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적’의 프랑스어 표현은?…판소리 번역의 ‘한끗 차이’ [세계로 간 판소리]

직역 대신 말맛과 호흡 살린 번역으로 변모
3단계 공정을 거쳐 이중언어 판소리로 제작
“번역은 판소리를 보편 예술로 만드는 열쇠”


이자람 ‘눈, 눈, 눈’ [LG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제티가 허우적 허우적 허우적 허우적 허우적모가지만 눈 밖으로 나온 채 새까만 게….” (이자람 ‘눈, 눈, 눈’)

숨 막히는 긴장감, 다섯 번에 이르는 반복적 의태어…. 판소리는 우리말의 아름다운 향연이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흩날리는 눈발도, 눈구덩이에 파묻힌 가여운 말 한마디의 사투도 온몸의 세포를 깨우는 언어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장면을 프랑스 관객들은 같은 긴장감으로 볼 수 있을까.

이자람은 “아무리 정교한 번역이라도 한국 고유의 언어적 뉘앙스와 말맛을 모두 살릴 수는 없다”면서도 “번역의 고도화가 이뤄졌기에 판소리의 해외 무대도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판소리의 세계 진출은 ‘좋은 작품’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언어와 문화라는 ‘1cm의 장벽’을 넘는 ‘번역의 기술’이 있어야 가능하다. 판소리를 세계 관객의 폐부를 찌르는 ‘동시대 극예술’로 더 가깝게 선보이기 위해서다. 이런 이유로 무대 아래의 창작 현장에선 늘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른다.

창작 판소리 ‘긴긴밤’의 이상숙 연출가는 “판소리 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작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작품의 미학과 제작 방식, 창작자의 의도를 다른 문화권의 관객과 프로그래머에게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추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번역가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이 PD는 “판소리나 창극은 음악과 언어, 관객과의 관계가 긴밀하게 연결된 장르이면서 현지 관객들에게는 다소 낯선 장르이기에, 해외 관객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그런 의미에서 번역가, 드라마터그, 프로듀서와 같은 중간 매개자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입과손스튜디오 ‘구구선 사람들’ [입과손스튜디오 제공]


“더 많이 덜어낸다”… 한유미·에르베 페조디에 부부의 ‘여백의 번역’


판소리나 창극 번역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공연계 관계자는 “과거엔 번역이 글자 그대로 직역하거나 단순화하는 ‘정보 자막’ 정도였다면, 이젠 최대한 한국어의 표현과 무대 언어를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귀띔했다. 소리꾼들의 ‘피, 땀, 눈물’이 만든 수작을 글로벌 무대에 온전히 선보일 수 있었던 것도 국내외 많은 번역가의 보이지 않는 노력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판소리를 세계 무대에 선보일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은 한국인 번역가 한유미와 프랑스인 연출가 에르베 페조디에(Hervé Péjaudier) 부부다. 이들은 프랑스 내 한국 고전 문학과 판소리 번역의 역사적 전성기를 이끈 주역이다.

‘수궁가’, ‘심청가’, ‘숙영낭자가’ 등 전통극과 이자람의 ‘사천가’, ‘이방인의 노래’,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입과손스튜디오의 ‘판소리동화시리즈 안데르센’, ‘판소리 레미제라블 토막소리시리즈3-가브로슈’, ‘구구선 사람들’ 등 창작극의 번역 작업을 맡아온 부부다. 이들의 번역본은 불어권 전문 출판사 ‘이마고(Imago)’의 한국 고전 시리즈인 ‘한국의 장(Scènes coréennes)’을 통해 출간했다.

한유미와 페조디에 부부가 강조하는 ‘번역론의 핵심’은 일대일 사전적 직역을 지양한다는 데에 있다. 한국 고유의 감성 언어이자 번역 불가능한 단어들을 한과 해학의 가치를 가지고 프랑스어 고유의 사운드와 연극성으로 재창조한다.

이자람은 “아비뇽에서 선보일 ‘눈, 눈, 눈’ 번역 역시 두 분이 하는데 의심의 여지 없이 믿고 맡긴다”고 했다. 입과손스튜디오 측은 “번역 전엔 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항상 갖는다”며 “한유미 번역가님은 한국 방문 때 공연도 관람하고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하며, 이전작과 다른 성과나 방향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공유한 뒤 작업한다”고 귀띔했다.

이자람 ‘이방인의 노래’ [완성플레이그라운드 제공]


두 사람의 번역이 흥미로운 점은 자막의 글자 수를 극단적으로 축소하거나 생략한다는 데에 있다. 한국어 사설이 지닌 행간의 여백, 소리꾼의 호흡, 시적 아름다움을 프랑스 관객이 한눈에 직관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자람은 “불어 번역의 경우 영어 문장 하나로 끝나는 것이 세 문장이 되는 경우도 있다”며 “두 분은 불어와 한국어 판소리 맛의 차이를 알기에 오히려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자막을 읽느라 관객들이 무대 위 소리꾼의 몸짓과 소리를 놓치지 않도록 여백의 미학을 살리고, 관객이 소리꾼의 구음에 오롯이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둔다”고 했다.

