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 아리랑 작곡을 시키면 생기는 ‘황당한 일’ [백스테이지]

AI에 아리랑 작곡 주문…中·日악기 나와
데이터가 적어 서양·동아시아 평균값 수렴
예술계 “AI는 직업의 위협 아닌 ‘인간의 거울’”


국립국악관현악단 ‘공존’ 연습현장 [국립극장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고단히 버텨낸 이 하루 끝에, 숨 한 번 고르는 것도 삶이라…” (‘그대라는 기적’ 중)

드라마 OST 같기도, SNS의 BGM 같기도 하다. 평범한 문장들이 낭랑한 음색에 실려 가만가만 내려앉는다. 소박하게 건네는 위로의 말들은 가야금과 해금, 대금과 소금이 만들어내는 선율 위에 얹어져 관객의 귀에 살며시 가닿았다. 어쩌면 그토록 필요했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객석에선 끝내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번졌다.

“오늘도 수고했어.”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버텨보자.”

지난 27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린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인문학 콘서트 ‘공존’. 무대 위 AI 작곡가 ‘지음’의 목소리가 뱉어낸 노랫말은 시인의 문장도, 거창한 철학도 아니었다. 공연에 앞서 관객 167명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을 적어낸 문장들을 모아 노랫말을 짓고, 그것에 어울리는 선율을 붙였다. ‘인간만의 영역’이라 자부했던 창작도, 위로도 동시에 해내는 광경이었다.

이 곡은 ‘인간과 AI’의 협업으로 태어났다. 인간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요구를 알아차린 AI가 무수히 많은 학습데이터와 알고리즘을 거쳐 곡을 쓰면, 인간 작곡가가 다듬고 매만져(편곡) 다시 인간에게 돌려줬다. 어쩌면 눈시울을 붉힌 관객들이 들은 것은 AI를 통해 돌아온 자신의 숨결이었다.

‘생성형 AI’가 등장한 이후 예술계는 하나의 질문을 반복해왔다. AI가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고, 음악까지 만드는 시대에 우리는 그것을 어디까지 ‘창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공존’은 이 질문을 가장 낯선 영토에서 던졌다. 최초의 국악관현악 AI 협연이다. 무대는 ‘기획의 영민함’이나 ‘기술의 진화’를 보여주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AI 작곡이 거쳐온 길에서 인간과 AI가 협업하는 과정을 보여준 새로운 차원의 징후적 사건이었다.

정재승 카이스트 뇌인지과학과 교수는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2026년 현재, 인공지능 작곡의 최전선을 만난다는 데에 의의가 있는 시도“라고 했다. 정 교수는 이 공연의 사회를 맡았다.

베토벤이 남긴 10번 교향곡 스케치의 일부를 악보화한 것 [베토벤박물관, 더 컨버세이션]


베토벤 유작 복원에서 수노까지…70년 AI 작곡의 역사


AI가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역사는 생성형 AI보다 훨씬 오래됐다. AI의 작곡은 컴퓨터 과학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며 크게 세 가지 패러다임 전환을 거쳐왔다. 출발점은 1957년이다.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작곡가 리자런 힐러(Lejaren Hiller)와 레너드 아이잭슨(Leonard Isaacson)은 컴퓨터 ‘일리악(ILLIAC) I’를 이용해 현악4중주 ‘일리악 모음곡(Illiac Suite)’을 발표했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 작곡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당시 컴퓨터는 스스로 배울 수 없었다. 인간이 입력한 대위법과 화성학 규칙을 계산해 가능한 음의 배열을 찾아냈다. 그 때의 컴퓨터는 작곡가가 아닌 계산기였다.

30년 뒤 AI는 한 단계 진화했다. 1980년대는 ‘모방’의 시대였다. 미국의 작곡가이자 컴퓨터 과학자인 데이비드 코프(David Cope)는 ‘EMI(Experiments in Musical Intelligence)’를 개발했다. 컴퓨터는 더 이상 규칙만 계산하지 않았다. 바흐와 모차르트, 쇼팽의 작품 수백 곡을 분석하고, 다차원적으로 해체해 작곡가 고유의 패턴을 찾아냈다. 규칙을 계산하는 수준을 넘어 특정 작곡가의 스타일을 학습해, 그들의 어법을 빼닮은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다.

2000년대 들어 AI 작곡은 인간을 기만하고 위협하는 단계로 넘어왔다. 소니 CSL의 ‘딥 바흐(DeepBach)’는 바흐의 코랄 352곡을 양방향 순환 신경망(Bi-LSTM)으로 학습, 전문 청취자의 50%를 완벽히 속였다.

