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때 선물받은 카메라로 ‘홈무비’ 찍던 소년
영화인 산실서 ‘인생 동반자’ 만나 영화판으로
‘메멘토’·‘인셉션’ 등 독창적 아이디어로 성공가도
새로 쓴 ‘배트맨’ 시리즈, 히어로물 새 지평 열어
수익 20% 가져가는 파격조건에도 너도나도 “계약하자”
‘오디세이’ 등 IMAX 촬영, 관객체험 중시하는 ‘극장주의자’
가족과 완성한 성공…영화는 가족이자 삶·꿈이자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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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디세이’ 포스터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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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개봉한 영화 ‘인터스텔라’ 촬영에 한창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모습 [테네시 아쿠아리움 아이맥스 영화관 공식 SNS] |
[헤럴드경제=도현정 기자] 2000년 9월 베니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한 신예 감독의 두번째 장편 영화는 형식도 내용도 파격 그 자체였다.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가 흐르는 순행 장면은 흑백으로, 과거의 일로 역행하는 장면은 컬러로 표현되면서 이야기가 마구 교차했다. 보다보면 관객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10분마다 기억을 잃는 듯한 혼란과 단절을 느낄 정도였다. 단순히 아내를 죽인 이가 누구인지를 묻는 데에서 나아가 기억과 인지, 이를 매개로 한 자기기만을 들여다보게 하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다. 바로 ‘메멘토’다. 할리우드 기준으로 초저예산인 900만달러(약 120억원)를 들여 만든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4000만달러(약 580억원) 이상의 수익을 거두며, 21세기 새로운 영화거장의 등장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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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9월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최초 개봉한 영화 ‘메멘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두번째 장편 영화이다. |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놀란. 어린 시절 할리우드의 SF 대작으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다 영화 명문인 학교에서 수련하고, 아내와 함께 영화를 만드는 천상 영화인이다. 그는 어떻게 스티븐 스필버그의 뒤를 잇는 ‘블록버스터 장인’이 됐을까.
그의 아버지는 영국인이었고, 광고 기획자였다. 어머니는 미국 국적으로 항공사 승무원이었다. 영화와 관계가 있는 듯하면서도 직접 관련은 없는 이 조합이 뜻밖에 ‘영화 천재’의 조기교육을 가능케 했다. 그는 부모의 직업 때문에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컸고, 이 때문에 할리우드의 화제작 ‘스타워즈’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을 친구들보다 훨씬 일찍 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전 세계 동시 개봉 시스템이 없어서,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를 영국에서 보려면 길게는 6개월 정도 기다려야 했다.
‘스타워즈 키드’로 영화에 대한 관심을 키우던 그는 8살때 아버지로부터 슈퍼8 카메라를 선물받으며,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꿈을 품게 됐다. 슈퍼8 카메라는 코닥에서 일반 대중을 위해 출시했던 아날로그 소형 동영상 카메라로, 복잡하고 전문적이었던 촬영 방식을 획기적으로 간소화 한 제품이다. 이로 인해 1965년 출시된 이후 1980년대까지 집에서 습작처럼 촬영하는 ‘홈 무비’ 열풍이 일기도 했다. 놀란도 홈 무비 열풍을 타고 꿈을 키운 셈이다.
그는 10대 때 아버지의 모교인 가톨릭계의 기숙학교 헤일리버리 앤드 임페리얼 서비스 칼리지로 진학했는데, 이때 여러 공상을 하면서 영화에 쓸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이를 다듬어 졸업반일 때 첫 단편영화 ‘타란텔라’를 연출했다. 여기에는 이후 그가 본격적으로 선보인 시간 역행 연출이 실험적으로 나온다.
