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공연 본 佛 유명 배우 “우린 연극을 다시 배워야 해” [세계로 간 판소리]

76년 박초월 ‘수궁가’ 글로벌 무대 첫선
지금은 동시대 공연 양식 중 하나로 대우
이자람, 아비뇽서 엿새간 ‘눈, 눈, 눈’ 공연
“공연 한 편 소개론 부족…매칭 펀드 필요”


이자람 ‘눈, 눈, 눈’ [LG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판소리엔 태어날 때부터 추임새라는게 있어요. 요즘엔 정말 자유롭게 넣는 시대에 도달했더라고요. ‘헐’, ‘대박 사건’도 하고요. 어떤 때는 ‘에라이’도 나와요.” (이자람)

본격적인 공연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객석은 웃음으로 들썩인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주인과 하인’을 판소리로 재창작한 ‘눈, 눈, 눈’ 공연. 이 시간은 일종의 ‘몸풀기’다. 소리꾼 이자람의 예언 같은 짧은 설명은 10여분 뒤 현실이 된다. 든든한 종마 제티가 새하얀 눈구덩이에서 사투를 벌일 때, 관객은 탄식을 터뜨린다. “헉! 아아…”

프랑스 유력지 르 몽드는 ‘눈, 눈, 눈’을 두고 “노래와 연극, 마임, 심지어 스탠드업 코미디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공연”이라며 “이자람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관객을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데려간다”고 평했다.

소리꾼 이자람의 ‘눈, 눈, 눈’은 아비뇽 페스티벌에 초청, 프랑스 아비뇽 오페라 극장에서 17~22일까지 관객과 만난다. 세계적인 공연예술축제 아비뇽에선 ‘한국어’를 축제의 공식 언어로 선택했다. 그런가 하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입과손스튜디오에 판소리의 공동 제작을 제안, 오는 9월 막을 올린다.

공연계 관계자는 “판소리는 과거 한국 문화의 홍보물을 넘어 세계 공연예술계가 공유하는 ‘하나의 장르’이자 ‘글로벌 클래식’으로 자리하며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가고 있다”고 했다.

한국의 전통? “우리는 연극을 다시 배워야 한다”


1976년 독일 베를린 국제현대음악제. 명창 박초월이 ‘수궁가’를 완창하자 현지 평론가들은 그의 목소리에서 재즈 거장 루이 암스트롱을 찾았다. 쉰 듯한 목소리의 갈라지는 창법은 서양 성악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음악 언어라는 평가였다. 판소리가 특정 나라의 전통 공연이 아닌 미학적 충격을 안긴 독자적인 예술 형식으로 읽힌 첫 순간이었다.

그 후로 반세기가 지난 지금, 세계 무대가 판소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유수 극장에서 판소리는 ‘한국의 전통문화’라는 설명을 보태지 않는다. 판소리를 동시대 공연 예술의 한 양식으로 바라본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가디언]


2023년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극장에서 공연한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은 현지 평단을 완전히 뒤집었다. 영국 가디언은 판소리의 성음을 두고 “비극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합할 수 없는 목소리”라고 평했다. 배우들의 소리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정서를 압도적으로 구현했고,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부셨다”는 찬사까지 보태며 별 5개의 최고 평점을 줬다.

2015년 시드니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이자람의 ‘억척가’에 대해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브레히트가 살아 있었다면 전적으로 동의했을 타악적 해석”이라며 “무대 효과는 그야말로 파괴적”이라고 했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도 공연을 앞둔 이자람을 “동시대 판소리의 가장 독보적인 목소리”라고 소개하며, “그의 작품은 노래와 연극, 몸짓과 해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하나의 새로운 공연 문법을 만든다”고 했다.

세계 무대가 판소리를 보는 방식은 우리보다 더 현대적이다. 이들은 소리꾼을 천부적 기량을 가진 독보적인 액터-싱어(Actor-Singer)로, 판소리를 미니멀리즘과 강력한 즉흥성을 지닌 현대적 ‘스토리텔링 극장(Storytelling Theater)’ 양식으로 해독한다.

이자람은 “프랑스에서 공연을 마친 이후 한 유명 배우가 ‘우리는 연극을 다시 배워야 한다, 판소리에서 소리꾼은 마리오네트가 되기도 하고, 이야기꾼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며 “사실 판소리를 태생이 연극적이며 엄청난 기술로 노래를 하며 두 시간을 끌고 가는 장르”라고 강조했다.

