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도 ‘공시의 시대’…“기업 안전역량 시장에 증명해야”

헤럴드·대륙아주 ‘노동·안전법제포럼’
김경근 법무법인 대륙아주 중대재해대응그룹 팀장
내달 1일 안전보건 공시 시행
관리체계·재해·투자 내역 공개
ESG·금융·공공조달에 활용
“안전보건 공시, 기업 안전 역량 증명하는 자산”


김경근 법무법인 대륙아주 파트너변호사 겸 중대재해대응그룹 팀장이 15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헤럴드경제·법무법인 대륙아주 공동주최 ‘중대재해예방 노동안전법제포럼’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헤럴드경제=정경수 기자] 산업재해에도 ‘공시의 시대’가 열린다. 기업은 이제 사고가 난 뒤 책임과 조치 내용만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평소 어떤 안전관리체계를 갖추고 얼마나 투자했는지 시장에 공개해야 한다. 안전이 비용과 규제의 영역을 넘어 시장의 평가를 받는 경영자산으로 바뀌는 셈이다.

김경근 법무법인 대륙아주 파트너변호사 겸 중대재해대응그룹 팀장은 15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헤럴드경제·법무법인 대륙아주 공동주최 ‘중대재해예방 노동안전법제포럼’에서 “안전보건 현황 공시는 규제 부담이 아니라 기업의 안전 역량을 시장에 증명하는 자산”이라며 “처벌 회피를 위한 방어가 아니라 안전을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달 1일부터 시행되는 안전보건현황 공시 대상은 상시근로자 500명 이상을 사용하는 사업주와 공공기관, 지방공사·지방공단 등이다. 기업이 어떤 안전조직을 갖추고 있는지, 예산은 얼마나 투입했는지, 위험성 평가는 제대로 작동하는지, 재발방지 대책을 실제로 이행했는지 등이 공시 대상이 된다. 공시하지 않으면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다만 구체적인 공시 방법과 절차를 담은 고용노동부령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그는 “기업은 지금부터 법에 규정된 여섯 개 항목에 대한 자료를 사전에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경근 법무법인 대륙아주 파트너변호사 겸 중대재해대응그룹 팀장이 15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헤럴드경제·법무법인 대륙아주 공동주최 ‘중대재해예방 노동안전법제포럼’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사고 발생 공시서 ‘평소 안전역량’ 공개로


새 제도는 사고 이후 사실과 조치 내용을 알리는 기존 상장사 공시와 성격이 다르다. 상장사는 중대재해 발생 시 관할 노동관서와 거래소에 즉시 보고·공시하고, 사업·반기보고서에도 관련 사실과 대응조치를 기재한다. 반면 안전보건 현황 공시는 사고 여부와 관계없이 기업의 안전관리체계와 활동·투자·재발방지 노력을 정기적으로 공개한다.

김 변호사는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투자자와 소비자 등 외부 이해관계자에게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거래소 공시와 사업보고서, 안전보건 공시를 따로 관리해서는 안 된다는 조언도 내놨다. 동일한 사고와 투자 실적의 수치나 설명이 공시마다 달라지면 신뢰성과 법적 대응력이 떨어질 수 있어서다. 김 변호사는 “하나의 안전보건 데이터 관리체계를 구축해 동일한 기초자료를 일관되게 반영하고 정확성과 정합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전보건 공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와 자본조달뿐 아니라 대출·보증 심사, 금리·보험료 산정에도 활용될 수 있다. 공공조달에서는 산재 예방활동 실적에 가점이,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는 감점이 적용될 수 있으며, 원청의 협력사 평가와 계약 체결 근거로도 쓰일 수 있다.

아울러 공시 항목을 내부 경영지표로 활용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안전조직·인력과 투자 규모, 재해 현황, 재발방지 대책 이행률 등을 핵심성과지표(KPI)로 삼아 이사회 점검과 경영진 보상에 연계하고, 자회사·협력사 사고까지 임원 평가에 반영하는 방식이다.

김경근 법무법인 대륙아주 파트너변호사 겸 중대재해대응그룹 팀장이 15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헤럴드경제·법무법인 대륙아주 공동주최 ‘중대재해예방 노동안전법제포럼’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공시 자료, 사고 땐 ‘의무 이행’ 입증자료


공시 자료는 기업의 안전 수준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중대재해 수사·재판에서 경영책임자의 의무 이행을 입증하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김 변호사는 “안전보건 공시는 자본시장의 신뢰를 확보하는 동시에 경영책임자가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는 입증자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위험성평가 체계와 근로자 의견 반영, 대표이사 보고·승인을 거친 안전예산 집행, 재발방지 대책 이행 과정을 문서로 남겨야 한다. 법원은 이 같은 조치와 함께 중대재해 전 발생한 ‘아차사고’ 이후의 개선 노력도 살핀다.

김 변호사는 안전보건 공시 항목과 중대재해처벌법상 의무가 겹치는 영역에 우선 투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위험성 평가체계, 대표이사 보고·승인을 거쳐 문서화된 안전예산 집행 내역, 재발방지 대책 이행체계가 대표적인 영역이다.

김경근 법무법인 대륙아주 파트너변호사 겸 중대재해대응그룹 팀장이 15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헤럴드경제·법무법인 대륙아주 공동주최 ‘중대재해예방 노동안전법제포럼’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CSO 있어도 CEO 면책 자동으로 안 돼”


김 변호사는 최근 중대재해처벌법 판결 동향도 소개했다. 지금까지 관련 판결은 약 110건으로, 이 가운데 무죄는 10건가량이다. 실형과 벌금형 사례도 나오면서 경영책임자 판단과 안전보건 확보 의무 위반, 사고와의 인과관계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특히 최고안전책임자(CSO)를 선임했다고 해서 대표이사(CEO)가 자동으로 면책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법원은 직함보다 실제 권한과 책임,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를 살핀다. CSO가 안전보건 예산·인력·조직의 최종 결정권을 행사했다면 CEO 책임이 부정될 여지가 있지만, CEO가 주요 사안을 최종 결정했다면 면책되기 어렵다.

김 변호사는 “CSO가 있는 경우 CEO가 면책되는지에 관한 대법원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며 “현 단계에서는 CEO가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직접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말했다.

다만 모든 사고의 책임이 곧바로 경영책임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통상적으로 예견하기 어려운 이례적 사고라면 안전보건 확보 의무 위반과 사고 사이의 인과관계가 부정될 수 있다. 그는 “사고 예방이 가장 중요하지만, 사고 이후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다시 구축하는 노력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안전보건 공시는 실무자에게 부담이 될 수 있지만, 기업의 안전 역량을 시장에 증명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며 “근로자의 근무 의욕과 생산성, 자본시장의 신뢰를 높이는 출발점”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