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오디션, 세포 마을을 뒤흔든 공동 창작
‘나만의 세포’ 만들기…바지 찢어져도 ‘시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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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응큼 세포 이경욱, 감성 세포 한준용, 촉 세포 김영웅, 작가 세포 연지현(중앙부터 시계방향)은 1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이 무대에 입성했다. 윤창빈 기자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내내 꺼져있던 ‘작은 전구’가 번쩍. ‘좋은 예감’이 찾아올 때마다 촉 세포의 머리 위 전구가 반짝인다. 손등을 허리에 얹은 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감성 세포, 게슴츠레한 눈빛과 농염한 자태로 존재를 과시하는 응큼 세포, 그런 ‘응큼이’ 곁에서 혀를 끌끌 차며 ‘유교걸’의 품위를 잃지 않는 예의 세포, 줄줄이 훌라후프를 돌리는 분주한 다이어트 세포에 ‘제발 좀 씻으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세수 세포….
손바닥만 한 세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아기자기한 마을. 30억 개의 세포가 거대한 비주얼로 눈앞에 펼쳐지면 이내 공연장은 현실과 차단된 ‘가상의 공간’이 된다. 오직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판타지. 34억뷰를 기록한 웹툰이 무대에서 되살아났다. 이곳의 주인공은 유미도, 구웅(유미 남자친구)도 아닌 그야말로 ‘유미의 세포들’(8월 23일까지, 예술의전당)이다.
유쾌한 세포마을을 만들고 있는 일등 공신들을 만났다. ‘킹키부츠’의 엔젤에서 유미의 ‘감성 세포’가 된 한준용(37), 작가 세포와 자린고비 세포를 연기 중인 연지현(27), 무대 위 ‘신 스틸러’ 응큼 세포 이경욱(41), 무시무시한 경쟁률을 뚫은 ‘촉 세포’ 김영웅(25) 등이다.
원캐스트로 매일 무대에 서고 있는 네 사람은 “이 작품은 모든 배우가 함께 만드는 공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배우는 하루아침에 태어나지 않는다. 무대에 오르기까지 뜨거운 물밑 작업이 이어진다. 오디션을 준비하는 과정이 그 시작이다.
“앙상블 배우는 다 그럴 거예요.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뒤져 오디션 정보가 뜨는지 보고, 오디션이 있으면 다 지원하죠.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이니까요.” (이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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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연지현, 김영웅, 한준용, 이경욱(왼쪽부터). 윤창빈 기자 |
이미 5년 전부터 기획, 대본 작업에 돌입한 이 작품은 제작 전부터 배우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했다. 지난해 11월, 무대의 숨은 주인공들을 발굴한 오디션 역시 대한민국 뮤지컬 배우들이 모두 몰렸다.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치열한 경쟁이었다. 김영웅은 “촉 세포만 해도 1200대 1의 경쟁률이었다”고 돌아봤다.
경쟁률 못지않게 뜨거웠던 것은 오디션 준비 과정이었다. 지정곡과 지정 안무가 주어지는 기존 오디션과 달리 이 작품에선 저마다의 장기를 보여주는 ‘자유곡’ 미션이 등장해 참가자들 모두 고심을 거듭했다. 연지현의 끼는 오디션장에서부터 폭발했다. 그는 다비치의 ‘8282’를 선곡했다. “‘지금 바로 전화해 줘, 합격 전화 달라’는 느낌을 살렸다”고 한다. 연지현의 이야기에 감성 세포 한준용은 “그래서 빨리 전화줬구나”라며 웃었다.