‘긴긴밤’의 작, 연출을 맡은 이상숙은 “해외 무대에서 관객들은 판소리를 단순히 ‘한국의 전통문화’로 소비하기보다 하나의 공연예술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한 명의 소리꾼이 이야기와 인물, 서술과 연기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관객과 직접 관계를 맺는 독특하고 현대적인 공연 문법인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이자람 ‘이방인의 노래’ [완성플레이그라운드 제공]


19세기 위고의 집에서 울린 소리…‘공동 창제작으로’ 영토 확장


프랑스 파리 마레 지구의 빅토르 위고 생가 박물관에선 창작 판소리 ‘레 미제라블-구구선 사람들’이 19세기 민중의 연대를 노래한다. 프랑스 배우전통연구소 아르따(ARTA)와 생가 관계자들은 “‘판소리’라는 공연의 독특한 문법과 ‘레 미제라블’을 판소리로 재해석한 방식이 놀랍다”며 “익숙한 원작 속 인물들이 한국적 정서와 공연 언어 안에서 새롭게 변주된 점이 흥미로웠다”고 입을 모았다.

파리에서 ‘구구선 사람들’을 선보인 이상숙 연출가는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 유학생은 눈물을 흘리며 ‘한국이 자랑스럽다’고 했고, 현지 프랑스 관객들은 판소리의 독특한 양식주의 문법 자체에 호기심을 보였다”며 “좋은 작품은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각자의 방식으로 관객과 깊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말했다.

물론 이같은 변화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서구권에서 아시아의 ‘낯선 민속예술’이었던 판소리는 세 번의 변곡점이 있기에 인식의 대변환이 가능했다.

판소리가 해외 무대로 처음 향한 것은 1970년대. 국가가 주도하는 문화외교 성격의 ‘소개하는 판소리’ 시대를 지나 1976년엔 박초월 명창을 통해 전환점이 마련됐다.

1980년~1990년대엔 영어와 프랑스 자막을 통해 해외 관객과의 접점을 넓혔고, 2000년대는 ‘창작 판소리’를 통해 장르의 변신을 꾀했다. 2003년 판소리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이후, 보존 중심의 가치관에서 벗어나며 가능했던 시도다. 이자람이 거쳐 간 젊은 판소리 창작 단체 타루가 등장한 것도 2001년이다. 이자람은 “당시 국악계에선 판소리 창작을 기특해하고 반가워했다”고 돌아봤다. 이들과 명창들이 공존했다. 2003년에는 미국 뉴욕과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안숙선 명창가 ‘춘향가 완창 투어를 해 서구 문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빅토르 위고 생가 박물관에서 공연한 입과손스튜디오의 ‘판소리 레미제라블-구구선 사람들’ [입과손스튜디오 제공]


2010년대 이후, 판소리는 ‘함께 만드는 시대’에 돌입했다. 안나 예이츠 서울대 국악과 교수와 같은 외국인 소리꾼이자 전통음악 이론가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그는 “음악을 학문적으로 깊이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음악 실기를 몸으로 체득해야 한다”며 2014년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 민혜성 명창을 사사했다. 최근엔 프랑스 출신 소리꾼 마포 로르가 판소리 ‘흥보가’를 완창했다.

소리꾼의 국적 다양성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변화는 이제 판소리는 세계 유수 극장과 ‘협업의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랜드마크 극장이 최초 기획 단계부터 함께하고 예산을 직접 매칭 투입하는 ‘국제 공동 창제작(Co-commissioning)’ 단계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입과손스튜디오에 먼저 손을 내밀어 제작하는 한-영 이중언어 판소리 ‘긴긴밤’이 대표적이다.

이상숙 연출가는 “번역극은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다, 바이링구얼(이중언어) 판소리는 처음부터 두 언어를 가지고 구조를 다시 짜는 작업”이라며 “극의 흐름, 대사 하나하나의 기능을 살피고 말의 뉘앙스를 점검해 실제로 두 언어가 작동하는 상태가 되도록 작업했다”고 귀띔했다.

제 80회 아비뇽 페스티벌 현장 [예술경영지원센터 제공]


1960년대 국가 주도의 문화외교로 해외에 소개되던 판소리는 60여 년이 흐른 지금, 세계 극장이 먼저 손을 내미는 공연예술이 됐다.

이 연출가는 “판소리는 매우 현대적인 장르”라며 “최소한의 무대장치만으로 거대한 세계를 상상하게 만들고 배우와 관객이 함께 이야기를 완성한다는 점은 오늘날 세계 공연예술이 고민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판소리는 한국의 전통예술이면서도 오늘의 창작자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살아 있는 공연 언어”라며 “세계 관객과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하는 공연예술의 한 형식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현장의 창작자들은 “진정한 해외 진출은 공연 한 편을 해외 무대에 소개하는 것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 가진 고유한 언어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문화권의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이어가는 일이다.

공연계 관계자는 “지속가능한 해외 진출을 위해선 일회성 초청을 넘어 장기적 신뢰 관계의 구축이 중요하다”며 “해외 극장과의 장기적인 공동 창제작 및 워크숍을 다년간 지원하는 매칭 펀드 체계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