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밤낮 붓만 잡았다”…AI의 시대, 더 돋보이는 ‘손맛’

최신 영상 기술·아날로그 디테일의 시너지
놀란표 ‘실물 연출’…10m 목마도 실제 제작
‘동궁’, 서예가가 직접 쓴 글씨로 세트 제작
“축적된 디테일, K-콘텐츠 열풍으로 이어져”


영화 ‘오디세이’ 촬영 현장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시대의 거장으로 꼽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트레이드마크는 ‘실물’이다. 영화 ‘오펜하이머’(2023)의 핵폭발 장면을 컴퓨터 그래픽(CG)이 아닌 실제 화약과 화학 반응으로 구현했다는 사실은 ‘진짜’에 대한 그의 집요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오는 5일 개봉하는 그의 신작 ‘오디세이’도 놀란 감독 특유의 실물 중심 연출의 연장선에 있다. 감독이 20년 넘게 품어온 꿈의 프로젝트답게, 영화는 디지털의 맛을 최대한 덜어내고 현실 세계로 구현한 무대 위에서 신의 분노에 맞선 영웅 ‘오디세우스’의 장대한 여정을 펼쳐낸다.

바야흐로 인공지능(AI)과 CG의 시대, 더욱 귀해진 ‘손맛’이 콘텐츠 시장을 다시 사로잡고 있다. 이는 단순히 감독 개인의 취향을 넘어선, 대세적 흐름이다. 실사 촬영이 주는 생생한 현실감, 그리고 장인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완성해 낸 디테일이 디지털이 득세하는 시대에 오히려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인카메라가 전부였던 그 시절처럼”


영화 ‘오디세이’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사람의 손과 창작력으로 빚어낸 디테일은 최신 CG 기술과 만나 이전에는 없던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이는 놀란 감독을 비롯해 ‘컨택트’(2016)와 ‘듄’ 시리즈의 드니 빌뇌브 감독, ‘매드맥스’ 시리즈의 조지 밀러 등 할리우드 거장들을 넘어, 국내 콘텐츠 업계까지도 관통하는 흐름이다.

놀란 감독 필모그래피 사상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하며 글로벌 극장가를 강타한 ‘오디세이’는 인류 최초의 대서사시로 평가받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원작으로 하는 블록버스터다.

놀란 감독은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 세계를 활용하는 것’이라는 연출 철학에 따라 이번 영화에서도 트로이의 비운이 연출된 해변부터 동굴, 하데스의 지하 세계, 칼립소와 키르케가 머무는 신비의 섬,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카 등을 그리스와 이탈리아, 아이슬란드, 스코틀랜드, 미국 등 실제 자연 속에서 촬영했다. 최적의 촬영지를 찾기 위해 답사만 수개월이 걸렸다는 후문이다.

영화 ‘오디세이’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오디세우스에게 펼쳐질 시련의 시작점이자, 10년에 걸친 전쟁을 끝낸 10.7m 규모의 거대한 ‘트로이 목마’도 실제 제작됐다. 오디세우스와 선원들이 탑승하는 배 역시 실제 항해까지 가능하도록 완성됐다.

놀란 감독은 “압도적인 규모의 세트, 경이로운 로케이션, 수천 명의 출연진 등 관객들을 극장으로 이끌었던 영화의 매력적인 요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면서 “우리는 ‘인카메라’(CG 합성 없이, 카메라로 찍은 장면 자체로 완성하는 연출) 스펙터클 자체가 전부였던 고전 영화 제작 방식에 현대 시각 효과를 더해 판타지적 요소를 구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서예가가 한 자 한 자 써내린 붉은 글씨


이런 흐름은 할리우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컬트와 사극의 만남으로 큰 주목을 받으며 글로벌 시청 순위 상위권을 유지 중인 넷플릭스 시리즈 ‘동궁’도 같은 선상에 있다. 드라마는 강도 높은 CG로 ‘귀의 세계’를 구현함과 동시에, 저주에 휩싸인 현실의 조선 궁궐은 장인의 ‘손맛’을 빌어 고급스럽고도 미감이 살아 있는 공간으로 완성해 냈다.

서예가 이정화가 ‘동궁’ 세트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가 SNS에 올린 작업 영상은 온라인에서 큰 화제가 됐다. [인중이정화 인스타그램 @injoongmaobi]


극 중 구천이 자신을 가두는 방, 천장과 벽을 온통 뒤덮은 붉은 글씨는 당연히 CG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서예가 이정화 작가가 5일 밤낮을 꼬박 붓을 들고 앉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결과물이다. 작가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귀신 막다가 귀신 될 뻔한 순간들”이란 소감과 함께 실제 작업 과정 담긴 영상이 공개돼 큰 화제가 됐다.

누리꾼들은 “상상만으로도 힘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저 정도면 없는 귀신도 신기해서 와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디지털 기술이 만능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이 가장 화제가 된 셈이다.

‘동궁’의 손맛은 붓글씨에서 끝나지 않는다. ‘동궁’의 세계관을 구현한 디지털 작업 이면에는 미술, 색채 분야 전문가들의 섬세한 설계가 존재했다. 가령 극 중 궁녀 귀신들의 불당 세트는 실제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제작진이 직접 벽면을 파내 완성한 무대다.

넷플릭스 ‘동궁’ 세트 모습 [넷플릭스 제공]


이목원 미술 감독은 “단순히 후반 작업에 기대기보다, 실제 질감을 표현하고 싶었다”면서 “실제로 벽면을 직접 파내고 불에 그을린 작화를 입힌 뒤, 내부에 LED 조명등을 설치해 마치 나무 안쪽이 계속 타오르고 있는 듯한 질감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시너지…핵심은 ‘투자’


‘동궁’에 등장하는 귀매(⻤魅)는 한국 설화와 전통 이미지의 고유한 특징을 최대한 반영해 디자인됐고, 궐(현실)과 귀의 세계를 구분하는 색 작업도 전문가들의 섬세한 미감으로 완성해 냈다. 귀의 세계는 안개·모래·재 같은 텍스처의 밀도를 세밀하게 조율해 뜨겁고 강렬하게, 현실 세계는 차갑고 이성적인 톤으로 대비시키는 식이다.

미 매체 스크린랜트는 “‘동궁’은 크리처 디자인이 특히 빛을 발한다”면서 뛰어난 분장과 특수효과의 조합이 최고의 방식으로 생생한 공포를 그려낸다고 평했다.

넷플릭스 ‘동궁’ [넷플릭스 제공]


‘동궁’의 색보정 작업을 담당한 엄태식 U5K 이미지웍스(Imageworks) 대표는 “색보정은 더 이상 후반 작업의 마지막 공정이 아니다”며 “기획 단계부터 함께 설계해야 하는 창작 과정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넷플릭스의 장기적인 프로덕션 투자가 ‘동궁’에서 이 같은 디테일을 가능케 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작품의 디테일을 결정짓는 핵심은 결국 ‘자본’에 있다는 평가다. 실제 넷플릭스는 지난 2016년 한국 진출 이후 2021년까지 국내 콘텐츠에 1조원 이상을 투입했고, 2023년에는 향후 4년간 25억달러(한화 약 3조원) 규모의 추가 투자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동궁’은 K-프로덕션의 진화를 명확히 보여주는 작품”이라면서 “예전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디테일들이 쌓여 지금의 K-콘텐츠 열풍을 만들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