배역이 정해지지 않은 오디션이었기에, 배우들은 자신이 ‘어떤 세포’를 맡게 될지 알지 못했다. 이경욱은 “합격 연락을 받은 후 스케줄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다 아차 싶어 ‘저 근데 무슨 역할이에요?’라고 물어본 뒤에야 응큼 세포라는 걸 알았다”며 웃었다. 그의 이야기에 ‘세포즈’의 증언이 쏟아졌다. 연지현은 “캐스팅 발표가 뜨고 (이)경욱 오빠를 처음 봤는데, ‘와 정말 찰떡이다’ 생각했다”며 놀라워했다. 그의 말에 “사실 제가 응큼한 걸 즐기는 성격”이라며 “신동엽 선배님처럼 불쾌하지 않은 19금 연기를 하는 것이 지향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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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감성 세포 한준용(오른쪽)과 티파니 영 [샘컴퍼니 제공] |
애초 ‘불안 세포’로 합격했던 연지현은 ‘브로드웨이 42번가’ 출신의 탭댄스 장기를 지닌 덕에 유미의 자아 격인 ‘작가 세포’에 자린고비 세포까지 1인 2역을 맡게 됐다. 6년 만에 탭 슈즈를 다시 신은 그는 연습 한 달 전부터 탭 레슨까지 따로 받았다. 연지현은 “처음엔 박자 맞추기에 급급했는데 이젠 유미가 글을 쓰는 느낌의 타자 소리를 내며 탭을 밟고 있다”고 했다.
뮤지컬 ‘킹키부츠’의 엔젤 출신인 막내 김영웅은 “지방 공연 개막 30분 전 촉 세포 합격 전화를 받고 통곡에 가까운 눈물을 흘렸고”, 한준용은 2차 오디션에서 “이성 세포 대사를 읽다가 분노를 폭발시키는 바람에” 오히려 ‘슈퍼 감성’으로 낙점됐다. 이미 ‘킹키부츠’에서 주체할 수 없는 끼를 선보여왔던 한준용은 이번에도 감성 세포에 체화된 상태. 그럼에도 재연하게 된다면 “단연 응큼세포를 하고 싶다”며 야망을 드러냈다.
“내가 널 백구라고 불러도 될까?” (‘유미의 세포들’ 응큼 세포 대사 중)
‘유미의 세포들’은 시작부터 달랐다. 주어진 대본을 있는 그대로 연기해야 하는 라이선스 공연과 달리 ‘창작 초연’은 배우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고통을 줬다. 무대에 오르기까지 배우들은 모두가 작가이자 연출가였고, 연습실은 쉴 새 없이 아이디어가 터져 나오는 ‘공동 창작’의 장이었다.
기존 웹툰, 드라마가 ‘유미의 시점’으로 작품이 전개되나, ‘세포의 시점’으로 다시 쓴 뮤지컬에선 유미(티파니 영·김예원 분)와 사랑 세포(김소향·유리아 분), 원작엔 없던 견습 세포 109(최재림·정택운 분)를 제외하곤 각각의 세포는 캐릭터 구축이 선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배우들이 세포마을에서 “각자의 캐릭터로 존재하며 관객들이 몰입하게 할 수 있도록”(이경욱) 머리를 싸맨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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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에서 각자의 시그니처 포즈를 취한 작가+자린고비 세포 연지현, 촉 세포 김영웅, 감성 세포 한준용, 응큼 세포 이경욱. 윤창빈 기자 |
‘응큼 세포’는 아이디어의 보고다. 이경욱은 관객을 휘어잡는 ‘응큼 파티’ 신에서 굵고 짧게 무대를 뒤집어놓는다. 애초 유미의 생일을 따 109(1월 9일)로 설정됐지만, 응큼 세포는 그를 ‘백구’로 명명한다. 강아지 짖는 소리에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대사까지 등장하니 견습 세포의 ‘견’은 개 견(犬)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이 모든 게 무대 위 이경욱의 아이디어다.