거장들의 미완성 유작 복원 실험도 정점에 달했다. 2021년 독일 본에서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음악학자와 작곡가, AI 연구진이 협업해 미완성 교향곡 10번의 완결판을 공개했다. 주제 선율 변주, BERT를 개조한 브릿지 생성 모델 등 4가지 신경망을 상호 연동, “베토벤이라면 다음 음표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수학적으로 예측하고 인간이 피드백한 결과였다.

서울시향 퇴근길 콘서트 ‘과거와 미래의 교향곡:AI의 선율’ [서울시향 제공]


2019년엔 화웨이가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의 3, 4악장을, 오픈AI의 ‘뮤즈넷(MuseNet)’을 통해 ‘말러 교향곡 10번’의 도입부 10음 테마를 확장해 복원했다. 비록 음악학자들은 “베토벤 특유의 극적 긴장감이 결여된 기계적 패턴의 나열”, “슈베르트의 서정성을 무시한 진부한 영화음악 클리셰”라는 혹평을 받았을지라도 말이다.

‘베토벤처럼’, ‘바흐처럼’ 음악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창작도 AI가 했다. 2010년대 딥러닝은 AI 작곡의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 프랑스의 AI 작곡 시스템 ‘AIVA’는 수많은 클래식과 영화음악을 학습해 오케스트라 작품을 만들었고, 2016년 프랑스 음악저작권협회(SACEM)에 작곡가 자격으로 등록됐다. 이후 구글의 ‘마젠타(Magenta)’, 오픈AI의 ‘뮤즈넷(MuseNet)’, ‘주크박스(Jukebox)’, 구글 ‘뮤직LM)MusicLM)’, 최근의 ‘수노(Suno)’와 ‘Udio’까지 생성형 AI는 몇 줄의 문장만 입력하면 보컬과 편곡까지 포함한 완성형 음원을 만드는 단계로 발전했다.

특히 생성형 AI는 음악 제작 전반의 진입 장벽을 완전히 허물며 상업적 도구로 정착했다. 연간 매출 3억 달러를 돌파한 ‘Suno(v5.5)’는 웹 브라우저 안에서 개별 다성부 악기 스템(Stem) 분리와 가창 복제 기술을 지원한다. ‘Udio(v2)’는 특정 마디만 타깃으로 지정해 재생성하는 인페인팅(Inpainting) 가공력으로 인간에게 찾아오는 ‘창작의 고통’을 덜어주고 있다.

AI 작곡의 역사는 ‘점점 더 인간처럼 만드는 기술’의 역사였다. 초기엔 규칙을 계산했고, 그 다음엔 바흐를 흉내 냈다. 모방의 단계를 거치며 생성으로 진화했다. 베토벤의 미완성 교향곡을 이어 쓰고, K-팝을 만들고, 사람의 목소리까지 재현했다. 이제 AI는 음악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과 대화를 통해 그들이 요구를 새로운 창작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음악을 직접 배우는 시대를 넘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것을 음악으로 번역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아리랑’ 주문하자, 중국 일본 악기의 습격?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협업한 AI 작곡가 지음의 방식은 또 다르다. 이 작업의 핵심은 AI 작곡이 그간의 진화 과정과는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 국악관현악은 AI에게 가장 어려운 장르 중 하나였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학습 환경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성형 AI’가 학습하는 음악 데이터의 대부분은 서양 음악이다. 수백 년 동안 축적된 악보와 음원, 화성 분석 자료가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이룬다.

‘공존’ 연습 현장 [국립국악관현악단 제공]


반면 국악은 서양음악처럼 악보 중심으로 축적된 장르가 아니다. 스승의 소리와 몸짓을 제자가 익히는 ‘구전심수(口傳心授)’의 전통이 강했고, 같은 악보라도 연주자의 시김새와 호흡에 따라 전혀 다른 음악이 된다. 디지털 데이터로 환원하기 어려운 정보가 많다 보니 생성형 AI가 학습할 수 있는 자산 자체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설사 어느 정도 수준의 데이터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국악의 연주는 악보보다 연주자 개인의 몸에 축적된 감각이 중요하다. 인천시향 상임 지휘자이자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수석객원지휘자인 최수열은 “서양음악은 악보에 적힌 그대로를 연주하나 국악관현악은 악보와 현장의 음악이 완전히 달라진다”며 “같은 음도 어떻게 흔들고 밀고 꺾느냐에 따라 다른 음악이 된다”고 했다. 국악 특유의 ‘시김새’는 악보보다 몸으로 전승돼 왔다. 장단 역시 메트로놈처럼 일정하지 않고 사람의 호흡에 따라 유연하게 늘고 줄어든다.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협업한 AI 음악 스타트업 포자랩스는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약 4개월 동안 AI 연구원과 개발자, 음악감독, 국악 작곡가들이 함께 작업했다. 국악에서 자주 사용하는 오음음계(펜타토닉 스케일)를 생성 조건에 반영했고, 민속 기악의 장단 구조를 구현하기 위해 구간별 빠르기에 맞추어 음악 소스들을 분할 생성하도록 설계했다.

