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회생기업 10곳 중 4곳 ‘탈락’…재기 막는 ‘6.5%의 함정’ [회생의 조건 ①]

10년 간 회생절차 개시 후 무산 2890건
계속기업가치 산정 방식 획일적 잣대 적용 한계
할인율 최고치 적용 관행…‘무용론’도 고개


[AI를 활용해 제작]


[헤럴드경제=안효정·박지영 기자] 문을 닫고 자산을 정리할 것인가, 빚을 탕감받고 다시 일어설 것인가. 법원 회생절차의 문을 두드리는 기업들의 운명은 결국 이 갈림길에서 갈린다. 본업의 경쟁력은 남아있지만 일시적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업이 있는가 하면, 기초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수명 연장이 도리어 시장에 독이 되는 기업도 있다.

판단의 1차적 기준은 ‘숫자’다. 법원은 기업이 영업을 계속할 때의 가치와 청산할 때의 가치를 비교해 회생의 타당성을 검토한다. 재기 가능성이 있는 기업을 가려내고 채권자의 추가 손실을 막기 위한 장치지만 문제는 획일적인 산정 관행으로 재기 가능성이 있는 다수 기업들이 제도 적용을 받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 때문에 제도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회생계획안 ‘부결’ 10년간 3000건 육박


본지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단독 확보한 대법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6년부터 지난 6월까지 10년 동안 회생절차가 개시됐으나 회생계획안이 인가되지 않은 사례는 2890건에 이른 것으로 확인됐다. 같은 기간 법원이 회생 절차 개시를 허가한 기업이 7255건인 것을 감안하면 10곳 중 4곳이 회생계획안 인가 문턱을 넘지 못한 셈이다.

최근 10년간 법인회생 사건 단계별 현황 [AI를 활용해 제작]


회생개시 결정 자체가 기업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 가장 먼저 ‘조사보고서’ 작성부터 넘어서야 한다.

회생절차가 개시되면 법원은 회계법인을 조사위원으로 선임해 조사보고서 작성을 맡긴다. 조사위원은 기업의 재무 상태와 자산, 영업 현황을 검토한 뒤 기업의 ‘계속기업가치’와 ‘청산가치’를 산정·비교한다. 계속기업가치는 기업이 영업활동을 계속 이어나간다고 가정했을 때의 가치, 청산가치는 기업이 사업을 정지하고 자산을 즉시 처분·분배했을 때의 가치를 의미한다.


조사보고서에 담긴 기업가치는 회생절차의 진행 여부와 회생계획안 작성의 출발점이 된다. 구조조정 업계가 조사위원의 기업가치 산정을 ‘회생의 성패를 가르는 첫 단추’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사 결과에 따라 기업을 존속시킬지, 매각을 추진할지, 회생절차를 끝내고 청산으로 전환할지에 대한 기본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회계법인 관계자는 “(가치 산정은) 무분별한 회생 신청으로 인한 채권자의 피해를 막는 동시에 재기 가능성이 있는 기업을 가려내 회생 발판을 마련해 주는 절차적 안전장치”라고 말했다.

획일적 6.5%…보수적 관행 따른 가치 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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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에서는 현행 계속기업가치의 산정 방식이 획일적 잣대로 이뤄져 오히려 기업의 정상화를 막는 ‘함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비판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목은 계속기업가치 산정 시 주로 활용되는 현금흐름할인법(DCF)상의 할인율 산정 방식이다. DCF는 기업이 미래에 벌어들일 현금흐름을 현재 가치로 나눠 환산(할인)하는 기법으로, 이때 적용되는 할인율은 ‘미래의 돈을 현재 가치로 깎아내는 비율’을 뜻한다. 위험도가 높은 기업일수록 할인율이 크게 적용돼 현재 평가되는 기업가치는 낮아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위험 수준을 나타내는 ‘위험 프리미엄’이 할인율 결정의 핵심 변수가 된다.

현재 법원에선 조사위원의 위험 프리미엄 산정 범위를 2.5~6.5%로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개별 기업의 업종별 특성과 성장 잠재력이 정밀하게 검토되더라도 부실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보수적 평가 관행 탓에, 대다수 회생 신청 기업에 일률적으로 최고치인 6.5%가 적용되는 경향이 짙다는 점이다.

국내 법원에선 조사위원의 위험 프리미엄 산정 범위를 2.5~6.5%로 제시하고 있다. [AI를 활용해 제작]


구조조정 딜 경험이 풍부한 회계법인 관계자는 “이미 회생 절차에 들어온 기업인데 일반 기업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지 않느냐”라면서 “조사위원이 (위험 프리미엄을) 6.5%보다 낮게 잡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명확하고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증명하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까다롭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회계사는 “나중에 발생할 수 있는 책임이나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실무적으로는 안전하게 최고치를 적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전했다.

