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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식 전 병무청장·전 해군작전사령관 |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촉발된 미 군함 건조 논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 후속 협의로 이어졌다. 이는 단순한 조선 협력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해군력 보강과 조선산업 재건, 그리고 한국 조선업의 전략적 가치가 한 지점에서 만났다는 뜻이다. 여기에 한·미 조선협력센터 개소가 예정되면서 마스가(MASGA) 구상도 선언을 넘어 실행 단계로 들어가고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당장의 수주 가능성보다 이 문제가 한·미 정상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논의될 만큼 전략적 무게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대를 앞세우기에는 아직 이르다. 미 국방부와 해군이 한국 조선업계에 보낸 RFI(정보요청)는 계약이 아니다. 발주를 확정하는 절차가 아니라 전투함과 급유함의 설계·건조 역량을 확인하려는 사전 조사다. 다만 이번 RFI가 전투함과 급유함을 함께 다루었다는 점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정상 간 논의가 정치적 신호라면, RFI는 이를 실무 차원에서 구체화하는 신호다. 미국이 한국 조선업을 미 해군 전력 건설의 현실적 선택지로 공식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해서 전투함 해외건조가 곧바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군함은 단순한 상선과 다르다.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법, 의회, 보안, 전투체계, 공급망, 미국 내 일자리 문제가 함께 걸려 있다. 미국 연방법은 미군용 선박과 선체·상부구조의 주요 구성품을 외국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른바 미 연방법전 제10편 제8679조(10 U.S.C. § 8679)의 장벽이다. 대통령이 국가안보상 예외를 인정하더라도 의회 통보와 30일 대기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정상 간 논의와 RFI가 있었다고 해서 한국 조선소가 곧바로 미 해군 전투함을 건조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바로 그 점에서 미 상원 군사위원회의 2027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 논의가 중요하다. 미국 조선 및 해양산업에 대한 자본 투자를 조건으로, 동맹국 조선소에서 벌크 연료선과 전략수송선 같은 비전투 보조함을 제한적으로 조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작은 변화가 아니다. 이는 전투함 해외건조의 전면 허용이 아니라, 미국 국내법의 장벽을 우회하지 않으면서 동맹국 조선역량을 비전투 보조함에서 먼저 검증해보겠다는 제도적 실험에 가깝다. 다시 말해 보조함은 전투함의 대체물이 아니라 전투함 참여 논의로 가기 위한 중간다리다.
이 대목에서 보조함의 전략적 의미가 분명해진다. 전투함으로 가는 길은 전투함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미 의회의 벽을 넘으려면 먼저 비전투 보조함에서 동맹 조선의 효용을 입증해야 한다. 벌크 연료선, 전략수송선, 군수지원함은 단순한 수주 대상이 아니다. 납기와 품질, 비용과 보안, 공급망 현지화 능력을 검증하는 시험대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 장차 전투함 건조 참여 논의도 정치적·제도적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한국이 미 의회를 설득하는 방식도 달라야 한다. ‘한국에서 미국 군함을 지어주겠다’는 논리는 오히려 반발을 부를 수 있다. 미 의회가 듣고자 하는 것은 외국 조선소의 우수성보다 미국 조선산업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느냐는 해법이다. 따라서 한국의 논리는 한국 조선업의 기술과 속도로 미국 조선산업을 되살리고, 미국 내 일자리와 공급망을 확충하며, 미 해군의 전력 공백을 줄이겠다는 방향이어야 한다. 수주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미국의 조선기반 재건에 동맹국으로 참여하겠다는 논리다.
한화가 인수한 필리조선소는 그 점에서 가장 가시적인 플랫폼이다. 이는 특정 기업의 해외 자산을 넘어, 한국 조선업이 미국 조선산업 재건에 실제로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다. 한화는 필리조선소에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추진하며 추가 도크와 안벽, 블록 조립시설 확충을 통해 생산능력을 크게 높이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그 방향도 단순한 상선 건조에 머물지 않는다.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해군 모듈·블록, 장기적으로는 해군 함정 생산까지 염두에 둔 미국 내 조선기반 확장이다. 여기에 미 해군 차세대 군수지원함(NGLS) 또는 유조함(T-AOL) 사업 참여까지 더해지면, 필리조선소는 단순한 보유 자산이 아니라 미 해군 조달 생태계 안에서 신뢰를 쌓아가는 실험장이 된다.
물론 필리조선소가 곧바로 미 해군 전투함 건조의 해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투함 건조를 위해서는 시설 확충, 보안체계, 전투체계 통합 능력, 미 해군 품질관리 기준, 숙련인력 확보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리조선소의 의미는 더 크다. 단기적으로는 유지·보수·정비(MRO), 보조함, 모듈 생산, 공동설계에서 신뢰를 쌓고, 장기적으로는 전투함 참여 논의로 확장할 수 있는 미국 내 기반을 축적하는 경로이기 때문이다.
이 지렛대는 필리조선소에만 머물지 않는다. HD현대도 미국 방산 조선업체 HII(Huntington Ingalls Industries)를 비롯한 현지 조선업체들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이 미국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건조 능력이 아니다. 미국 내 조선소 현대화, 블록·모듈 공급, 공동설계, MRO, 인력훈련, 공급망 재건을 묶은 조선산업 재건 패키지다. 이것이 있어야 미 의회도 동맹국 조선역량 활용을 미국 일자리와 산업기반 강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
결국 논의의 핵심은 기회를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전략적 방향을 놓치지 않는데 있다. 미 군함 건조 논의는 한국 조선업에 분명한 기회다. 그러나 기회는 곧 수주가 아니다. 보조함에서 신뢰를 쌓고, 미국 내 조선기반을 함께 키우며, 의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동맹형 생산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목표는 미 군함을 대신 지어주는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 해군력과 미국 조선산업을 함께 되살리는 조선동맹의 핵심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전투함으로 가는 길은 보조함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길을 여는 가장 구체적인 지렛대는 필리조선소를 비롯한 미국 내 조선기반 재건에서 나온다.
이기식 전 병무청장·전 해군작전사령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