그는 영화 전문 학교 대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을 택했다. UCL은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부터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전화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 등을 배출한 명문이다. 동시에 영국에서는 웬만한 영화 학교보다 더 유명한 영화 인재의 산실로 자리잡았다.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 콜린 퍼스나 영국 시트콤 ‘오피스’의 기획자이자 주연 배우로 에미상, 골든글러브 등을 수상했던 리키 저베이스, 영국의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 조나단 로스 등이 UCL을 거쳐 문화예술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UCL이 대중문화계에서 인재 산실 역할을 하는 배경에는 실제 스튜디오를 방불케하는 동아리 시스템이 있다. UCL의 영화 동아리에는 16㎜ 카메라와 편집실 등 영화 제작 시설이 탄탄하게 갖춰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영화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도 만나게 됐다. 입학 첫 날 기숙사에서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는 엠마 토마스를 만난 것이다. 그는 엠마에게 영화 동아리 가입을 권유했고, 이후 엠마는 자신의 뒤를 이어 공직자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뒤로 한 채 놀란과 함께 영화판에 뛰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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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놀란(오른쪽) 감독과 영화 제작자이자 놀란 감독의 아내 엠마 토마스 [게티이미지] |
그는 졸업 후 카메라 기사로 일하면서 주말마다 짬을 내 친구들과 영화를 촬영해 첫 장편영화 ‘미행’을 완성했다. 6000달러(약 860만원)의 저예산으로 만든 이 영화는 참신한 아이디어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고, 수차례 수상 실적도 쌓으며 놀란에게 차기작 자금을 쥐어줬다. 이 상금들을 모아 놀란은 2001년 기억상실증을 소재로 한 스릴러 ‘메멘토’를 선보였다. 메멘토는 평단과 영화팬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그 해 선댄스영화제, LA 비평가협회, 시카고 비평가협회 등에서 각본상을 휩쓸었다. 미국 국회도서관은 이후 2017년 이 작품을 국립 영화 등기부에 영구보존작으로 등재하기로 했다. 이는 독립영화가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찬사라 일컬어진다.
‘메멘토’의 성공은 그를 할리우드의 주류로 옮겨놓았다. 경쟁사 20세기 폭스가 ‘엑스맨’으로, 소니 픽처스는 ‘스파이더맨’ 으로 메가 히트를 이어가는데, 1997년 ‘배트맨 앤드 로빈’이 처참히 실패한 이후 만회를 못하고 있었던 워너 브러더스는 놀란에게 배트맨 시리즈의 운명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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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왼쪽부터)과 배우 크리스찬 베일, 모건 프리먼, 리암 니슨, 와타나베 켄, 케이티 홈즈, 프로듀서인 찰스 로벤이 일본 도쿄에서 영화 ‘배트맨 비긴즈’ 홍보 기자회견을 하면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
놀란은 2005년 설정을 완전히 새롭게 정리한 ‘배트맨 비긴즈’로 시리즈의 부활을 알렸다. ‘배트맨 비긴즈’는 히어로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지적인 블록버스터’라는 장을 열었다. 배경인 고담시는 만화에 나온 것처럼 괴기스러운 도시가 아니라 빈부격차와 국가 권력의 부패가 얽힌, 현대 사회의 병폐를 응축해 놓은 도시로 묘사됐다. 주인공은 복수와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공포에 시달리기도 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에서 누구나 고민했을 법한 질문을 던지는 히어로 영화를 두고 평단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한 인간의 심리 드라마이자, 정의와 도덕성에 대해 고찰하는 철학서’라는 평가를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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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 나이트’ 스틸컷 |
후속작인 ‘다크 나이트’는 역대 최고의 슈퍼히어로 영화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 영화 역시 순수한 혼돈의 화신 조커와 선(善)의 정점에 있던 검사의 타락을 통해 ‘절대선이 존재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지적인 블록버스터’였다. 흥행에도 성공해 수입 10억달러를 넘기며 당시 역대 박스오피스 성적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도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 의식을 담으려 시도하면서, 히어로 영화의 역사가 ‘다크 나이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2012년에는 ‘다크 나이트’의 속편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로 놀란 표 배트맨 시리즈를 완성했다. 이 작품 역시 흥행에 성공하고 호평을 받아 후속작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놀란은 시리즈를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싶다며, 이 작품을 끝으로 배트맨 시리즈를 더 이상 연출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배트맨 시리즈를 되살린 워너브러더스는 아쉬워했지만, 놀란은 여러모로 떠나야 할 때를 안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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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시상식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고(故) 히스 레저의 남우조연상을 대리 수상하고 있다. 히스 레저는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 역으로 불세출의 악역 연기를 남겼다. [게티이미지] |
