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티즈 산·‘북부대공’ 판타지 트렌드
숏폼·웹툰 서사가 결합한 요즘 짐승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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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티즈의 ‘BAD’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요즘 가요계에 농익은 농담 하나가 유행이다. “가슴 한 번 튕겼을 뿐인데 ‘입덕문’이 열렸다”는 말이다. 그룹 에이티즈(ATEEZ)가 올여름 들고나온 ‘배드(BAD)’에 등장하는 5초 남짓한 안무 때문이다.
가요계 관계자들은 “이번 여름 대중음악계와 글로벌 숏폼 플랫폼을 가장 뜨겁게 달군 명장면 중 하나”라고 입을 모은다.
이 곡은 방탄소년단, 스트레이 키즈와 함께 글로벌 무대를 장악해 온 그룹 에이티즈의 미니 14집 ‘골든 아워 : 파트5(GOLDEN HOUR : Part.5)’의 타이틀곡이다. 곡의 노래가 절정까지 달한 이후에 등장하는 안무지만, 글로벌 팬심은 이 부분을 ‘진짜’ 클라이맥스로 본다.
금빛의 반짝이는 셔츠를 입은 산이 비트에 맞춰 가슴을 튕기는 절제된 안무는 공개 직후 틱톡과 인스타그램 릴스를 완전히 점령했다. 이 뮤직비디오는 8월 들어 5000만 조회수를 달성했다. 팬들은 산의 이 춤을 ‘다 죽자’ 파트로 부른다. 멤버 산이 전담 안무팀 BBTRIPPIN, 안무가 리정과 함께 직접 창작에 참여했다.
흥미로운 현상은 최산의 퍼포먼스 영상이 아이돌 팬덤 내부 소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3040세대와 대중으로 확산되며 파괴적인 바이럴이 일고 있다. 사실 국내보다 해외 팬덤 중심이던 에이티즈는 이 영상으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국내 대표 음원 플랫폼 멜론의 ‘톱 100’ 일간 차트 상위권에 진입했다.
한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대세로 주목받지 않았던 짐승돌이 에이티즈와 더불어 다시 소환됐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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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티즈 [KQ엔터테인먼트 제공] |
2026년의 ‘뉴 짐승돌’은 과거 2PM으로 상징됐던 ‘짐승돌’과는 또 다르다. 에이티즈 산이 불러온 ‘새로운 짐승돌’은 그룹의 세계관과 웹소설·웹툰의 로맨스 판타지 장르가 결합한 복합적인 이미지를 가진다. 기획사의 의도적인 마케팅 전략이 아닌, 팬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얻어진 인기다.
열풍의 중심엔 ‘북부대공’이라는 독특한 수식어가 자리한다. 산이 ‘아이스 온 마이 티스(Ice On My Teeth)’로 활동하던 지난 2024년, 딱 떨어지는 수트핏과 그에 걸맞은 차가운 카리스마로 ‘북부대공’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다. “스타일리스트가 뭘 좀 안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당시의 북부대공은 에이티즈와 산의 팬덤 사이에서만 내밀하게 공유되던 그들만의 서사였다.
여기에다 이번 ‘배드’ 활동에선 남미풍 브라질리언 펑크 리듬에 맞춰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업그레이드된 피지컬을 선보이며 ‘남부대공’으로 또 하나의 수사를 안게 됐다. 2년 전 별칭이 하나의 서사를 갖고, 현재에 또 다른 화력을 지핀 것이다.
북부대공은 로맨스 판타지(일명 ‘로판’) 서브컬처에서 척박하고 추운 영지를 지키는 냉철한 군주를 지칭한다. 넓은 어깨와 단단한 턱선, 흑발의 차가운 외형을 가졌으나 ‘오직 내 사람에게만 다정한 순정남’이라는 반전 서사를 지닌 캐릭터다. 반면 ‘남부대공’은 따사로운 햇살과 화려한 사교계를 배경으로 능글맞은 태도와 화사한 미소, 치명적인 정열을 품은 입체적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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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룹 에이티즈 산 [연합] |
산은 K-팝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양극단을 오가는 실사판 ‘남주’(남주인공)다. 무대 위에선 뿜어내는 날카롭고 압도적인 눈빛, 쩍 벌어진 어깨와 근육질 체격으로 웹툰 속 ‘북부대공’의 실루엣을 완벽히 실사화한다. 무대 위 강렬한 카리스마와 무대 밖 해맑은 다정함의 간극은 팬덤이 확산된 주요 이유다.
업계에선 “아이돌 그룹의 성공 요인은 ‘반전 매력’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무대 위와 무대 아래에서 양극단을 오가는 ‘갭 차이’는 고전적인 ‘멤버 띄우기’ 수법이다. 산이 알고리즘을 장악한 것도 K-팝 팬덤이 요구하는 이 지점을 정확히 겨냥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20~30대 중심으로 많이 소비되는 웹툰, 웹소설의 ‘로판’ 서사의 핵심인 ‘내 사람에게만 다정한 순정남’이 K-팝 보이그룹에도 씌워졌다. 압도적인 ‘신체적 매력’은 기본, 2D 콘텐츠 소비층이 품고 있던 ‘강인하고 든든한 존재에게 보호받고 싶다’는 환상과 동경 심리가 현실 무대에서 충족됐다. 이같은 ‘서사적 융합’의 시너지는 강력했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서브컬처의 판타지 서사가 K-팝 아티스트의 실물 피지컬, 퍼포먼스와 만나며 기존 팬덤을 넘어 웹툰, 웹소설 소비층까지 K-팝으로 유입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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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티즈 산의 ‘다 죽자’ 파트 [SBS 제공] |
지난 몇 년 사이 K-팝 업계에서 보이그룹은 ‘청량돌’의 이지 리스닝, 세계관을 걷어낸 무해한 남사친, 슬림하고 선이 고운 미소년이 대세였다. 3세대 K-팝 그룹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한 대형기획사 관계자는 “팬덤 내에서 마초적이고 위압적인 남성성에 대한 거부감이 커진 데다 글로벌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 트렌드와 하이패션 착장이 맞아떨어지며 10여년간 보이그룹은 마르고 예뻐야 한다는 법칙이 생겼다”고 말했다.
