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보다 숨막히는 ‘쪽방’…낡은 선풍기 하나로 버틴다

도심 곳곳…폭염이 두려운 사람들
월세 20만원 고시원, 에어컨 엄두도 못내
집보다 시원한 지하철·무료급식소로 대피
쪽방촌 인근 하루에도 온열질환자 수 명씩
열기 피할 곳 없는 전통시장도 ‘사각지대’


전국이 찜통 더위에 허덕이는 가운데, 취약계층에게 폭염은 더 이상 맞설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13일 오전 8시께 서울 종로구 원각사 무료급식소에서 아침 주먹밥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시민들의 모습. 김서현 수습기자


“아침인데 왜 이렇게 덥지?”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특보가 내려진 13일 오전 7시. 서울 종로구 원각사 무료 급식소 앞은 아침 주먹밥 배식까지 1시간가량 남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50여명이 줄을 서 있었다.

신문지와 부채를 번갈아 흔드는 노인들, 휴대용 선풍기를 얼굴에 갖다 댄 사람들, 상자를 깔고 바닥에 누운 사람들까지 더위와 싸우며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폭염이 이어질수록 이들에게 무료급식소는 한 끼를 해결하는 곳을 넘어 잠시라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되고 있었다.

이날 서울은 낮 최고기온 34도, 최고 체감온도는 35도 안팎까지 치솟았다. 기상청은 오후 2시가 되자 서울 동북권에 폭염경보를 발효했다. 서울 동남권과 서남권에도 폭염경보가 유지됐으며 이날 서울에서만 온열질환자 9명이 발생했다.

이번 폭염은 상층의 티베트고기압과 중·하층의 북태평양고기압이 동시에 한반도를 덮는 ‘이중 열돔’ 현상이 원인으로 꼽힌다. 두 고기압이 뜨거운 공기를 가둔 데다 남쪽의 고온다습한 공기까지 유입되면서 밤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가 이어졌다.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에 서울 종로구 창신동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최종구(68) 씨는 새벽 첫차를 타고 무료 급식소를 찾았다. 최씨는 “월세 20만원짜리 방이라 에어컨은 꿈도 못 꾼다. 선풍기도 제대로 안 돌아가 어젯밤엔 잠을 거의 못 잤다”고 말했다.

남양주에서 왔다는 김인양(70) 씨도 “집보다 지하철이 더 시원하다”며 “여기 오면 밥도 먹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할 수 있어 자주 온다”고 했다. 폭염은 사람들의 신경도 날카롭게 만들었다. 배식을 앞두고 선 줄에서는 “날도 더운데 왜 시비냐”며 언성이 높아졌고 자원봉사자가 “그러면 밥 못 받아간다”고 말리면서 상황은 겨우 정리됐다.

원각사 무료 급식소는 하루 250~300명, 많을 때는 600명까지 음식을 제공한다. 내부에는 에어컨 두 대와 대형 선풍기 여섯 대가 돌아가지만 밖에서는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 점심시간이 되자 줄은 탑골공원 입구까지 200m 가깝게 형성됐다. 무료 급식소에서 만난 봉광근(87) 씨는 “방 안에만 있으면 숨이 막혀 하루에 한 번은 꼭 나온다”며 “밥도 먹고 사람도 만나고 잠깐이라도 더위를 잊을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고 말했다.

7년째 급식소 봉사 중인 최모(71) 씨는 “여름에는 고시원이 더 덥다”며 “안이 시원하다 보니 일부러 일찍 오는 사람들도 있고 식사를 마친 뒤 조금 더 머물려는 사람도 많다”고 설명했다.

쪽방촌 좁은 방에 놓여진 낡은 선풍기와 곰팡이 핀 이부자리. 김서현 수습기자


▶“방 안이 더 덥다”…선풍기 하나로 버티는 쪽방촌=이날 무료 급식소를 나선 사람들의 발길은 대부분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으로 이어졌다. 골목에 들어서자 베개 하나가 길가에 놓여 있었다. 한 주민은 “방이 너무 더워 밖에서 자는 사람이 매일 꺼내놓는 베개”라며 “비를 맞아 말리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에어컨 없이 10㎡ 남짓한 방에서 생활하는 이도학(65) 씨는 “선풍기 하나로 버티는 수밖에 없다”며 “더우면 하루에도 대여섯 번 샤워를 하지만 공용 샤워실도 줄을 서야 한다”고 말했다.

양길숙(72) 씨는 “방 안이 바깥보다 더 덥다”며 “창문도 없어 밤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에어컨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큰 선풍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한 주민은 몸이 불편한 이웃들을 위해 생수를 받아와 냉동실에 얼려 나눠주고 있었다. 그는 “얼음이라도 끌어안고 있어야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는 최근 모터 고장으로 멈춘 쿨링포그를 수리 중이라고 설명했다. 무더위쉼터도 운영하고 있지만 일부 주민들은 주민등록이 없거나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이용하지 못한다고 호소했다.

인근 종로119안전센터 관계자는 “지난 주말부터 돈의동 쪽방촌 인근에서 사람이 쓰러졌다는 신고가 5건 정도 있었다”며 “신고 당시에는 단순히 쓰러짐으로 접수되기 때문에 현장에서 온열질환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가운데 일부는 더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도심 곳곳 냉방 사각지대…“여름은 버티는 수밖에”=폭염은 무료 급식소와 쪽방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역 지하 화장실 문을 열자 후끈한 공기가 먼저 밀려왔다. 밀폐된 공간에는 가정용 선풍기 두 대와 소형 냉풍기 한 대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더위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약 40년째 이곳에서 화실을 운영하는 정재순(63) 씨는 “여름이면 수강생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며 “실외기를 둘 곳이 없어 에어컨도 설치하지 못한다. 매년 여름이 오면 어떻게 버틸지만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13일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올해 기준 서울 지하철 1~8호선 281개 역사 가운데 51곳(지상 25곳·지하 26곳)은 비 냉방 역사다. 대부분 구조적으로 냉방설비 설치가 어렵거나 대규모 개량 공사가 필요한 곳이다. 역사 내 상가 역시 실외기 설치 공간 부족과 비용 부담 등으로 냉방시설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로 이날 헤럴드경제 취재진이 찾은 서울 서부권의 양천구청·대림·구로디지털단지역도 사정은 비슷했다. 떡집과 호두과자 매장은 가마솥과 조리 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인해 매장 안이 달궈졌다. 역사 내 상인들은 이동식 냉방기·선풍기·얼음물에 의지한 채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난다”, “여름은 버티는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무더위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14일에는 전국에 비가 내리겠지만 무더위는 계속될 전망이다. 비가 그친 뒤 다시 기온이 오르면서 대부분 지역에서 체감온도 33도 안팎의 찜통더위가 이어질 것으로 예보됐다.

정주원·전새날·김서현·이준영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