그는 “‘이게 가능할까’ 싶은 것까지 ‘뭐든 막 내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며 “그 조각들이 하나하나 모이면 어마어마한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서로의 아이디어를 봐주고 다듬는 과정이 유독 많은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실수가 애드리브로 승화된 장면도 있다. ‘응큼 파티’ 등장신. “긴 바지를 뜯어내는 퍼포먼스 아이디어”는 아기자기한 세포 마을을 15금으로 물들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희대의 명장면이 태어났다. 바지를 뜯으면 “입었어, 입었어”라는 대사와 함께 아찔한 반바지 차림으로 변신하나, 최근엔 반바지를 깜빡하고 ‘속옷 차림’의 노출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입었어, 입었어, 어? 안 입었어!”라고 대사를 던지자 객석은 이내 자지러졌다. 티파니 영은 이 순간을 “엄청난 애드리브로 태어난 ‘명장면’”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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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109 세포 최재림과 작가 세포 연지현(오른쪽 앞줄) [샘컴퍼니 제공] |
‘세포즈’의 디테일은 지독할 정도로 섬세했다. 연지현은 작가 세포로 후반부 큰 축을 이루나, 자린고비 세포의 해석에도 공을 들였다. 1997년생,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생)의 감성과 사고가 투영된 자린고비는 오로지 연지현의 머릿속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해서 늘 위축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상황에 화가 나 있는 세포로 설정했다”며 “돈 많이 쓰는 세포들에게 시종 화를 내고, 옷을 덧댄 천 조각은 돈 쓰는 패션, 출출 세포와 싸우다 생긴 ‘칼빵’의 흔적으로 해석했다”며 웃었다.
김영웅은 전구를 켜고 끄는 타임과 동선을 홀로 연습했고, 109 세포에게 날아와 안기는 일명 ‘날다람쥐 신’을 탄생시켰다. 촉 세포 특유의 무해하고 귀여운 매력을 극대화한 장면이다. 한준용은 “이성 세포와 쌍둥이 커플 콘셉트를 살리기 위해 스텝과 손동작을 만들었다”고 귀띔했다.
사랑 세포의 ‘좌청룡 우백호’ 격인 두 세포는 옷차림뿐 아니라 자세로도 구분된다. 이성은 ‘손바닥’을 허리에, 감성은 ‘손등’을 허리에 대는 섬세한 차이다. 한준용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장면도 있다. 유미를 연기하는 티파니 영의 본캐를 살린 애드리브도 나온다. 소녀시대 ‘소원을 말해봐’에서 티파니 파트인 ‘디제이, 풋 잇 백 온(DJ Put It Back On)’을 유미의 우선순위 쇼 장면에서 애드리브로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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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의 한준용, 김영웅, 연지현, 이경욱. (왼쪽부터) 윤창빈 기자 |
이경욱은 “지금 생각하면 추억이지만 그 당시엔 매 순간이 창작의 고통이었다”며 “그래도 ‘해보자’고 할 때 누가 하나 찌푸리는 사람 없이 ‘고통의 파도’를 헤엄쳐 건넜다”고 돌아봤다.
그 많은 고민과 애드리브가 빛을 발하는 장면은 단연 오프닝에서 모든 세포가 등장할 때다. 웹툰에서 튀어나온 세포들의 공격이 유치한 애니메이션 같다고 느끼려는 순간, 세포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연기를 하는 장인정신을 목도하게 된다. 세포들이 꼽는 가장 사랑하는 장면 역시 일명 ‘오프닝 떼신’이다.
연지현은 “모든 세포가 정말로 1.5 인분씩 하고 있다”며 “무대에서 보이지 않을 때조차 0.1초도 캐릭터에 빠지는 순간 없이 반응하며 존재한다. 배우들의 ‘피, 땀, 눈물’이 응축돼 있다고 말했다.
‘나만의 세포’를 만들어가며 네 배우는 어느덧 ‘자기 세포’를 닮아간다. 누구보다 혹은 누구 못잖게 ‘유미의 세포들’을 해부하고 분석한 시간이 길어 무대는 내내 애틋하다. 네 사람은 “‘유미의 세포들’은 ‘너 자신의 이야기’이자 ‘거대한 반전’”이라고 말한다.
“세포 마을엔 메이저도, 마이너도 없어요. 모두 유미라는 우주를 지키고, 유미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각자의 사명감을 갖고 존재하는 소중한 아이들이에요. 처음 오프닝을 볼 때 웹툰과 무대의 괴리로 ‘저게 뭐야?’ 싶을 수도 있지만, 극이 끝날 때쯤엔 이 수많은 세포가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울고 웃고 싸워주고 존재한다는 사실에 깊은 위로를 받게 돼요.” (세포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