 확보한 시간을 활용해 일본이 금리 정상화와 재정 규율 회복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시장 개입은 시간을 벌어줄 뿐 엔저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 협조 개입 직후 반등했던 엔화는 다시 달러당 159엔대로 밀리며 개입 효과가 약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장은 여전히 일본의 통화정책 변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엔화 약세가 재개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닛케이는 이번 협조 개입을 ‘통화동맹’으로 해석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과 대등한 협력이 아니라 일본이 자국 통화를 방어하지 못해 미국의 도움을 요청한 결과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