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 대체 누구야?”…‘호프’ 양배, 이유 있는 존재감

영화 ‘호프’ 속 사달의 발달 목수 ‘양배’
불편한 위화감…정체는 배우 음문석
댄서에서 감독까지 “서랍이 많은 사람”
영화 ‘호프’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나홍진 감독의 ‘호프’를 보고 나면 쉽게 잊히지 않는 얼굴이 하나 있다. 황정민, 조인성, 정호연이라는 확실한 존재감의 배우들 틈에서,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인물 하나가 스크린을 잠식한다. 바로 ‘양배’다.

엔딩 크레딧이 알려준 ‘충격의 정답’


양배는 평화롭던 호포항을 뒤흔든 참사의 발단이자, ‘호프’의 서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어딘가 어긋나 있지만 정확히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외모, 어수룩한 듯하면서도 묘한 위화감을 풍기는 태도. 그가 머무는 음습한 집, 그리고 그 안에 감춰둔 ‘무언가’가 맞물리며 영화가 던지려는 질문의 한 축을 이룬다.

양배는 무지와 무심함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다. 그 파장은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공동체 전체를 삼키는 재앙으로 번져간다. 악의 없는 악행도 악인가. ‘호프’ 특유의 선악 경계 허물기가 가장 날카롭게 응축된 지점에 양배가 있다.

영화 ‘호프’ 속 양배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문제는 이 캐릭터의 정체를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좀처럼 짐작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범석은 백 미터 밖에서 봐도 황정민이고, 성기는 기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도 조인성이며, 성애는 누가 봐도 정호연이다. 그런데 양배만큼은 다르다. ‘어느 신인 배우가 이런 얼굴로 이런 연기를 하나’ 싶은 순간, 엔딩 크레딧에 뜨는 이름은 다름 아닌 음문석이다.

외모도, 말투도, 어느 것 하나 원래의 음문석과 연결되는 구석이 없다. 배우 자신을 완전히 지워낸 채 캐릭터 안으로 녹아든 결과다.

무대인사 현장에서 음문석의 태도도 이 간극을 재치 있게 활용한다. 관객이 자신을 못 알아볼까 봐 마이크를 잡자마자 양배의 말투부터 흉내 내는가 하면, “쟤는 여기 왜 나왔나 하실 수 있는데 양배 역할이었다”며 능청스러운 인사로 웃음을 끌어내는 장면들이 여러 영상으로 남아 있다.

많은 관객이 음문석을 먼저 떠올리는 얼굴은 ‘열혈사제’의 양아치 ‘장룡’이다. 실제로 그는 이 작품에서 황정민과 처음 호흡을 맞췄고, 이 인연이 ‘호프’ 합류로까지 이어지는 다리가 됐다. 황정민은 음문석과 함께 출연한 한 유튜브 채널에서 나홍진 감독이 음문석을 캐스팅 후보로 언급했을 때 흔쾌히 동의했다고 밝히며, 그를 “내가 알고 있는 것 말고도 가지고 있는 게 너무 많은 배우”라고 평했다.

“꺼낼 서랍이 너무 많은 사람”


실제로 음문석은 다재다능하다. 어릴적 하키부 생활을 했던 그는 하키채를 놓고 댄스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2005년에는 정규 1집 앨범 ‘SIC’로 데뷔하기도 했다. 이후 크럼프 기반의 퍼포먼스 팀 ‘몬스터즈’를 결성해 활동을 이어가다, 음문석은 2013년 Mnet ‘댄싱9’에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는다.

그의 삶에 ‘춤’이 20년이란 시간을 차지한다면, 그 뒤에는 묵묵히 ‘배우’라는 꿈이 있었다. 춤을 추면서도 꾸준히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다져온 그는 2017년 드라마 ‘귓속말’, 영화 ‘공조’ 등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해 ‘열혈사제’와 ‘범죄도시2’ 등으로 대중성과 연기력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최근에는 ‘모범택시3’에서도 빌런으로 등장해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댄싱9 출연 당시 음문석 [Mnet 댄싱9]


액션과 댄스 등 몸을 쓰는 연기에 있어서 남다른 기본기, 그리고 코믹한 조연과 잔혹한 빌런,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인물까지 아우르며 장르와 톤을 가리지 않는 연기 스펙트럼은 음문석의 가장 큰 무기로 꼽힌다. 심지어 음문석은 첫 연출작인 단편영화 ‘아와 어’가 칸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돼 지난 2017년 칸 레드카펫을 밟은 적까지 있다. “꺼낼 서랍이 너무 많은 사람”이라는 황정민의 말이 맞다.

‘호프’ 합류 과정에도 그의 성실함이 묻어난다. 나홍진 감독에 따르면 음문석은 정식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됐다. 이 과정에서 직접 연기 영상을 준비해 제작진에 보내는 등 적극적인 태도로 기회를 잡았다는 후일담이다.

이런 노력은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호프’ GV 자리에서 봉준호 감독은 음문석의 안면 표현력과 얼굴을 움직이는 템포·리듬감이 뛰어나다고 평했고, 나홍진 감독은 여기에 “머리도 매일 감는다”는 농담을 더해 현장에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

영화 ‘호프’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나홍진 감독에 따르면 ‘호프’ 개봉판은 칸 국제영화제에 출품했던 것을 다시 손본 버전이다. 감독은 편집 과정에서 양배와 관련해 삭제됐던 장면들을 되살렸다고 언급했다. 일부 신을 늘리고 다른 신은 덜어내는 방식으로 손질했다는 설명이다. 결과적으로 관객은 칸에서 처음 소개됐을 때보다 한층 두터워진 양배를 만나게 됐다. 영화를 보고 나면, 감독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 감독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간에 등장하는 양배라는 친구의 삭제된 신들을 살렸다”면서 “그 친구의 장면은 늘리고, 몇 장면은 자르는 식으로 해서 (칸 출품판과 비교해) 비슷한 러닝타임이 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