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감소·기후재해 얽힌 복합위기 진단
사후 보상 넘어서 ‘위험 예방 파트너’로
간병·돌봄 인수한 일본 솜포의 변신 소개
성수동서 소셜벤처 생태계 일군 이력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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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선 현대해상 최고지속가능책임자(CSO·부사장)가 18일 제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49회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에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제공] |
[헤럴드경제=박성준·서경원(서귀포) 기자] 정경선 현대해상 최고지속가능책임자(CSO·부사장)가 18일 제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49회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에서 이 같이 강조했다.
사고가 난 뒤 보험금을 지급하던 보험산업이 이제는 위험을 먼저 찾아내 알리고 예방까지 설계하는 산업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제안이다. 기후재해와 인구 감소 같은 거대 위험 앞에서 보험이 개별 기업의 각자도생을 넘어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떠받쳐야 한다는 주문이기도 하다.
사회문제 해결을 ‘본업’으로 삼아 온 그의 이력이 보험업의 역할 재정의라는 화두로 이어졌다.
정 CSO는 이날 대한상의 제주포럼 ‘기업인 이야기’ 세션에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설계’를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한국이 마주한 상황을 ‘복합 위기’로 진단했다.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인구 감소, 인공지능(AI) 확산으로 폭증하는 전력 수요, 갈수록 강해지는 기후재해, 관세전쟁으로 흔들리는 교역 질서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위기는 곧 비용으로 돌아온다. 정 CSO는 2023년 기준 20년 안에 생산가능인구가 940만명 줄고, 자연재해 복구 비용이 2045년 연 3조6400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73조5000억원의 부채를 안은 한국전력의 구조가 바뀌면 산업계가 감당할 에너지 비용도 커질 수밖에 없다고 봤다. 고령화가 낳을 돌봄 부담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아무리 로봇이 발전해도 몸을 일으키고 화장실로 모시는 돌봄은 자동화되지 않는다”며 “간병 비용은 폭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 CSO가 주목한 건 ‘선제 투자’의 힘이다. 2022년 태풍 힌남노 당시 하천 범람으로 포항제철소가 사상 처음 가동을 멈췄지만, 이듬해 태풍 카눈 때는 미리 세운 물막이벽이 범람을 막았다. 그는 “기후재해 피해는 점점 커지겠지만, 의미 있는 수준의 투자가 이뤄지면 피해를 막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보험사가 할 일도 여기서 나온다. 지금까지 보험사는 고객이 가입을 요청하면 위험을 계산해 보험료를 매기고 보장을 제공했다. 정 CSO는 이 순서를 뒤집자고 제안했다. 보험사가 쌓아온 데이터로 산업단지가 몰린 지역의 기후 위험과 인구구조 변화를 먼저 분석해 기업과 지역에 제시하고, 컨설팅을 거쳐 보험 상품까지 잇는 ‘토탈 리스크 관리’로 가자는 구상이다.
보험업의 구조가 이런 역할에 적합하다는 설명도 내놨다. 보험사는 수십 년에 걸친 초장기 부채를 다루기 때문에 은행·증권사와 달리 수익성에 인내심을 갖고 장기 투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 CSO는 돌봄 시설과 노인 주거, 지역균형발전 투자를 대상으로 꼽으며 “1400만 고객이 건강하고 안전해질수록 보험사도 돈을 버는 구조”라고 말했다.
해외에는 앞선 사례가 있다. 일본 대형 손해보험그룹 솜포는 간병·돌봄 시설을 대거 인수해 보험사이자 일본 최대 돌봄 서비스 제공자로 변신했다. 미국 AI 기업 팔란티어와 손잡고 돌봄 인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기술에도 투자한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일본에서 보험사가 위험을 보상하는 회사를 넘어 위험을 관리하는 회사로 이동한 셈이다.
정 CSO는 일본 정부와 민간이 1500조원을 투입하는 녹색전환(GX) 전략도 소개하며 “일본에서 배울 건 특정 정책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 집행”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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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선 현대해상 최고지속가능책임자(CSO·부사장)가 18일 제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49회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에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제공] |
정 CSO가 이런 메시지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의 독특한 이력이 있다. 정 CSO는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의 장남이자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손자다. 다만 그는 경영 수업 대신 사회 혁신 현장에서 10년 넘게 경력을 쌓은 뒤 보험사에 들어온, ‘오너 3세’로는 드문 길을 걸었다.
그는 이날 발표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본업으로 생각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2012년 비영리법인 루트임팩트를 설립한 정 CSO는 서울 성수동에 소셜벤처를 위한 공유 오피스 ‘헤이그라운드’를 열어 청년 창업가들이 모여 성장하는 생태계를 만들었다. 헤이그라운드를 중심으로 성동구의 소셜벤처는 2016년 153개에서 2024년 560여개로 3배 넘게 늘어났다.
청각장애인 기사가 운전하는 ‘고요한택시’, 노숙인을 고용해 매출 400억원대 물류기업으로 키운 ‘두핸즈’가 이곳에서 자란 대표 사례다.
10년 넘게 사회 혁신 분야에서 활동하던 그는 2023년 말 현대해상이 업계 최초로 신설한 CSO 자리에 오르며 경영에 합류했다. 위험을 공동체가 나눠서 지는 보험업의 본질이, 커뮤니티의 힘으로 사회문제를 풀어 온 그의 경험과 만났다. 정 CSO는 청년에게 기회를 주자는 제언도 남겼다. 그는 “복합 위기를 견디고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결국 20~30대”라며 “당장 부족해 보여도 다음 세대에 과감하게 권한과 기회를 줘야 실질적인 변화가 이뤄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속가능성에 먼저 투자하는 건 착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합리적인 사람의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