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모르는 자기를 끄집어내는 것”
제주의 풍경 담은 신작 회화 28점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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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요배 ‘창파’. [학고재 제공] |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그림은 자기가 모르는 자기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낚시하는 것처럼 뭔가를 하다 보면 의도치 않은 것이 따라 올라와요.”
50년간 붓을 잡아 온 강요배(74) 작가는 그림을 ‘낚시질’에 비유했다. 작업으로 낚는 대상은 외부의 타인이나 풍경이 아니라 내부의 ‘마음’이다.
강요배 작가의 개인전 ‘소소, 반색’이 12일부터 9월 12일까지 학고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소소한 존재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민중미술 1세대’로 잘 알려진 작가지만 이번 전시에선 자연에 주목한 신작 회화 28점을 선보인다. 그의 고향이자 작업의 기반인 제주의 풍경을 깊이 관찰하며 떠오르는 심상을 화폭에 옮겼다.
작가는 개인전을 하루 앞둔 11일 학고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작품들은 앞선 민중미술과 구별된다고 선을 그으면서 “제주의 풍경과 우리 집 마당을 관찰하고 그린 그림들”이라고 밝혔다.
강요배의 회화는 자연에서 출발하지만,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거나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자연은 그려야 할 소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자, 삶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온 터전이다. 계절의 순환을 직접 겪은 작가에게 풍경은 내면의 인식과 외부의 대상이 만나 형성된, 살아 숨 쉬는 ‘의경’이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대서’와 ‘소서’ 속에 담긴 폭포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절벽을 타고 수직으로 쏟아지는 물줄기는 이어지는 500호 크기의 대작 ‘창파’에 이르러 거대한 파도의 운동으로 폭발한다. 화면에 가득 찬 물결과 거친 붓질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바다와 작가의 호흡이 맞닿은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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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요배 ‘영등바람’. [학고재 제공] |
‘영등바람’은 파도를 그린 작품이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바람이다. 영등바람은 음력 2월에 제주의 바다와 땅을 휩쓰는 북서풍이다. 제주에서는 바람의 신인 영등할망이 찾아와 땅과 바다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간다고 여기면서 해신제를 지낸다. 바람은 제주의 역사와 삶, 오랜 세월을 품은 기억을 의미한다.
작가는 “있는 것을 그대로 따라 그리면 내가 대상의 종이 되는 것 같아 답답하고 싫다”면서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한 뒤 상상을 더 해 마음대로 그린다”고 설명했다.
‘나무’ 연작에선 거칠게 갈라지고 패인 표면을 통해 계절의 순환과 풍화의 흔적을 드러낸다. 나무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견뎌온 하나의 생명으로 떠오른다.
전시장 벽을 가득 채운 대작이지만 작가는 “20분 만에 완성한 그림”이라며 “머릿속으로 많이 시뮬레이션을 한 뒤 그리는 것은 빠르게 그렸다. 생생한 맛을 살린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를 보고 작업한 ‘해바라기-쿠르스크’는 격전지인 ‘쿠르스크’를 작품 제목으로 삼았지만, 참상을 직접 표현하는 대신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해바라기로 은유한다. 해바라기는 꽃을 넘어 비극을 견뎌낸 존재, 회복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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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요배 ‘해바라기-쿠르스크’. [학고재 제공] |
수심 수백~수천m 심해에 서식하는 ‘혹등아귀’는 커다란 입과 날카로운 이빨, 검은 몸체로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가는 인간 중심의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를 환기하며, 심연에서 스스로 빛을 발해 생존하는 혹등아귀의 모습을 통해 강인함을 일깨운다.
작가는 “그림을 보고 처음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음식을 한 입만 먹어도 맛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한눈에 봐도 느낄 수 있는 그림,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그림들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관람객들이 제목을 알고 그림을 보면서 즐기고 상상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요배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0년대 민중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고, 1988년부터 ‘제주민중항쟁사’ 연작을 통해 제주 4·3 사건의 현실을 국제 사회에 알렸다. 옥관문화훈장, 제주4·3평화 특별상, 이인성미술상, 이중섭미술상, 민족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