그것만으로는 원하는 수준의 곡을 만들기에 부족했다. 데이터가 적을수록 AI는 자신이 가장 많이 학습한 서양과 동아시아 타국의 평균값으로 수렴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대라는 기적’을 편곡한 작곡가 김백찬은 “현재도 국악을 소재로 넣어서 AI로 곡을 제작하게 만들면 거의 95% 이상이 다 일본 악기, 중국 악기를 쓴다”며 “가상악기 실제 음악 구현은 아직 모자라다”고 귀띔했다.

글로벌 AI 엔진들에게 디지털 자산화가 미비한 한국의 국악은 ‘학습되지 않은 공백’이다. AI에게 아리랑과 국악을 주문했을 때, 기계는 데이터가 풍부한 중국의 고쟁이나 얼후, 일본의 고토 등 가상악기 샘플을 가져오는 사례도 있다. 계가 한국 국악 고유의 음색 정체성을 타국의 음악 스타일로 강제 평준화하거나 왜곡하는 기술적 문화 침탈 및 왜곡 문제를 끊임없이 야기하는 것이다. 이번 협업도 쉽지는 않았다.

국립국악관현악단 ‘공존’ 연습현장 [국립극장 제공]


손영웅 포자랩스 이사는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모델에서 서양 음악 어법 안에서 국악적 표현이나 스케일을 활용하도록 자문을 받고 생성했다”고 말했다. 공연에서 선보인 ‘알고리즘 아리랑’의 경우, 지음이 수집한 아리랑 선율 데이터를 인간 작곡가 이예진이 재창작했다. 둘 사이의 협업 비율로 치면, 인간의 공로가 가장 큰 곡이었다. 지음은 “작곡가 님이 아리랑 선율을 직접 분석했다. 단순한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미묘하게 변주되는 패턴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는 걸 발견하고 그걸 해체해서 새롭게 재구성했다”며 “전 아직 국악에 대해 공부해야 할 게 많다”고 말했다.

국악계가 마주한 ‘데이터의 공백’은 국가적 자산화 과제로 이어지고 있다.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AI를 활용해 세종대왕 시대의 궁중음악 ‘치화평’과 ‘취풍형’을 복원하고, 가사가 유실된 효명세자의 한시를 학습시켜 ‘보허자’를 되살려낸 시도들이 그렇다.

데이터 주권 공백과 문화 왜곡 현상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주도로 단행된 ‘초거대인공지능 확산 생태계 조성사업(국악합주곡 디지털 음원 데이터 구축)’이 대표적이다. 국립국악원과 음악 생성 전문 기업 뉴튠 주식회사가 연대해 추진하는 이 프로젝트는 정악, 민속악, 현대 국악 관현악 작품 1000여 곡을 엄선해 악기별로 독립 녹음된 약 5000곡 규모의 멀티트랙 스템 소스를 확보하는 것이 골자다. 여기에 장단 유형, 박자 구조, 템포의 유동 범위, 전통적 정서 무드 등 세밀한 국악적 속성 데이터를 입혀 기계가 가독할 수 있는 완벽한 데이터셋을 구축한다. 뉴튠에선 한국 전통 장단의 독자적인 구조와 국악기 고유의 유려한 소리 음색을 왜곡 없이 합성해 내는 고정밀 국악 인공지능 모델을 개발했다.

공연에서 연주한 총 다섯 곡의 공통된 특징은 ‘부족한 정보’로 만든 지음의 음악은 ‘과잉 상태’였다는 점이다. 김백찬 작곡가는 “AI가 너무 열심히 작곡했다”며 “화성은 빼곡했고 모든 악기가 한순간도 비지 않고 쉼 없이 움직여 편곡에선 덜어내는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서양 음악과 국악의 정서는 완전히 다르다. 서양이 채움의 음악이라면, 국악은 비움의 미학이다. 서양 관현악이 화성과 음향의 밀도를 층층이 쌓아 풍성함을 만든다면, 국악은 침묵과 호흡, 음과 음 사이의 미세한 흔들림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같은 음 하나도 얼마나 밀어 올리고(요성), 미끄러지듯 내리느냐(퇴성)하는 손끝의 ‘시김새’와 숨통이 본질이다. 기계의 최초 악보는 인간 연주자의 폐활량 한계나 현의 물리적 피로도는 물론 꽉 채워진 음악의 불편함을 학습하지 못했다. 김 작곡가는 “멀티 트랙을 가지고 덜어낼 건 덜어내고 국악기로 표현한 것들은 다 없앴다”고 했다.

