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130만톤 통보서 207만톤으로 확대
반토막 위기 넘긴 韓철강
기존 대비 19.7% 감소
주요국보다 감축 폭 작아
포스코·현대제철·세아, 유럽 고객사 대응 강화
CBAM 본격 시행에 탄소 저감 기술도 수출 변수
![]() |
| 이재명 대통령과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가운데), 우르즐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10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EU이사회 본부에서 디지털 통상 협정(DTA) 서명식을 마친 뒤 손을 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이재명 대통령,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우르즐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마로스 셰프초비치 통상 경제 안보 집행위원. [연합] |
[헤럴드경제=정경수 기자] 한국 철강업계가 유럽연합(EU)의 새 철강 수입 규제 속에서도 무관세 쿼터 207만3000톤을 확보했다. 당초 EU가 제시한 물량은 기존의 절반 수준인 130만톤에 그쳤지만, 정부와 업계가 막판까지 협상에 나서면서 감소 폭을 20% 안팎으로 낮췄다.
11일 통상당국과 철강업계에 따르면 EU는 이달부터 역내 철강산업 보호를 위한 새 수입 규제 조치를 시행했다. EU는 전체 철강 무관세 쿼터를 대폭 줄이고, 쿼터를 초과하는 물량에는 50% 관세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수입 문턱을 높였다. 유럽의 철강 보호조치가 강화되면서 글로벌 철강 수출국들의 경쟁도 더 치열해지는 분위기다.
한국에 처음 통보된 무관세 쿼터는 130만톤 수준이었다. 기존 쿼터 258만1000톤과 비교하면 49.6% 줄어드는 규모다. 그대로 확정됐다면 한국산 철강의 유럽 수출 기반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지난 4월부터 스위스 제네바와 벨기에 브뤼셀을 오가며 EU 측과 협상을 이어갔다.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통상·경제안보 집행위원과 네 차례 만나 한국산 철강의 예외적 대우 필요성을 설명했다.
협상 과정에서는 정상외교 일정까지 지렛대로 활용됐다. 산업부 관계자는 “한국에 우호적인 무관세 쿼터가 보장되지 않을 경우, 이재명 대통령의 EU 방문 일정이 취소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EU 집행위원회에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막판에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직접 협상 관리를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아프리카 출장 일정이 있던 셰프초비치 집행위원에게 브뤼셀에 남아 한국과의 협상을 마무리하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 |
|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1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EU 집행위원회에서 마로시 셰프초비치(Maros Sefcovic) EU 통상·경제안보 담당 집행위원과 면담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산업통상부 제공] |
한국은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첫 아시아 국가라는 점을 협상 논리로 내세웠다. 중국·일본 등과 달리 한국산 철강이 EU에서 반덤핑 관세를 부과받은 전력이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한국 철강이 EU 시장을 교란하는 공급원이 아니라, 유럽 내 제조업 공급망을 뒷받침하는 소재라는 논리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의 완성차·부품 공장, SK온 배터리 공장 등 한국 기업들은 유럽 곳곳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다. 정부는 한국산 철강이 이들 생산기지와 현지 고용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EU 측에 설득했다.
협상 결과 한국은 전용 국가쿼터 207만3000톤을 확보했다. 기존 쿼터보다 19.7% 줄어든 수준이다. EU 전체 무관세 쿼터 축소 폭이 40%대 중후반에 달한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 |
주요 철강 수출국과 비교해도 감축 폭은 작은 편이다. 튀르키예는 399만4000톤에서 286만1000톤으로 28.4%, 인도는 278만5000톤에서 194만4000톤으로 30.2% 줄었다. 영국, 우크라이나, 스위스 등은 감축률이 50%를 훌쩍 넘었다. 중국은 EU와 협상에 실패하면서 무관세 쿼터가 3분의 2 가까이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추가 여지도 남아 있다. 한국은 전용 국가쿼터 외에 국가 간 경쟁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용 쿼터 접근 권한도 확보했다. 업계가 공용 쿼터를 적극 활용하면 무관세 수출 가능 물량은 최대 354만8000톤 수준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품목 구성도 의미가 있다. 후판, 선재, 스테인리스 열연 등 한국 철강업계의 주력 제품 일부가 새로 국가별 쿼터에 포함됐다. 단순히 총량을 지킨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수출 비중이 큰 제품군의 기반을 방어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 |
| 유럽연합(EU)이 내달 1일부터 무관세 철강 수입 물량을 대폭 줄이지만, 한국의 경우 기존 한국 쿼터인 258.1만t 대비 약 19.7% 감소한 207.3만t을 확보했다. 이같은 축소율은 EU 전체 파이가 47% 줄어든 것에 비하면 상당히 선방한 것으로 평가된다. [연합] |
국내 철강업계는 일단 한숨을 돌렸다. EU는 아세안에 이어 한국 철강의 2위 수출시장이다. 무관세 쿼터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 경우 가격 경쟁력 약화와 거래선 이탈이 불가피했지만, 이번 협상으로 급격한 충격은 피하게 됐다.
다만 EU 시장의 장벽은 쿼터만이 아니다.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올해부터 본격 시행 단계에 들어갔다.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등 고탄소 제품을 EU로 수출할 때 탄소 배출량에 따른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어, 유럽 바이어들은 가격과 공급 안정성뿐 아니라 탄소 저감 역량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철강사들도 유럽 고객사 대응을 강화하고 있다. 포스코는 프랑스 완성차 업체 르노와 탄소 저감 판재의 중장기 생산 계획을 공유해왔다. 지난달에는 르노코리아 중앙연구소에서 ‘포스코-르노코리아 테크데이 2026’을 열고 전동화와 탈탄소 흐름에 맞춘 기술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 |
현대제철은 최근 월드랠리챔피언십(WRC) 그리스 랠리 기간에 유럽 주요 고객사를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전기로-고로 복합 프로세스’ 기반 탄소 저감 강판 생산 체계를 소개했다. 유럽 완성차 업체들의 저탄소 소재 요구가 커지는 만큼, 탄소 저감 강판을 앞세워 고객 접점을 넓히겠다는 전략이다.
세아그룹도 스페인, 독일 등 유럽 주요국 고객사들과 물량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 보호무역과 탄소규제가 동시에 강화되는 상황에서 기존 거래선을 유지하고, 품목별 쿼터 활용 방안을 세밀하게 조율하겠다는 취지다. 이달 말 영국에서 열리는 판버러 국제에어쇼 등 국제 행사에서도 유럽 고객사와의 접점을 확대할 계획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이번 협상 결과로 EU 시장에서 기존 거래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급변하는 통상환경 속에서 예측 가능한 수출 기반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 쿼터 내에서 안정적으로 거래선을 확보하고 고객 맞춤형 대응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