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노인 2명 중 1명, 국민연금 담보 걸고 병원비 빌렸다 [예은이]

‘급전 창구’ 실버론 상반기 약 60% 소진
실버론 이용자 2명 중 1명 병원비 마련
예산 늘렸지만 작년 집행액보다 부족
연 2%대 금리에 예산 소진 우려 재점화
“금리 인상기 취약 차주 고령층 대책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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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헤럴드경제=유혜림 기자] 올해 들어 노년층의 급전 창구인 ‘국민연금 실버론(노후긴급자금대부)’ 이용자 2명 중 1명은 의료비를 목적으로 대출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실버론 도입 이후 처음으로 의료비 목적 대출이 전·월세보증금 대출을 앞지르면서 생계형 수요가 짙어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 기조로 대출금리 상승이 예상되는 만큼, 노년층 취약차주들이 고금리 대부업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실버론과 같은 정책 지원체계를 강화하고 재원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비 비중 역대 최고…생계형 대출 짙어졌다


17일 헤럴드경제가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국민연금 실버론 현황’ 자료에 따르면, 실버론은 지난 6월 말 기준 총 312억5600만원(5072건)이 집행됐다. 정부가 올해 실버론 예산(540억원)을 지난해 본예산(380억원) 보다 40% 넘게 늘렸지만 올 상반기에만 이미 연간 예산의 약 58%를 소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작년 7월 초 실버론은 한 해 예산이 모두 동나면서 신규 접수가 중단되는 사태를 빚은 바 있다. (▶본지 작년 7월 9일자 1면 ‘[단독] 국민연금 담보대출 중단’ 보도 참조)

지난 2012년부터 도입된 실버론은 만 60세 이상 국민연금 수급자를 대상으로 전·월세자금과 의료비, 장제비 등 생활비를 대출해주는 제도다. 개인 신용등급이 낮아서 제도권 밖의 고금리 대출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고령층의 대출 부담을 줄여주려는 취지다. 연간 연금 수령액의 2배 이내에서 최대 1000만원까지 실버론을 받을 수 있다. 또 긴급자금 성격을 고려해 신청 후 최대 3일내로 대부금을 받을 수 있다.

이자도 낮아 은퇴족들의 ‘급전 창구’로도 불린다. 실버론은 매 분기 5년 만기 국고채 수익률에 연동해 변동금리를 적용하는데, 올 3분기 금리 수준은 2.92%다. 1년 전과 비교하면 0.41%포인트 올랐지만 여전히 2%대다. 시중은행의 시니어 전용 대출 상품 금리가 4~5%대인 점을 감안하면 절반 수준이다. 공공부문에서 2%대의 이자로 노년층에게 생활 긴급자금을 지원하는 곳은 국민연금공단이 유일하다.

특히 올 상반기엔 의료비 목적 대출 비중이 실버론 도입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승인 건수 기준 의료비 목적 대출은 2525건(49.8%)으로 전·월세보증금 목적(2493건·49.2%)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의료비 비중은 그간 35~40% 수준을 유지하다 2021년 이후 40%대로 올라선 데 이어 올 상반기 처음으로 50%에 육박했다. 이 밖에도 올 상반기엔 배우자 장제비(38건·3억1100만원)와 재해복구비(16건·1억5000만원) 등에 실버론이 쓰였다.

올 들어 실버론의 생계형 성격이 한층 짙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출금액 기준으론 전·월세보증금이 전체 61.7%(192억9900만원)를 차지해 의료비(114억9600만원·36.8%)보다 여전히 크다. 다만 전·월세는 건당 대출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건수 기준으로 치료비와 입원비와 같이 필수 의료비를 충당하기 위한 대출 수요가 주거자금 수요를 앞질렀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대출금액으로 살펴봐도 작년 상반기(105억9700만원)와 비교해 약 9억원이나 많았다.

현재와 같은 수요가 계속될 경우 작년처럼 연말 이전 예산이 소진돼 신규 대출이 중단되는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올해 본예산은 540억원으로 대폭 늘렸음에도 지난해 실제 집행액(약 611억원)보다 약 71억원 적은 수준이다.

2024년부터 기초생활수급자도 실버론 지원 대상에 포함되면서 이용 수요도 매년 커지고 있다. 올해는 의료비 항목까지 모바일 신청이 가능해지면서 거동이 불편한 고령층의 접근성이 개선된 점도 이용 증가에 일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 소병훈 의원은 “국민연금을 담보로 한 의료비 대출 증가는 고령층의 생계형 자금 수요 확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며 “월별 집행 추이를 면밀히 점검하면서 예산 소진이 예상될 경우 추가 재원을 사전에 확보하는 등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리 인상기에 더 절실한 실버론


전문가들은 한국은행의 추가 금리 인상 기조로 대출금리 상승이 예상되는 만큼, 실버론과 같은 취약 노인차주를 대상으로 한 정책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리 상승으로 대출 이자 부담이 커지는 데다 가계대출 규제가 강화될수록 시중은행의 대출 문턱도 높아져 고령층이 2금융권 대출이나 대부업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최근 시중은행들이 포용금융 차원에서 연금 수급자 대상 긴급 생활비 대출을 내놓았지만 대출 한도가 50만원 수준에 그쳐 실버론을 대체하기엔 역부족이다.

2022년 차주 단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가 강화되면서 은퇴 이후 안정적인 소득이 없는 노인층의 대출 여력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한은 가계부채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60대 이상 차주의 1인당 평균 은행 대출 잔액은 2021년 말 8131만원에서 2023년 말 8054만원으로 2년 연속 감소했다. 이후 다시 늘었지만 지난해 말에도 8131만원으로 4년 전 수준에 머물렀다. 같은 기간 30대와 40대의 대출 잔액이 각각 8.0%, 11.4% 증가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렇다 보니 여러 금융회사에서 빚을 끌어쓰는 노인들도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1분기 60세 이상 다중채무자는 31만3806명으로 지난해 말보다 10.5% 증가했다. 대출잔액도 12.5% 늘어난 23조9530억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20~40대 다중채무자가 모두 감소한 것과 달리 60대 이상만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였다. 또 한은이 조사한 1분기 말 60대 이상 다중채무자 비율은 16.0%로, 최근 5년여간 처음으로 16%대로 올라섰다.

한은 역시 은퇴 이후 소득 현금흐름이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고령층은 동일한 금리 상승 충격도 체감 부담이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이에 한은 경제연구원은 ‘초고령화에 따른 통화정책 여건 변화와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다양한 정책수단을 유기적으로 조합하여 정책목표를 달성하는 통합적 정책체계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신현송 한은 총재도 지난 16일 기준금리를 연 2.50%에서 2.75%로 인상한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통화 긴축에 따른 취약차주의 부담에 대해 “채무 조정과 같이 어려움을 덜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통화정책보다는 재정정책이나 금융정책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취약계층, 취약 차주에 대해선 항상 염두에 두고 있고 이 부분에서는 정부, 금융당국과의 조화로운 정책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