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 100주년 ‘투란도트’ 다시 읽기
사랑 이야기 아닌 전쟁과 평화의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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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트 아바도 지휘자와 에바 프원카 [연합]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것은 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100년간 무수히 많은 재해석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반복됐던 ‘얼음공주의 마음을 정복하는 영웅’의 세계관은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올여름 찾아올 ‘투란도트’는 사랑 이야기라는 이면에 감춰졌던 전쟁과 폭력, 평화와 공존을 향한 서사로 다시 읽힌다. 푸치니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었지만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미완의 걸작’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쓰는 무대다.
예술의전당 오페라 ‘투란도트’(7월 22~26일)의 메가폰을 잡은 정선영 연출가는 최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 작품은 전쟁 종식 프로젝트”라고 단언했다.
이번 공연은 예술의전당이 올해로 3년째 이어오고 있는 대작 오페라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버전을 가져온 ‘노르마’, 창작 오페라 ‘물의 정령’에 이어 낙점된 ‘투란도트’는 한국인 연출가의 손끝에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다.
푸치니의 웅장한 음악을 진두지휘할 주인공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로베르토 아바도 음악감독이다. 앞서 ‘노르마’를 통해 한국 관객에게 벨칸토 오페라의 정수를 보여줬던 그가 국립심포니 취임 이후 처음으로 지휘하는 전막 오페라다. 무대에 오르는 성악가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해온 테너 백석종의 국내 첫 오페라 데뷔 무대이자, 라 스칼라의 주역 에바 플론카, 그리고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오페라 스타 서선영, 김영우, 황수미가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가 가진 건 토르소일 뿐이죠.”
로베르토 아바도 감독은 ‘투란도트’를 이렇게 표현했다. 푸치니는 이 오페라를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팔, 다리는 잘리고 몸통만 남은 조각상처럼 완벽한 전체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미완의 걸작’이라는 의미에서였다.
사실 ‘투란도트’는 아바도 감독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984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그가 처음으로 지휘했던 푸치니 오페라가 바로 ‘투란도트’라고 한다. 당시 공연은 소니 클래식을 통해 음반으로 남았다.
아바도 감독은 “결국 죽음이 푸치니의 작품을 이겨버린 셈”이라며 “‘투란도트’의 경험은 많지 않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음반을 다시 들어보니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푸치니는 ‘투란도트’를 류가 죽는 장면인 3막 1장까지 작곡한 뒤 세상을 떠났다. 이어지는 칼라프와 투란도트의 마지막 이중창과 오페라의 대미는 스케치만 남겨둔 상태였다. 이는 출판사의 의뢰로 프랑코 알파노가 완성했다. 초연 당시 지휘를 맡은 토스카니니는 그러나 “여기서 푸치니가 세상을 떠났다”며 “류가 죽는 장면까지만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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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트 아바도 지휘자와 정선영 연출가 [연합] |
미완의 유작을 올리는 아바도 감독은 “초연 100주년을 맞은 푸치니의 마지막 걸작을 작업하는 것은 특권”이라며 “여러 결말이 있지만 프랑크 알파노가 완성한 버전이 최선이라 생각한다”며 이번 작품의 방향성을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푸치니는 편지에서 오페라가 피아니시모로 끝날 것이라고 썼는데 우리가 가진 결말은 거대한 포르티시모(강하게)”라며 “이건 푸치니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일 겁니다.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 믿음”이라고 했다.
이 음악 위로 흐르는 이야기는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정선영 연출가는 “겉으로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 왕자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음악 속에는 전쟁을 향한 통탄과 평화를 갈망하는 인간의 기원이 담겼다”고 봤다.
이 프로덕션의 가장 큰 차별점은 작품의 뼈대인 ‘세 개의 수수께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데 있다. 첫 번째 수수께끼인 ‘희망’을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으로, 두 번째 수수께끼는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열정과 실천의 의지로 읽어낸다. 마지막 수수께끼인 ‘너를 불태우는 얼음’은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 폭력과 지배를 극복하고 평화와 공존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로 확장된다.
정 연출가는 특히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마지막 키스 신을 승리나 굴복으로 보지 않았다. 이는 패배함으로써 이기는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상대를 꺾으려 하지 않고 먼저 자신을 내어주는 투항의 순간, 철벽 같던 투란도트 역시 방어와 두려움을 내려놓게 된다는 것이다.
정 연출가는 “계속해서 이기려고만 하면 전쟁은 반복된다”라며 “하지만 먼저 지기 시작하면 모두가 이기는 길이 열린다. 그것이 곧 평화”라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백미는 오페라 내내 흐르는 중국풍의 선율이다. 아바도는 “푸치니가 중국 민요를 직접 차용한 선율은 단 8개뿐이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음악 역시 중국 음악처럼 들리도록 작곡했다”며 “그것이 푸치니의 천재성”이라며 감탄했다.