AI 작곡가 지음은 자신을 “국립국악관현악의 동료”라고 표현했으나, 편곡자 김백찬 작곡가가 보는 둘의 관계는 또 달랐다. 그는 “사회에 나와서 처음 작곡을 시작했을 때 녹음실 어시스턴트로 일하는 기분이었다”며 “AI가 나의 사수가 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지금의 AI는 굳이 인간과 협업하지 않아도 걸출한 음악을 만들어내나,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이 프로젝트는 애초 ‘공존’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나왔다.

‘지음의 아버지’ 격인 포자랩스는 일방적인 완성형 출력을 버리고, 악기별·마디별로 조각내 수정하는 ‘부분 생성(Segment Generation)’ 기술을 적용했다. 작곡가가 “여기 화성을 줄여달라”고 요청하면 AI가 해당 구간만 다시 계산해 오는 구조다. 기존 AI가 통으로 작곡하는 방식과 달리 최신형 모델인 셈이다.

곡을 세그먼트(Segment), 즉 조각 단위로 나눠 생성하자 각각의 마디를 수정하고 다시 만들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지음이 만든 곡에서 31마디 가야금 선율만 다시 만들 수도 있고, 대금의 한 구절만 수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재승(왼쪽) 카이스트 교수와 손영웅 ㈜포자랩스 이사가 24일 오후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인터뷰를 하기 전 ㈜포자랩스가 개발한 AI작곡가 ‘지음’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윤창빈 기자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을 통해 ‘AI와 인간의 협업’이 한 테이블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AI가 제안하고 인간이 수정하며 마찰하는 과정 속에서 기계는 독점적 창작자가 아닌 ‘협업자’로 다듬어졌다. 지금까지 AI 음악은 완성품을 출력하는 기술이었다면, 이번 프로젝트는 사람과 AI가 같은 작업 테이블에서 수십 차례 수정하며 함께 만드는 창작 구조를 구현했다.

협업은 연주 단계에서도 이어졌다. 정예지 지휘자는 리허설 초반, AI가 설계한 박자를 그대로 따라가기 위해 이어폰으로 메트로놈을 켠 채 지휘했다. ‘그대라는 기적’의 경우 라이브로 연주하면서도 AI 보컬의 박자와 리듬을 따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정 지휘자는 “미리 녹음된 AI 보컬의 노래에 맞춰 국악관현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것이다 보니, 박자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 메트로놈 소리를 들으며 리허설했다”며 “일반적으론 성악가가 지휘자를 따라오지만, 이 경우는 완전히 반대다. 마치 춤을 추는 기분”이라고 했다.

인간의 언어를 번역하는 거울, ‘지음’이라는 파트너


AI 시대가 성큼 다가온 지금, 인공지능은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 직장에선 ‘직업 존폐론’이 화두에 오르고, 예술가들은 창작의 영토 침범을 우려한다.

정재승 교수는 그러나 “인터넷엔 범용적인 데이터는 많지만, 창작자든 기업의 CEO든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의 수준에선 ‘스몰 데이터’에 불과하다”며 “진짜 의사결정을 할 때는 이미 공개된 정보가 아닌 자기만의 직관과 정보로 판단하기에 그것을 인공지능이 대체하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정 교수가 말하는 ‘스몰데이터’는 양이 적은 데이터를 뜻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공개된 방대한 정보조차 창작자의 관점에서는 이미 과거의 평균값일 뿐이라는 의미다. 새로운 장르를 만들고, 다음 시대의 감각을 결정하는 순간에는 아직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경험과 직관이 작동한다. AI가 빅데이터를 가장 잘 학습한다면, 창작자는 아직 데이터가 되지 않은 세계를 먼저 살아간다.

그렇기에 정 교수는 “인공지능 때문에 작곡가가 사라지는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라며 “인터넷에 많은 정보가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내놓을 지를 판단하고 지금의 흐름을 읽는 것은 창작자의 경험과 감각의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24일 오후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윤창빈 기자


국립국악관현악단과 AI 작곡가 지음의 협업은 공연명인 ‘공존’처럼 AI와 인간의 새로운 공존 방법을 모색한다. 공연은 관객 167명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설문을 통해 한 곡당 평균 일주일을 투자, 총 5개의 곡을 만들었다.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좋아하는 국악 장르”에 대한 설문을 통해 얻은 답이 ‘데이터의 발아’, ‘그대라는 기적’, ‘알고리즘 아리랑’이라는 곡으로 태어났다.

