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의 파운드리화’ 비전 가속화
성과급 격차에 흔들리는 삼성 비메모리에 여파
중소 팹리스들 “기껏 3년 길러 일 좀 시킬 만하면 데려간다”
인재 양성 보상하는 ‘독일식 분담 모델’ 도입 필요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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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슨 황 CEO는 올해 대만 컴퓨텍스에서 SK하이닉스 부스를 찾아 HBM4E(7세대 고대역폭메모리) 웨이퍼와 소캠2(SOCAMM2) 등에 서명과 친필 사인을 남겼다. 웨이퍼에는 ‘더 만들어달라(Please Make More)’는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SK하이닉스 제공] |
[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 “대기업의 대규모 채용이 팹리스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팹리스 업계 관계자)
안녕하세요. 오늘은 SK하이닉스의 역대급 신입·경력 채용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지난달 SK하이닉스는 “앞으로 모든 채용에서 학력 제한을 전면 폐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AI(인공지능) 시대에 맞춰 학위나 정형화된 스펙이 아니라 실제 직무 역량을 기준으로 인재를 뽑겠다는 취지입니다.
하지만 이번 신입·경력 채용이 업계를 바짝 긴장하게 한 이유는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 일단 규모입니다. 신입 수시 채용으로는 이례적으로 주요 직무에서 ‘세 자릿수’ 단위의 대규모 선발을 진행합니다. 이번 채용으로 입사할 엔지니어만 1000명이 넘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직무입니다. 특히 경력 채용을 주목할 만한데요, 이번 채용에서 경력으로 뽑는 직무는 54개로, 최근 채용 범위가 가장 넓었던 2월(34개) 직무보다도 더 많은 범위 채용이 이뤄집니다. 특히 테크 R&D(연구개발) 직무만 31개로 세분화됐습니다.
이번 테크 R&D 직무를 뜯어보면 SK하이닉스가 나아가려는 비전과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인재를 뽑게 됐는지 감이 잡히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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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하이닉스의 6월 월간 경력채용 직무설명서 갈무리. [SK하이닉스 제공] |
테크 R&D 직무를 살펴보면 특히 HBM(고대역폭메모리) 관력 직무가 세분화된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HBM 회로설계, HBM 디지털 디자인, 프론트엔드, 백엔드, SoC(시스템온칩) 설계, 검증, HBM 파운드리 PI 등이 포함됐습니다. 시스템 반도체 설계 인력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인력을 적극 채용하겠다는 뜻입니다.
눈여겨 볼 지점은 HBM 파운드리 PI(Process Integration, 공정 통합)입니다. SK하이닉스는 이 직무를 뽑으면서 ‘파운드리 공정 또는 팹리스 환경에서 PDK(Process Design Kit, 공정 설계 키트), DFM(Design for Manufacturability, 제조 가능성 설계), 디자인 룰 관련 실무 경험 보유자’를 요구하며 대놓고 파운드리를 경험해 본 인력을 뽑겠다고 밝혔습니다. HBM 디지털 디자인(프론트엔드) 직무에서는 ‘TSMC 3나노 과제 구현 경험’ 등을 언급하기도 했죠.
시스템 반도체 설계 직무도 눈에 띕니다. SK하이닉스는 이번 채용에서 ▷선행 시스템 아키텍처 ▷HBM 디지털 디자인(SoC 디자인) 등의 직무를 뽑겠다고 밝혔습니다. 단순히 HBM과 같은 칩을 만드는데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GPU(그래픽처리장치) 등 컴퓨터 아키텍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인재를 뽑아 부품 공급자에서 시스템을 설계하는 주인공이 되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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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SK하이닉스 안현 개발총괄 사장(CDO)이 ‘TSMC 테크놀로지 심포지엄 2026’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안 사장은 “앞으로는 AI 가속기를 위해 ‘표준형 HBM’을 공급하는 데서 더 나아가 고객의 특정 니즈에 맞춘 ‘커스텀 HBM’을 제공하고, 이러한 기조를 D램과 낸드플래시를 아우르는 전 설루션으로 확대해 AI 시스템의 성능과 효율을 높여 나가겠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 제공] |
위 직무를 경력으로 모집한다는 건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HBM에서 베이스 다이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HBM 적층 구조의 맨 아랫단에 위치하는 베이스 다이는 층층히 쌓인 D램을 통제하고, 두뇌역할을 하는 GPU(그래픽처리장치)와 D램 사이에서 신호를 중재하는 ‘컨트롤 허브’ 역할을 합니다.