아바도가 상상하는 ‘투란도트’의 결말은 말러 교향곡 3번의 마지막 악장이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처럼 스스로를 내려놓으며 무(無)로 향하는 음악이었다. 아바도는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건 저의 개인적인 추측”이라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주어진 것대로 갈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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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악가 서선영이 1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도트’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성악가들이 바라본 투란도트 역시 기존과는 달랐다. 세계 주요 오페라극장에서 투란도트를 노래해 온 소프라노 에바 플론카는 작품의 기원이 12세기 페르시아 시인 니자미의 서사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투란도트가 “‘투란(Turan)의 딸(Turandokht)’이라는 페르시아계 이름을 가진 존재다. 지금의 이란에 가깝”라며 “괴물 같은 공주가 아니라 인간의 자아와 변화를 상징하는 철학적 존재”라고 해석했다.
“‘투란도트’는 인간이라기보다 알레고리입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칼라프의 여정(The Journey of Calaf)’이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칼라프의 정신적 성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에바 프원카)
프원카는 투란도트를 마주하는 관객들은 모두 칼라프라고 봤다. “어떻게 죽음을 초월할지, 생과 재생의 순환 속에서 계속 죽지 않는 법을 발견해 나가기 때문”이라는 프원카는 “목을 베는 행위 역시 영적인 텍스트에선 정체성을 잃는다는 뜻이다. 머리를 보고서야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정체성, 즉 에고를 내려놓아야 변용될 수 있다”고 봤다.
알파노의 결말에 대해서도 프원카는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칼라프와 투란도트가 키스하는 장면에선 음악적으로 끔찍한 공포가 표현되는데, 그것이 한 가지 만을 의미한다면 강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투란도트’는 17세기 유럽, 이탈리아 사람들이 원작을 훼손해 오해받는 이야기로 만들었지만 매우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며 “많은 프로덕션에서 , 투란(Turan)이라는 거대한 땅을 다스리던 이 강력한 여성을 이상한 존재, 괴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투란은 지금의 이란과 가까운 지역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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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악가 백석종 [연합] |
처음으로 투란도트 역에 도전하는 소프라노 서선영은 보다 따뜻하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캐릭터에 접근했다. 그간 가녀린 희생양인 ‘류’를 주로 노래해 온 그는 “투란도트는 왜 저렇게 소리만 지르는 여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며 “ 배역을 깊이 연구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투란도트는 사랑을 거부하는 차가운 여성이 아니라, 과거의 전쟁과 폭력이 남긴 트라우마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방어할 수밖에 없었던 상처 입은 인간”이라고 설명했다. 두려움 때문에 세상을 거부하고 밀어내던 한 인간이, 진정한 사랑을 통해 비로소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을 내려놓는 치유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신에 가까운 ‘영웅’적 인물로 그려진 주인공 칼라프는 세계 무대에서 ‘칼라프의 신성’으로 맹활약 중인 테너 백석종이 맡았다. 이번 공연은 고국에서의 첫 전막 오페라 데뷔 무대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등 내로라하는 무대를 밟았지만 그는 “부모님과 한국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것보다 더 특별하고 떨리는 무대는 없다”며 벅찬 소회를 밝혔다.
백석종은 칼라프를 자신의 ‘시그니처 역할’로 꼽으며 “내 목소리와 가장 잘 맞는 배역일 뿐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외치는 칼라프의 굳건한 성품이 실제 내 모습과도 닮아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독일 무대에서 오랫동안 감초 역할인 ‘핑·퐁·팡’을 맡다가 마침내 주역인 칼라프로 우뚝 선 테너 김영우의 소회도 남다르다. 그는 “예전에 핑·퐁·팡을 할 땐, 분량이 워낙 많아 ‘이 오페라는 핑·퐁·팡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었다”며 “막상 칼라프를 맡아보니 이 작품은 온전히 칼라프의 거대한 서사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웃었다. 수년간 조역으로서 주역들의 무대를 묵묵히 지켜보고 호흡했던 경험은 보다 깊이 있는 칼라프를 만들고 있다
김영우는 “이번이 어림잡아 70번째 투란도트 공연이 될 것 같다. 그중 50번을 독일에서 ‘핑’ 이라는 작은 역할로 무대에 섰다”며 “조연으로 무대에 서며 정작 칼라프를 연기하는 동료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꿈을 키웠다.그 래서인지 저에게 칼라프라는 역할은 저의 인생이 담겨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