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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 |
[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희소성을 유지하기 위해 미판매 제품을 폐기해 온 글로벌 명품업체들이 유럽연합(EU)의 새로운 규제로 재고 관리 전략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앞으로는 팔리지 않은 제품을 소각하거나 매립할 수 없게 되면서 생산량 조절과 재고 활용 능력이 브랜드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19일(현지시간)부터 EU가 고객 반품 상품을 포함한 미판매 의류와 액세서리, 신발의 소각 및 매립을 금지하는 규정을 시행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규제는 과잉 생산을 줄이고 폐기물을 감축하기 위해 2024년 승인됐으며, 우선 대기업을 대상으로 적용된다.
새 규정에 따르면 기업들은 미판매 제품을 폐기하는 대신 기부나 수선, 재사용 등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처리해야 한다. 다만 건강이나 안전에 위해를 줄 수 있는 제품이나 위조품, 복구가 어려운 훼손 제품 등은 예외로 인정된다.
유럽환경청(EEA)에 따르면 유럽에서 판매되는 섬유 제품 가운데 4~9%는 소비자에게 사용되기 전에 폐기된다. 연간 규모로 환산하면 약 26만4000~59만4000톤에 이른다.
최근 공개된 법원 자료에서는 샤넬이 재고 관리 전략의 하나로 홍콩에서 수천 개의 미판매 제품을 정기적으로 폐기해온 사실도 드러났다.
다만 샤넬은 FT에 “법정에서 언급된 수치는 현재의 글로벌 운영 방식을 반영하지 않았다”며 “판매가 어려운 제품을 2019년 설립한 재활용 계열사 ‘라틀리에 데 마티에르’를 통해 처리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규제가 공급을 제한해 희소성을 유지해온 명품 브랜드들의 기존 전략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LVMH와 프라다, 샤넬 등은 앞으로 재고 보관 비용을 늘리거나 생산량을 보다 정교하게 조절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소각이 어려워지면서 아울렛 판매나 할인 판매 비중이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재고를 효율적으로 소진할 수 있는 새로운 유통 전략이 중요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베인앤드컴퍼니와 이탈리아 명품산업협회 알타감마는 2025년 명품 판매의 최대 40%가 할인 판매를 통해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수요 둔화와 재고 증가로 브랜드들이 가격 인하와 아울렛 판매 의존도를 높인 결과라는 설명이다.
루카 솔카 번스타인 애널리스트는 이러한 변화가 유럽과 중국, 미국 뉴욕 등에서 명품 아울렛을 운영하는 영국 밸류리테일 같은 업체에는 새로운 사업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버버리는 이미 재고 폐기 논란을 겪은 바 있다. 2017년 수백억원 규모의 미판매 제품을 소각한 사실이 알려지며 비판을 받았고, 이후 사회적 기업 ‘스마트웍스’에 재고를 기부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또한 디지털 제품 여권(DPP)을 구축해 재판매와 재활용을 지원하는 체계도 마련했다.
일각에서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재고 관리 시스템 도입이 더욱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AI를 기반으로 수요를 예측하고 생산량을 조절해 재고를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줄리아 이우티코네 하이드릭앤드스트러글스 밀라노 사무소 파트너는 “생산과 판매 계획의 정교함 자체가 기업의 새로운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규제는 단순히 재고 처리 방식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명품업계의 생산과 유통 전략 전반에도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희소성을 유지하면서도 친환경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과제가 커지면서, 앞으로는 ‘얼마나 적게 만들고 얼마나 효율적으로 판매하느냐’가 명품 브랜드 경쟁력의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