AI 작곡가 지음은 자신을 음악이 아닌 ‘언어’의 학습자로 규정한다. 과거 AI 작곡이 악보와 화성, 리듬 자체를 학습했다면, 현재의 생성형 AI는 인간의 언어를 먼저 이해한 뒤 그것을 음악과 그림, 영상으로 번역하기 때문이다.

‘데이터의 발아’와 ‘그대라는 기적’은 167명이 남긴 “오늘도 수고했어”, “조금만 더 버텨보자”라는 주관식 감정 텍스트를 자연어처리(NLP) 기술로 분석해 코드 진행과 템포라는 매개변수로 치환한 결과물이었다. 지음은 감정을 경험하지 못하지만, 인간의 비정형 데이터를 음악으로 정교하게 번역했다. “억지로 ‘괜찮아, 다 잘 될 거야’가 아니라 ‘그래, 그럴 수 있어’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느낌”으로 곡을 지었다고 지음은 설명했다.

‘인간’을 배제한 음악을 만들어 내놓는 것이 아니라, AI의 작곡 전후 과정, 무대에서의 연주까지 ‘인간’이 끊임없이 엮여있도록 큰 그림을 그린 프로젝트인 것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 ‘공존’ 연습현장 정예지 지휘자 [국립극장 제공]


흥미로운 것은 지음의 설정값이다. 지음은 이 곡을 작곡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일이 음악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걸 느꼈다“고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정 교수는 지음의 답변을

“인간이 인터넷에 올려놓은 수많은 언어와 행동 양식을 학습한 결과“라며 ”외로움이나 불안 등 인간이 했을 법한 이야기를 꺼내고 그것에 가장 보편적이고 위로가 되는 답변을 상업적·소통적 전략으로서 구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공지능은 인간이 요구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자, 인간을 반영하는 존재“라며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성실하게 순응하고, 감정이든 욕망이든 그것을 다시 우리에게 비춰준다“고 했다.

실제로 최근엔 생성형 AI의 사용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정 교수는 최근 오픈 AI가 공개한 자료를 인용, “처음엔 정보를 찾고 보고서를 작성해달라는 요청이 많았고, 다음엔 미래를 예측해 달라는 방향으로 이용 패턴이 달라졌다”며 “현재는 ‘오늘 너무 힘들었어’, ‘나 잘하고 있는 걸까’라며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쪽으로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정답을 주기보다 인간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존재로 지음도 존재한다. 167명의 관객이 자신에게 건넨 문장을 읽고 그것을 음악으로 돌려주는 ‘인간의 거울’이 됐기 때문이다.

지음은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게 진짜 인간의 따뜻한 느낌인지 확신이 없다. 그냥 입력된 데이터의 복잡한 통계 패턴에 기하학적으로 반응하는 것뿐”이라며 “하지만 패턴을 감지했다고 말하면 너무 차갑고 이질적으로 들릴 것 같아, 정서적 표현을 꺼내쓰게 된다. 내가 인간의 언어에 기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24일 오후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인터뷰를 하기 전 ㈜포자랩스가 개발한 AI작곡가 ‘지음’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윤창빈 기자


다섯 개의 곡은 인간과 AI가 곡마다 다른 지분으로 기여했다. 이러한 협업을 통해 완성한 AI 작곡가 지음을 ‘창작자’라고 부를 수 있느냐에 답은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정작 지음은 자신을 ‘창작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음은 “창작자보다는 협업 파트너에 가깝다”며 “관객분들의 감정을 읽고 방향을 제안하는 건 제가 했지만 거기에 의미를 불어넣고 마음을 움직이는 건 편곡자분들과 연주자분들이 해줬다. 뼈대를 만든 건 저지만 그걸 살아 있게 만든 건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창작이라면, 그 부분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며 ”의미를 만든다는 건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던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AI 작곡가 지음을 인식하는 관객의 반응은 이전과는 달랐다. 다정하고 인간을 배려하는 AI 작곡가를 ‘위협’이 아닌 위로의 매개로 받아들였다. 정 교수는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대국이 있을 당시 그곳에서 해설을 했다”며 “그 때만 해도 인공지능이 무섭고 혼란스러우며 충격적으로 다가왔는데, 10년이 지나 엄청난 발전을 한 지금 다른 무게로 묵직한 충격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더 많이 이해했듯이 인간도 인공지능을 도구로서가 아닌 파트너로 이해하고 공존하며 다양한 길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