‘다크 나이트’의 성공 이후 워너브러더스는 놀란 감독에게 ‘하고 싶은 영화는 무엇이든 하라’는 전권을 줬다. 이에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찍기 전, 놀란은 10년간 시나리오를 쓰고 다듬어 왔던 작품인 ‘인셉션’을 내놨다. 첫 작품 ‘타란텔라’부터 ‘메멘토’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특기는 시간 순서를 뒤섞는 연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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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셉션’ |
‘인셉션’에서는 꿈, 그리고 꿈 속의 꿈을 이용해 시간의 틈을 벌린 후 사건을 진행하는 플롯을 선보여 ‘시간 조작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인셉션’은 메멘토와 2020년 ‘다크 나이트’에 이어 올해 미 국회도서관의 국립 영화 등기부에 영구 보존작으로 이름을 올렸다. 꿈과 잠재의식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놀란의 연출력이 국가적 차원의 문화유산으로 한 번 더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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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터스텔라’ |
이후 놀란은 ‘인터스텔라’로 우주의 이야기를, ‘덩케르크’로는 2차 세계대전에서 실제 있었던 탈출 작전인 ‘다이나모 작전’을 풀어냈다.
그는 지독한 아날로그 주의자다. 대다수의 감독들이 디지털로 영화를 찍는데, 그는 끝까지 필름으로 영화 찍기를 고집한다.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감독은 그와 더불어 쿠엔틴 타란티노 등 극소수다. 상상력 기반의 SF 영화, 대규모의 폭파 장면, 불꽃튀는 액션 장면을 찍으면서도 컴퓨터 그래픽(CG)은 자제하고 실사로 촬영하는 것을 선호한다. ‘다크 나이트’에서는 대형 트레일러 트럭이 도심 한복판에서 세로로 뒤집히는 장면, 병원 폭파 장면 등을 실제 스턴트와 특수효과로 촬영했다. ‘인셉션’에서는 영국 카딩턴에 있는 비행선 격납고에 길이 30m의 호텔 복도 세트를 지어놓고, 세트장 전체를 360도로 회전시키며 중력이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의 몸싸움 장면을 촬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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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일본 도쿄 롯폰기 힐스에서 열린 영화 ‘인셉션’ 시사회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게티 이미지] |
심지어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할 때에도 당연히 이메일로 보내는 할리우드의 시스템을 거부하고, 직접 배우를 만나 인쇄된 시나리오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마트폰도 쓰지 않고, 구형 폴더폰을 쓴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에도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전용 컴퓨터로 글을 쓴다. 이에 대해 그는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복잡한 각본을 쓰고 영화의 구조를 구상하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데, 주머니 속에 인터넷이 연결된 기계가 있으면 틈날 때마다 그것을 들여다보게 돼 사고의 흐름이 끊긴다”며 “언제든 인터넷에 연결되는 스마트폰이 오히려 사람의 집중력을 방해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은, 온전한 사람의 상상력으로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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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첫 전쟁영화 ‘덩케르크’ |
아날로그 애호가라는 면모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영화는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장주의자’이기도 하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할리우드를 잠식하는 시대에 ‘극장주의’는 생존을 위협하는 고집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의 고집에 커리어가 다소 흔들리기도 했다. 하필 코로나19 팬데믹과 맞물려 전 세계 영화 산업이 위기를 맞았던 2020년, 많은 영화들이 개봉을 포기하고 OTT로 발길을 돌렸음에도 그는 ‘테넷’의 개봉을 고집했다. 팬데믹때문에 극장에서 보는 영화의 자극에 다소 둔감해졌던 관객들에게 ‘테넷’의 어려운 플롯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테넷’은 박스오피스에서 총 3억6000만달러(약 5200억원)를 벌어들이며 놀란의 영화 중 유일하게 흥행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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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월 미국 뉴욕 AMC 링컨스퀘어 극장에서 열린 영화 ‘오펜하이머’ 특별 상영 및 관객과의 대화 모습. [게티이미지] |
그러나 놀란은 2023년 최대 화제작인 ‘오펜하이머’로 다시 화려하게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최초로 핵무기를 개발한 과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소재로 한 전기 영화인 ‘오펜하이머’는 세 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과 무거운 스토리, R등급(17세 미만 관람불가) 등 영화 흥행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악재’ 속에서도 9억7000만달러(약 14조원) 이상을 벌어들였다.