이들 번역의 또 하나의 특징은 ‘소리의 말맛’을 불어 사운드로 보완하기 위해 발음의 가락이 유려하게 흘러가는 고급 프랑스어 단어를 끊임없이 발굴한다는 점이다.

명창 김경아가 심봉사가 눈을 뜨는 대목에서 한국어로 절규할 때, 에르베 페조디에가 즉석에서 불어로 동시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프랑스 현지 관객들로부터 쉴 새 없는 추임새와 눈물을 자아낸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번역을 통해 판소리가 이국의 언어로도 살아 숨 쉬는 장면이었다.

3단계 공정 거쳐 오늘의 언어로…번역은 또 다른 창작


현대의 판소리 번역은 ‘무한 진화’를 거듭한다. 사설의 직역을 넘어 소리의 음악적 가락과 연희적 호흡을 다른 나라의 언어 구조 안에서 조율하는 ‘제2의 공동 창작’ 경지까지 올라왔다. 올가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와 판소리 ‘긴긴밤’을 바이링구얼(이중언어) 판소리로 선보이는 입과손스튜디오의 번역 과정은 상당히 정밀하다.

입과손스튜디오는 창작 작업을 할 때 3단계 번역 작업을 거친다. 이 연출가는 “전통 판소리와 창작이 섞인 작품들은 번역 작업에 더 공을 들인다”고 말했다.

오는 9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선보일 바이링구얼 판소리 ‘긴긴밤’ 연습 장면 [입과손스튜디오 제공]


창작진은 고어를 오늘의 한국어로 다시 쓴다. 그런 다음 번역가가 영어와 프랑스어로 옮기고, 마지막에 번역문을 놓고 다시 소리꾼이 말의 실제로 말해본다. 그래야 말의 리듬, 호흡, 뉘앙스의 디테일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출가는 “판소리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은 늘 쉽지 않다. ‘구구선 사람들’이나 ‘긴긴밤’처럼 말맛과 리듬, 소리꾼의 호흡이 절대적인 작품은 더욱 그렇다”며 “번역이 원문과 완전히 같아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작품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그리고 관객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를 다른 언어 안에서 새롭게 구성하려 한다”고 했다.

이 과정은 바이링구얼 판소리인 ‘긴긴밤’으로도 이식됐다. 번역을 맡은 이경후는 “‘원작 소설도, 대본도 겉보기엔 평이한 언어로 쓰였는데 문장은 단순하지만 힘이 실리는 단어들이 참 많다”며 “그냥 흘려보내기보다 꾹꾹 눌러서 읽게 되는 언어가 많아 정서적 무게감을 영어 단어 속에 충실히 담으려 했다”고 말했다.

최근 창작 판소리 현장에선 새로운 역할도 생겨났다. ‘판소리터그(Pansori-turg)’다. 연극의 드라마터그처럼 작품을 분석하되, 번역된 외국어가 판소리 장단 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언어와 음악을 함께 조율하는 역할이다.

정교한 번역 작업은 해외 진출의 직접적 돌파구가 되기도 한다. 아르코예술기록원에서 아리랑 TV와 협업해 태어난 ‘구구선 사람들’의 영문 자막 영상은 해외 극장 프로그래머에게 선보일 수 있는 징검다리였다. 실제로 기록원 관계자는 “자막 영상을 통해 입과손스튜디오에 프랑스와 벨기에 투어 문의가 많이 들어왔다”고 귀띔했다. 이 연출가는 “영문 자막이 삽입된 공연 영상을 해외 관계자들에게 깊이 있게 소개할 수 있었다”고 했다.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선보인 바이링구얼 판소리 ‘긴긴밤’ 쇼케이스 [입과손스튜디오 제공]


그럼에도 판소리는 번역하기가 참 어려운 공연예술 중 하나다.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말맛, 장단과 추임새, 의성어와 의태어의 뉘앙스를 온전히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계 관객은 울고 웃고 추임새를 따라 한다.

이 연출가는 “판소리 번역의 목표는 한국어를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관객 역시 우리와 비슷한 감정과 관계를 동일하게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판소리 번역은 결국 언어의 장벽을 지우고, 장르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정교한 기초 인프라다. 공연계 관계자는 “판소리가 가진 우리말의 말맛과 언어의 아름다움, 뉘앙스를 살릴 수 없지만, 번역 과정을 거쳐 판소리가 세계인과 완전히 대등한 눈높이에서 호흡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며 “번역과 전문 매개자들의 존재는 판소리를 한국의 과거 유산에 묶어두지 않고, 전 세계 관객이 동시대적으로 누릴 수 있는 보편 예술로 만드는 열쇠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