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혜택 줄일 테니 갈아타세요”…믿었던 ISA의 배신


3년 약정을 맺고 휴대전화를 샀다. 통신사가 계약 기간 중 “기존 요금제 혜택은 줄이겠다. 혜택을 원하면 새 요금제로 갈아타라”고 통보했다고 치자. 소비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새 요금제 득실을 따져봐야겠지만, 일단 약속을 바꾼 통신사부터 문제 삼을 것이다.

지금 정부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개편에서 유사한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물론, 민간 계약과 세제 개편은 법적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장기 계획을 세운 소비자가 느끼는 배신감, 신뢰 훼손이란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는 국내 상장주식과 국내 투자형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하는 ‘생산적금융 ISA’를 신설하면서, 이미 가입한 기존 ISA 가입자에도 계약기간 단축과 납부 한도 이월 제도 폐지 등 불리한 변경을 적용하기로 했다. 민간 기업이었다면 약관 변경 논란으로 크게 시끄러웠겠지만, 정부는 ‘세제 개편’이란 이름 하에 조용히 넘어가려 한다.

정부는 해외로 빠져나가는 투자금을 국내 증시로 되돌리겠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타당한 주장 같지만 방법이 문제다. 국내 증시로 돈이 몰리게 하는 정공법은 원래 하나뿐이다. 국내 시장의 수익성과 매력을 높여 투자자들이 굳이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부는 그 대신, 기존 제도의 혜택을 깎아 국내 투자를 사실상 세금으로 강제하는 길을 택했다. 시장의 매력을 키우는 대신 다른 선택지에 불이익을 주는 방식이다. 이는 세제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 나아가 개인 투자자의 선택권까지 훼손하는 결정이다.

ISA는 가입자와 정부 사이에 성립한 일종의 약속이다. 가입자는 의무가입기간(3년)을 채우면 사실상 기한 없이 계좌를 연장하고, 그사이 발생한 수익에 대한 과세를 만기까지 미룰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자금을 넣어왔다.

매년 채우지 못한 납입 한도는 다음 해로 이월된다는 조건도 마찬가지다. 사회초년생이나 소득이 불규칙한 프리랜서들이 ‘당장 여유가 없어도 계좌부터 만들어두라’는 조언을 따른 것도 이 이월 조항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계약기간을 최장 5년으로 제한하면서, 이를 신규 가입자뿐 아니라 만기가 돌아오는 기존 가입자에게도 적용한다. 물론 올해 안에 만기 연장이 가능한 사람은 새 제도 시행 전에 서둘러 연장하면 기존 혜택을 유지할 수 있다는 유예 장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정부 자신도 이 개편이 기존 가입자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의무가입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아 올해 안에 연장 신청 자체가 불가능한 투자자들이 대다수이다. 이들은 아무런 협상 여지도 없이 자신이 가입할 땐 없었던 조건을 그대로 떠안게 된다. 상품 구매 때 전제 조건이 가입자 동의나 협상 없이 사후적으로 바뀐다면, 이를 계약이라 할 수 있을까.

정부는 ISA 혜택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비과세와 분리과세 혜택은 엄연히 조세지출이다. 즉 정부가 걷지 않기로 한 세금이자, 다른 국민이 부담하는 재정의 일부다. 조세지출은 그 성격상 함부로 늘리거나 줄여서는 안 되며, 특히 이미 형성된 국민의 기대와 계획을 뒤흔드는 방식의 축소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물론 이번 개편으로 비과세 한도(200만~400만원)나 분리과세 세율(9.9%) 같은 명목상의 혜택 자체가 줄어들진 않는다. 하지만 그 혜택을 실질적으로 키워주던 장치가 사라진다. 계약기간이 5년으로 묶이면 만기마다 세금을 정산해야 해 과세이연과 복리 효과가 끊긴다. 이월 제도가 없어지면 활용할 수 있는 납입 한도 자체도 줄어든다.

세율은 그대로 두고 세율이 실제로 적용되는 조건만 불리하게 바꾸는 셈이니, 정부 입장에서는 “혜택을 깎은 적 없다”고 항변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가입자가 체감하는 실질 혜택은 분명 줄어든다.

오히려 이런 방식이 더 문제다. 명목 세율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책 책임에서는 비껴가고, 실질적으로는 기존 가입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소급 적용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개편은 국내 증시로 자금을 유도한다는 이유로 이미 성립된 세제 혜택을 정부 편의대로 축소하는 선례가 될 우려도 있다. 오늘은 ISA가 대상이지만, 내일은 연금저축이나 퇴직연금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세제 혜택으로 특정 방향의 투자를 유도하는 것과, 이미 준 혜택의 실효성을 거둬들여 투자를 몰아가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후자는 정책이 아니라 강제에 가깝다.

새로 신설되는 생산적금융 ISA가 국내 상장주식과 국내 ETF로 투자 대상을 제한한다는 점도 논란이다. 해외 지수를 추종하는 국내 상장 ETF조차 투자할 수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ISA 계좌 안에서 해외 ETF 비중은 가파르게 늘어 올해 6월 말 기준 26.5%에 달했다. 국내 증시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개인 투자자들이 스스로 위험을 분산하려 택한 합리적 선택의 결과다. 정부는 이런 흐름을 되돌리고자 아예 선택지 자체를 없애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자산을 어디에 얼마나 배분할지는 투자자 개인이 자신의 위험 성향과 상황에 맞춰 판단할 문제다. 정부가 특정 자산군에 대한 투자를 유도하고 싶다면 그 자산군의 매력을 높이는 게 정공법이지, 다른 선택지를 막아버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투자자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앞서 비슷한 취지로 도입됐던 국내시장복귀계좌(RIA)도 시장의 외면을 받고 잔고가 줄어들었다. 이런 방식의 유도 정책이 얼마나 효과가 의심스러운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책 발표 후 증권사 ISA 담당 부서와 프라이빗뱅커(PB)들에도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만기를 수십 년 뒤로 미리 연장해 두려는 가입자, 신규 개편 전 서둘러 초장기로 가입하려는 투자자들 문의로 정신없다고 한다.

이는 투자자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해 행동한 결과라기보다는, 제도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만들어낸 ‘방어적 행동’에 가깝다. 정책이 신뢰를 잃으면 사람들은 정책의 의도가 아니라 빈틈을 찾아 움직이게 된다.

장기 투자 제도는 결국 신뢰를 먹고 자란다. 국민은 현재의 세제 혜택뿐 아니라 그 제도가 예측할 수 있게 운영될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수년, 수십 년의 자산 계획을 세운다.

정부와 국회는 이번 ISA 개편 과정에서 기존 가입자 보호를 위한 경과규정을 보다 폭넓게 검토하고, 국내 투자 대상 역시 시장 현실에 맞게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다. 국내 자본시장의 경쟁력은 다른 선택지를 불리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투자자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시장을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