‘오펜하이머’는 놀란에게 첫 오스카 트로피를 안긴 작품이기도 하다. ‘메멘토’부터 그의 작품은 작품성과 대중성, 예술성 등에서 두루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오스카의 문턱은 넘지 못했다. 미국 아카데미 협회는 그를 줄곧 후보에만 올리고 상은 주지 않았는데, 드디어 ‘오펜하이머’로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았다. ‘오펜하이머’는 그해 아카데미에서 총 7개 부문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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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3월 할리우드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오펜하이머’로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게티이미지] |
전성기를 달리는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답게, 그의 자산은 대략 2억5000만~3억달러(약 3600억~4300억원) 상당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자산이 불어날 수밖에 없는 러닝 개런티 방식의 계약이 큰 역할을 한다.
보통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감독, 배우들과 극장 티켓 판매 현황에 따른 러닝 개런티 계약을 체결한다. 러닝 개런티는 영화사가 제작비를 회수한 이후 발생한 수익부터 적용된다.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계약금 이상의 수익이 감독이나 배우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놀란은 개봉 첫날부터 극장 티켓 판매액에서 자신의 몫을 받는 ‘퍼스트 달러 그로스(First-Dollar Gross)’ 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작비 회수 여부와 상관없이 총 수익에서 일정 비율을 떼어갈 수 있는 것이다. 퍼스트 달러 그로스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나 제임스 카메론,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피터 잭슨 등 극소수다. 심지어 놀란이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오펜하이머’를 만들때 계약한 러닝 개런티 비율은 20%였다. 관객이 얼마가 들건 간에, 티켓 판매액의 5분의 1은 놀란이 가져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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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유니버셜 픽처스 유튜브] |
할리우드의 초대형 스튜디오들이 이 같은 조건까지 감안하는 이유는 놀란이라는 이름 자체가 ‘초대형 IP(지적재산권)’가 됐다는 판단 때문이다. 요즘 극장가에서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순수 창작물로 10억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감독은 크리스토퍼 놀란과 제임스 카메론 뿐이라는게 영화계의 총평이다.
게다가 놀란은 할리우드에서 ‘가성비’가 뛰어난 감독으로 꼽히기도 한다. 유명 감독 중에서는 예술성에 심취해 제작비를 수백억씩 초과하거나 촬영 기간을 몇 달씩 넘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놀란은 할리우드에서 항상 예산보다 적은 돈으로, 예정된 일정보다 빨리 촬영을 끝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작품성까지 갖춘 블록버스터를 연달아 내면서도 작품 사이의 기간이 2~3년에 불과하다.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제작비 낭비 요인이 없는 감독이다. 이런 알짜배기 감독을 경쟁사에 뺏기느니, 거액의 러닝 개런티를 보장해서라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게 스튜디오들의 판단이다.