최근 HBM4 시장에서는 제품의 최종 등급(Bin)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베이스 다이의 완성도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자체 파운드리 4나노 미세 공정을 활용해 HBM4 베이스다이를 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컨트롤러 성능과 전력 효율을 극대화해 결과적으로 최고 수준의 수율과 안정성을 확보해 고객사인 엔비디아로부터 가장 등급이 높은 ‘최고 등급(Bin 1)’ 제품으로 선별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HBM3E까지는 자체 공정으로 베이스다이를 만들었으나, HBM4부터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TSMC의 12나노를 활용한 베이스 다이를 활용했습니다. 다만 경쟁사보다는 HBM4 양산 출하 일정이 늦어졌는데요. 업계에 따르면 최근에서야 HBM4 12단 제품 양산 출하를 시작했고, 오는 9월쯤 램프업(양산 물량 확대)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베이스다이를 설계하는 TSMC와 더욱 긴밀한 협의를 위해 시스템 반도체 설계 및 파운드리 인력까지 채용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SK하이닉스가 나아갈 방향을 엿볼 수 있다는 겁니다.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하이닉스가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상장 이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SK하이닉스가 그리는 비전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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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3일 경기 이천시 SKMS 연구소에서 열린 ‘2026 뉴 이천포럼’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SK그룹 제공] |
최 회장은 “‘반도체 칩을 가져다 쓰라’는 식의 단순 범용품(Commodity) 판매 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며 “각 고객의 서비스 특성과 추론 환경에 맞춰 맞춤형 메모리 스택과 최적화된 소프트웨어 설루션을 결합해 일종의 ‘패키지 서비스’ 형태로 납품하는 비즈니스로 진화할 것이며, 우리가 이 혁신을 주도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SK하이닉스는 자회사인 솔리다임을 개편해 미국에 AI컴퍼니를 세우기도 했는데요, 최 회장은 최근 특파원 간담회에서 “메모리 엔지니어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AI 전문가들이 훨씬 많이 필요해졌다”며 “고객이나 파트너와 공동 연구개발을 하거나 새로운 비즈니스를 함께 추진하는 데 AI 컴퍼니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단순한 칩 공급자를 넘어 AI를 최선단에서 개발하고 있는 빅테크 입장이 돼서 직접 해결방안을 제시해주는, ‘풀 스택 AI 메모리 크리에이터’로서 비전을 한 단계 확장했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는 앞으로 고객의 AI 칩구조, 워크로드, 전력·열 설계요구에 맞춰 베이스다이와 패키징 구조 등을 최적화하는 c(Custom·맞춤형)HBM에 중심을 둘 것으로 보입니다. ‘메모리의 파운드리화’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죠.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베이스다이를 설계할 엔지니어가 필요하고 갈수록 맞춤형 메모리가 중요해지니 설계 인력과 파운드리 인력을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며 “또 최근 패키징도 중요해지다보니 설계단계에서부터 패키징을 고려해야 하고, 발열과 대역폭을 제어하는 역할을 베이스다이가 해내는 만큼 해당 인력을 더 뽑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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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전자 [연합] |
이번 ‘블랙홀’ 채용으로 반도체 업계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6월 말이라는 채용 시기도 묘하죠. 경쟁사의 비메모리 부서(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하는 시스템LSI 부서와 이의 공정을 담당하는 파운드리 사업부)는 메모리 사업부에 비해 낮은 성과급으로 내부 불만이 상당한 상황입니다.
