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밑은 아찔, 눈앞은 감탄…사량도가 숨겨둔 천혜의 비경 [트래블ON]

구렁이 설화에서 유래한 섬 이름
한려수도 쪽빛 비경에 가슴 뻥 뚫려
거친 암릉길·가파른 철제계단 ‘전율’
압도적인 옥녀봉의 파노라마 전망


사량도 옥녀봉에서 본 사량대교와 섬 전경 [김명상 기자]


[헤럴드경제=김명상 기자] ‘섬’이라 하면 흔히 파도 소리와 나른한 여유를 떠올린다. 하지만 경남 통영시 사량도는 이런 통념을 단숨에 뒤집는다.

능선을 따라 늘어선 기암괴석의 행렬은 설악산 공룡능선을 축소한 듯 험하고 거칠다. 바위산의 위압감에 넋을 놓기도 잠시,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펼쳐지는 한려수도의 쪽빛 비경이 발길을 붙잡는다. 산과 바다가 한 몸처럼 엮여 눈을 홀리는 이곳의 마력에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구렁이 전설 위에 선 천혜의 절경


통영 가오치항과 금평항을 잇는 여객선 [김명상 기자]


사량도의 본래 이름은 ‘박도’였다. 윗섬은 상박도, 아랫섬은 하박도로 불렸다. 다만 두 섬 사이를 흐르는 해협의 모양이 가늘고 긴 뱀처럼 구불구불해 이 해협을 ‘사량(蛇梁)’이라 불렀고, 섬의 이름에 반영되며 지금의 사량도가 됐다. 또 다른 민간 설화에서는 섬의 옥녀봉에 살던 옥녀를 연모한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서려 있다고 전해진다. 그 영향으로 과거 섬 주민들은 마을이나 산길에서 구렁이나 뱀을 봐도 해치지 않고 영물로 대접하며 공존했다.

사량도를 찾는 이들의 목적은 대부분 하나, 빼어난 절경을 즐기는 산행이다.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웅장한 암릉을 벗 삼아 능선을 따라 오르면 한려수도의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우는 절경이 펼쳐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금평항 전경 [김명상 기자]


압도적인 시각적 전율을 느끼려면 옥녀봉으로 가야 한다. 통영 가오치항을 출발한 여객선이 사량도 윗섬의 관문인 금평항(사량도여객터미널)에 닿으면 산행은 곧바로 시작된다. 항구에서 사량초등학교 앞까지 걸어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직진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코스다.

좀 더 빠르게 오르고 싶어 왼쪽 옥동항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모사 꽃이 흐드러진 조용한 해안 길이 이어졌다. 20분쯤 걷자 옥녀봉으로 들어서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관음낙가사 옆 득국사로 향하는 방향을 가리키는데, 옥녀봉 정상으로 오르는 최단 코스 중 하나다. 거리가 짧은 만큼 경사가 가파르고 험난해, 이 길을 택하는 이는 많지 않다.

고난의 길, 마음이 좌우하다


옥녀봉으로 올라갈 수 있는 득국사 경내 [김명상 기자]


사찰 경내에서 올려다본 옥녀봉 바위는 까마득했다. 남들이 가는 길로 갈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오던 찰나 승복을 입은 득국사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주저하는 기자의 모습을 보곤 “내가 젊을 때는 여기서 옥녀봉까지 13분이면 뛰어 올라갔지”라며 혀를 끌끌 찼다. 많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스님은 ‘마음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가파른 길을 마주했을 때 힘드니까 못 가겠다고 생각하면 정말 못 가게 되는 법이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뀌는 거야. 잘 올라가 봐.” 스님의 담담한 음성은 거친 암릉을 앞둔 여행자에게 한 줄기 용기를 불어넣었다.

득국사의 돌탑 [김명상 기자]


초입의 돌탑을 지나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가파른 산길이 이어졌다. 경사가 심하고 미끄러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발목에 긴장감이 실렸다. 게다가 이곳은 평소 탐방객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길이라 풀과 가시덤불이 등산로를 가로막고 다리를 찔러댔다. 마치 들어오지 말라고 밀어내는 듯한 느낌에 자꾸 속도가 늦춰졌다. 다른 사람들이 다니는 평탄한 길로 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급기야 스님이 우리를 골탕 먹이려 이 코스를 알려준 게 아닐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등산 초반부터 가파른 경사를 마주해선지 가슴이 터질 듯했다. 등산 스틱에 의지해 겨우 한 발씩 내디뎠다. ‘차라리 돌아갈까’ 했지만, 넉넉하지 않은 배 시간 때문에 그 생각은 곧 사라졌다. 오기가 샘솟아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다 보니 의외의 만남도 가질 수 있었다. 작은 사슴이 앞쪽에서 부스럭대다가 사람을 보자마자 놀란 듯 후다닥 도망쳤다. 인적이 드문 곳이다 보니 야생 동물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가파른 지대를 지나자 마침내 금평항에서 올라오는 메인 등산로와 합류하는 옥녀봉 능선 삼거리에 도달했다. 지금까지와 달리 잘 정비된 길과 이정표를 마주하니 안도감과 함께 거의 다 왔다는 기쁨이 밀려왔다.