퍼스트 달러 그로스 계약 외에도 그가 할리우드 최고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내 엠마와 함께 세운 제작사 ‘신카피(Syncopy)’를 운영하며 감독·각본·제작을 총괄하는 시스템이 있다. 첫 장편인 ‘미행’부터 그의 영화는 엠마와 함께 제작했다. 할리우드에서도 ‘배트맨 비긴즈’ 이후 ‘다크 나이트’부터는 놀란이 감독과 제작을 겸했다. 제작사와 계약해 정해진 수익을 받는 다른 감독들과는 수입 규모가 차이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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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영화 ‘오펜하이머’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수상한 영화 제작자 엠마 토마스(왼쪽부터)와 크리스토퍼 놀란, 찰스 로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엠마 토마스는 놀란의 아내로, 30여년간 그와 함께 영화를 만들어 온 ‘인생 파트너’다. [게티이미지] |
엠마는 1997년 놀란과 결혼해 30여년간 가정을 꾸려왔다. 같은 기간 동안 그의 모든 영화를 함께 제작한 ‘인생의 파트너’라 할 수 있다. 둘은 ‘오펜하이머’의 대성공 이후 나란히 영국 국왕 찰스 3세로부터 기사 작위(놀란은 ‘Sir’, 엠마는 ‘Dame’)를 받는 영예도 누렸다.
엠마는 2~3년마다 한 편씩 작품을 내놓는 부지런한 감독을 뒷받침하면서도 자녀를 넷이나 낳았는데, 놀란은 이들을 자신의 영화에 절묘하게 ‘활용’하기도 했다. 시나리오 보안을 위해 만드는 가제에 자녀들의 이름을 넣은 것이다. ‘다크 나이트’의 가제는 셋째 아들인 로리의 이름을 넣은 ‘로리의 첫 키스’였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막내 아들 매그너스의 이름을 넣어 ‘매그너스 렉스’라고 했다. ‘인셉션’의 가제는 둘째이자 장남인 올리버의 이름을 넣어 ‘올리버의 화살’이라 했고, ‘인터스텔라’에서는 첫딸 플로라의 이름이 들어간 ‘플로라의 편지’를 가제로 썼다. 놀란은 인터뷰에서 촬영으로 인해 아이들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미안함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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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코닥 필름 어워즈 행사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이 무대에 올라 연설하고 있다. [코닥 필름 어워즈 제공] |
놀란의 아이들은 모두 그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플로라는 ‘인터스텔라’와 ‘오펜하이머’에 나왔는데, 특히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의 성공 이후 죄책감에 시달리며 보는 환각 장면에서 얼굴 피부가 벗겨져 날아가는 이름 없는 여성 역할이 관객의 기억에 남았다. 놀란 감독은 촬영장에 놀러 온 딸을 즉흥적으로 캐스팅하면서 “궁극의 파괴 무기를 만들면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파괴하게 된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그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올리버는 ‘프레스티지’에서 주인공 알프레드의 아기 시절 역할로, 로리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하이라이트인 다리 폭파 장면에서 스쿨버스 안에 있던 소년으로, 매그너스는 ‘인셉션’에서 주인공 코브의 아들 역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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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디세이’ 스틸컷 [유니버설 픽처스 유튜브] |
이들은 어느덧 성인이 돼 놀란의 영화에 스태프로 참여하기도 했다. 플로라는 이달 개봉하는 영화 ‘오디세이’에서 의상 담당으로, 올리버는 제작 보조로, 로리는 미술 담당으로, 매그너스는 사진 담당으로 참여했다. 놀란의 동생 조나단이 그의 작품에 줄곧 각본을 함께 썼던 것까지 생각하면, 영화는 놀란에게 ‘가족 사업’이며, 삶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이달 오디세이가 베일을 벗으면 그의 자산은 더 껑충 뛸 전망이다. 이와 더불어 역대 영화감독 흥행 순위가 어떻게 변할지, 올 연말 그에게 돌아가는 트로피가 얼마나 더 늘어날지도 관심이다. 지난달을 기준으로 역대 영화감독 흥행 순위에서 놀란은 스티븐 스필버그, ‘아바타’ 시리즈의 제임스 카메론, ‘어벤저스’ 시리즈를 연출한 앤서니·조 루소 형제에 이어 4위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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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놀란 걸어온 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