실제로 HBM을 만드는데도 파운드리 사업부(베이스다이 설계 및 제조)와 협업이 필수입니다. 경쟁사가 강조하는 종합반도체회사(IDM)로 시너지를 발휘하려면 당장 적자인 파운드리도, 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하는 시스템LSI 부서도 없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성과급 격차가 약 3배 가량(메모리부서는 1인당 6억원, 비메모리부서는 1인당 2억원 가량) 벌어지면서 비메모리 부서 사이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을 심각하게 느끼는 상황입니다.
이런 배경 탓에 이번 SK하이닉스의 채용 공고로 경쟁사는 더 술렁였다고 합니다. 비메모리 부서에 근무하는 A씨는 “최근 SK하이닉스 서류에 누가 붙었나와 같은 얘기를 자주한다”며 “‘이천(SK하이닉스 본사)에서 보자’는 농담도 나눌 정도”라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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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는 지난 6월 30일까지 조합원을 대상으로 이직 인식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 결과 3명 중 1명이 이직을 고려한다고 밝혔다. [초기업노조 제공] |
삼성전자의 과반 노조인 초기업노조 삼성전자 지부는 SK하이닉스의 신입 채용 공고 시기에 맞춰 ‘조합원 이직 인식 설문조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경쟁사 신입 채용에 지원할 계획이 있냐’고 노골적으로 물어본 것이죠. 노조는 이번 조사 결과를 2027년 임금·단체협약 교섭 과정에서 활용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설문조사 결과 3명 중 1명이 이직을 고려한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중소 팹리스 기업에서 벌어집니다. 대기업 채용이 마치 블랙홀처럼 공들여 키운 인재를 모두 흡수해버린다는 겁니다. 한국 1세대 시스템 반도체 팹리스 기업인 네오와인의 이효승 대표는 자신의 SNS(소셜미디어)에 ‘채용은 미친짓’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현실에 대해 토로했습니다.
이 대표는 “요즘 중소 팹리스 대표들이 모이면 한숨이 같다”며 ‘두 달 사이 네 명이 대기업으로 갔다’, ‘지금까지 키워서 보낸 사람이 열 명이 넘는다’, ‘기껏 3년 길러 일 좀 시킬 만하면 데려간다’는 토로가 많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중소기업이 3년 동안 1인당 수억원을 들여 길러낸 엔지니어를 일할 만해지면 대기업이 데려간다”며 “진짜 문제는 빼가기가 아니라 구조다. 한때 신입을 수천 명씩 길러 사회로 내보내던 대기업이 임금 격차가 벌어지자 경력 채용 비중을 크게 늘리며 다 자란 인재를 빨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다. 양성 비용은 여력 없는 중소가 떠안고, 그 과실은 여력 있는 대기업으로 흘러간다”고 일갈했습니다.
본지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 “내 사람이 안 되니 신입 뽑기를 점점 꺼리고 있다. AI가 있던 사람을 내보내는 게 아니라 채용을 아예 안하게 되는 것”이라며 “오죽하면 어떤 팹리스 대표님들은 인재 유출을 우려해 예술대 출신을 뽑기도 한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해결방법은 없을까요. 완벽하진 않겠지만 독일의 사례가 있습니다. 기업이 훈련 수당을 주고 정부가 직업학교를 책임지는 분담 구조입니다. 중요한 건 ‘교육한 주체’에게 ‘기른 값이 돌아오도록’ 하는 구조입니다.
이 대표는 “인재를 양성한 실적에 비례해 중소기업에게 세액공제나 인재 양성 기금처럼 보상을 한다면, 중소기업이 인재를 길러내는데 망설이지 않게 될 것”이라며 “청년 양성은 한 기업의 손익이 아니라 국가적 과제라는 점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