아찔한 경사, 서늘한 전율이 흐른다


옥녀봉으로 오르는 철제 계단길 [김명상 기자]


조금 더 나아가자 은색 철제 계단이 거대한 장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소문대로 아찔한 경사였다. 과거에는 암벽에 박힌 디귿 모양의 철 사다리와 밧줄을 잡고 오르는 코스였지만, 지금은 안전한 철제 구조물로 교체됐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경사가 무척 심해서 시각적 위압감이 대단하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계단 앞에 서는 순간 척추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흐를 법한 풍경이다. 은색 난간을 바투 잡고 한 칸 한 칸 발을 올리기 시작했다. 거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심장이 덜컥 주저앉는 전율이 온몸의 세포를 깨웠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사를 계속 오르다 나무 계단으로 바뀌는 곳을 지나면 마침내 사량도 옥녀봉 정상이 보인다. 정상석에 쓰인 이곳의 높이는 ‘해발 281m’. 힘들게 겨우겨우 올라왔는데 고작 300m도 안 올라간 셈이다.

대항 해수욕장 [김명상 기자]


허무한 기분도 잠시, 거친 돌탑과 정상석이 반겨주는 이곳에 서면 사람들이 왜 이곳의 바다를 ‘인생 전망’이라고 부르는지 온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 하나 없는 사방의 조망은 거대한 한려수도의 푸른 바다를 미니어처처럼 압축해 보여준다.

저 멀리 상도와 하도를 연결하는 사량대교의 위용이 수려하게 내려 보이고, 그 너머로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하도의 칠현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얀 포말을 그리며 평화롭게 움직이는 어선들과 섬 사이를 지나는 여객선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풍경화다.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은 “고생해서 올라올 만한 가치가 있네”라며 탄성을 내뱉는다. 카메라 프레임으로는 도저히 다 담기지 않는 대자연의 압도적인 풍경이다.

출렁다리 짜릿함 뒤에 찾아온 평화


사량도의 출렁다리와 바다가 어우러진 전경 [김명상 기자]


옥녀봉 정상의 감동을 뒤로하고 가마봉 방향으로 500m를 더 이동하면 사량도의 또 다른 명물, 출렁다리를 만난다. 인공 구조물이 깊은 산중에 설치되면 주변 경관을 해치기 십상이지만, 향봉과 연지봉을 잇는 쌍출렁다리는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각각 39m와 22m 길이로 구성된 두 개의 보도현수교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다리 위로 걸음을 옮기면 발밑의 아찔한 기암절벽이 수직으로 내려다보이고, 다리가 살짝 흔들릴 때마다 탐방객들의 비명이 터져 나와 긴장감을 더한다.

사량도 앞바다를 통과하는 배 [김명상 기자]


출렁다리를 건넌 후 아쉬움을 뒤로하고 원점으로 내려왔다. 올라왔던 득국사 방향이 아닌 금평항 방향으로 바로 내려가는 코스는 내리막길이 이어져 어렵지 않다. 금평항 주변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횟집, 고깃집, 중국집 등이 늘어서 있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 땀에 젖은 몸을 식히며 시원한 커피 한 잔과 달콤한 팥빙수를 먹는 이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하다.

당일치기라는 짧은 여정 속에서도 사량도는 짙은 잔상을 남긴다. 항구를 떠나는 여객선의 엔진 소리가 거칠다. 멀어져 가는 섬을 보니 힘든 기억은 벌써 희미해졌다. 발밑의 두려움을 극복한 이들에게 값진 풍경을 선물하는 사량도는 지금도 많은 등산객을 부르고 있다.

▶여행노트

가오치 여객선 터미널 전경 [김명상 기자]


사량도로 진입하는 항로는 여행 목적과 동선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출렁다리와 옥녀봉만 짧게 다녀오고 싶다면 통영 가오치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해 사량도 동남쪽 금평항으로 입도하는 것이 좋다. 가오치항~금평항 여객선은 평일 기준 2시간 간격으로 운항하며, 주말이나 하절기(3~11월)에는 방문객 증가에 따라 1시간 간격으로 예비선이 추가 운항한다. 편도 소요 시간은 약 40분이다. 배에서 내리면 별도의 대중교통 이용 없이 선착장 인근에서 곧바로 등산로로 진입할 수 있어 가볍게 다녀올 수 있다.

반면 지리망산부터 불모산, 가마봉, 옥녀봉까지 이어지는 종주 코스를 계획한다면 경남 고성군 하일면 용암포 선착장을 이용할 수도 있다. 용암포에서 풍양카페리를 타면 섬 북서쪽 내지항까지 편도 약 20분 만에 도착한다. 가오치항 배편은 ‘한국해운조합 여객선예매’ 공식 홈페이지에서, 용암포~내지항 노선은 ‘풍양카페리’ 공식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