청량 콘셉트가 수년간 지속되자 대중과 팬덤 사이에도 시각적·음악적 피로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수면 아래 잠들어 있던, 강력한 직관적 자극과 본능적인 에너지를 갈망하는 시장의 수요가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가 된 것이다. 특히 에이티즈 산이 보여준 폭발적인 피지컬 퍼포먼스는 ‘도파민 결핍’에 직격탄을 날렸다.
다만 2000년대 중후반 2세대 짐승돌의 시대와 지금의 짐승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2세대 짐승돌은 건장한 몸이나 과격한 춤 등 보다 원초적인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줬다면, 지금의 짐승돌은 과도한 노출을 지양하고 머슬핏 민소매나 절제된 핏을 통해 신체 라인을 강조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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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티즈 ‘배드’의 ‘다 죽자’ 파트를 보여주고 있는 배우 마동석 [마동석 SNS] |
즉 거친 남성적 매력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하이엔드 브랜드 스타일링에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결합해 자기들만의 서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서사의 미학’이 대중까지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숏폼의 영향이 크다.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 총 세 장의 앨범을 1위 자리에 올려놓을 만큼 해외 팬덤이 강력한 에이티즈의 무대 영상이 숏폼으로 만들어지며 대중들에게 확산됐다. 앞서 넷플릭스 인기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사자보이즈 멤버 중 한 명이 산을 모델로 했다는 점이 알려지며 해외팬 사이에서 에이티즈의 인지도가 급상승한 바 있다.
미국 대중음악평론가 테사 스미스는 포브스에 “원래 K-팝 팬이 아니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 이후 알고리즘을 통해 산의 영상이 추천됐고, 산의 강렬한 피지컬과 자기 몸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모습에 먼저 끌렸다”며 “이후 음악과 목소리까지 관심이 확장됐고, 결국 에이티즈 콘서트를 직접 찾아가 팬이 됐다”고 말했다. 심지어 해외에선 에이티즈 산을 두고 ‘게이 어웨이크닝’(Gay Awakening, ‘내 안의 동성애적 끌림을 처음 자각했다’는 뉘앙스의 가벼운 인터넷 밈)이라는 바이럴 밈으로도 소비한다.
국내에선 아이돌의 손을 떠나 연예계를 넘어 재계까지 장악했다. 배우 이상이가 산과 함께 ‘배드’ 챌린지를 했고, 개그맨 이선민은 이 춤을 패러디했다. 배우 마동석은 산의 킬링 파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현하며 ‘마산’이라는 별칭까지 붙였다. KBO 퓨처스리그에서는 키움 히어로즈 손힘찬이 이 동작을 세리머니로 가져갔다.
심지어 삼성전자 노태문 사장이 ‘배드’ 안무를 직접 따라 하며 “갤럭시 안 쓰면 배드”라는 멘트를 남긴 영상까지 화제를 모았다. 당시 해당 영상은 공개 10여 시간 만에 3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산의 안무가 누구나 알아보는 하나의 캐릭터와 밈이 된 사건이다.
산과 에이티즈가 쏘아 올린 ‘뉴 짐승돌’의 신드롬을 이어갈 넥스트 주자는 누구일까.
우선 피지컬과 거친 몬스터 에너지를 팀의 정체성으로 유지해 온 몬스타엑스(MONSTA X)가 후보군 중 하나다. 몬스타엑스는 멤버들의 군백기 종료와 함께 재조명되고 있다.
몬스타엑스는 3~4세대의 ‘청량’ 트렌드 속에서도 압도적인 근육질 피지컬로 ‘짐승돌’ 계보를 이어온 만큼 ‘뉴 짐승돌’ 트렌드의 가장 강력한 수혜를 입을 선구자로 꼽힌다.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이번 컴백에선 데뷔 11년 차 몬스타엑스의 기존 아이덴티티를 바탕으로 보다 정제되고 세련된 음악과 비주얼에 과감한 위트를 더해 돌아올 것”이라고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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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하이픈 [빌리프랩 제공] |
4~5세대를 대표하는 엔하이픈(ENHYPEN) 역시 다크 판타지와 뱀파이어 서사를 바탕으로 한 세련되면서도 치명적인 피지컬 퍼포먼스를 강화한다. 오는 21일 미니 8집 ‘더 신 : 블리스(THE SIN : BLISS)’를 통해 돌아올 엔하이픈은 소년미에 머물지 않고 절제된 피지컬과 날카로운 아우라를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소속사 빌리프랩 관계자는 “극도로 날을 세우고 경계심을 내비치는 맹수와 같은 날것의 매력, 강렬한 색채와 과감한 문양의 의상을 통해 거칠고 섹시한 분위기를 극대화했다”며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미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