실제 리스크는 얼마?…동일 기준에 갇힌 모순


할인율이 높아지면 추정 미래 현금흐름의 현재 가치는 급격히 하락한다. 때문에 충분히 반등할 수 있는 기업조차 가치가 과도하게 저평가돼 청산 기로로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 지난 2021년 2차 회생절차를 밟던 쌍용자동차의 경우, 조사위원 평가에서 청산가치가 계속기업가치를 수천억원 상회한다는 결론이 나와 청산 위기에 내몰렸으나 법원의 인가 전 인수·합병(M&A) 추진으로 극적 생존한 바 있다.

쌍용자동차는 지난 2021년 또다시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됐다. 사진은 당시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정문 모습. [연합]


타격은 자금력이 없는 중소·중견기업일수록 더 크다. 이들에겐 보수적 평가로 인한 가치 저평가가 곧바로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회생법원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사회적 파장이나 관심도가 높은 대기업과 달리 중소·중견기업들은 사정이 다르다”면서 “청산가치가 더 높게 나오면 M&A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파산 수순을 밟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울러 일률적인 위험 프리미엄 최고치 적용 관행이 가치 산정의 변별력 자체를 무력화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당장 청산 절차를 밟아야 할 만큼 위험성이 큰 기업일지라도 상한선인 6.5%를 넘어서는 할인율을 적용받지 못하는 구조 때문이다. 결국 기업의 실제 위험 수준이 평가 수치에 반영되지 않은 채, 모든 회생 기업이 동일한 기준에 갇히는 모순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비용 부담도 문제다. 당장 한 푼의 자금이 아쉬운 기업으로서는 조사위원 수수료 등 가치 평가를 위해 지출해야 하는 비용마저 버거운 짐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도산 전문 변호사는 “현재는 직원 임금이나 운전자금마저 부족한 기업이 조사위원 회계법인에 수천만원, 대기업의 경우 억 단위에 달하는 조사 용역 수수료를 내야 하는 실정”이라며 “조사 항목에서 계속기업가치 산정만 제외하더라도 기업이 느끼는 부담을 크게 덜 수 있다”고 말했다.

형식적 수치 벗어나 유연한 제도 운용 시급


[연합]


나아가 일각에선 계속기업가치 산정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회의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M&A형 회생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기존의 가치 산정 방식은 시장의 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매각대금으로 청산가치 이상을 회수해 채권자들에게 배분하는 ‘청산보장의 원칙’만 충족하면 회생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에도, 굳이 장기 추정치에 불과한 계속기업가치 산정이라는 절차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도산법에 정통한 변호사는 “기업 스스로 빚을 갚아나가는 ‘독자 생존형’ 회생이라면 10년 뒤 현금 흐름을 가늠하는 게 의미가 있겠지만, M&A가 대세로 자리잡은 현재의 구조조정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면서 “미래 현금흐름을 특정 수치로 도출하는 것 자체가 불확실성에 기반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물론 회생절차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이같은 보수적 접근이 불가피하다는 반론도 있다. 이들은 지금의 위험 프리미엄 상한선(6.5%)이 일반 자본시장의 리스크 요구 수준보다 오히려 낮다고 설명한다. 기업 구조조정 자문 경험이 풍부한 회계사는 “시장에서 형성되는 위험 프리미엄은 최소치가 이미 6% 이상”이라면서 “6.5% 최고치 적용이 시장 눈높이에 비하면 결코 과도하게 높은 할인율이라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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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는 이 같은 점을 감안할 때 해외 주요국처럼 기계적인 사전 수치 산정을 지양하고 회생의 실효성과 유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는 건 미국의 챕터 11(Chapter 11) 절차다. 미국 파산법원은 절차개시 단계에서부터 계속기업가치와 청산가치를 산정·비교하도록 법으로 명시해 두고 있지 않다. 대신 채무자와 채권자 양측이 각자의 가치평가 자료를 제출해 공방을 벌인 뒤, 법원이 최종 결정하는 구조를 취한다.

법원이 사전에 회계법인을 통해 일률적인 잣대로 회생 여부를 강제 판단하기보다 이해관계자 간의 입증과 자율적 검증에 맡기는 셈이다. 법적 강제성이 없다 보니 개시 시점의 정밀한 가치 평가에 목을 매기보다 시장에서의 실질적인 M&A나 구조조정 협상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법조계 관계자는 “한국은 관행이나 부작용 우려 등으로 인해 조사위원 중심의 수치 산정 절차를 고수하고 있다”며 “법적 기준을 경직되게 적용하는 것보다 시장 상황에 맞춰 절차를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지를 열어줘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