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자’ 말러?!…사실 양다리에 가스라이팅 일삼는 나쁜 남자였다 [백스테이지]

‘지휘봉을 든 독재자’·‘무대 위 루시퍼’
강박적 완벽주의자이자 위대한 작곡가
지독한 여성편력과 가스라이팅의 흔적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가 등장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 [CJ ENM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하얀 파도가 밀려드는 끝도 없는 바닷가. 서래를 잃은 해준이 모래사장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을 때, 비극처럼 하프 선율이 시작된다. 그 위로 벨벳 같은 현악기가 미끄러지며 잡히지도, 잡을수도 없는 사랑을 그린다.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가 흐르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이다.

“나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했어요.”

훗날 말러의 아내가 되는 19살 연하의 알마 쉰들러는 연인이 보내온 ‘아다지에토’의 초안 악보를 받아들고 이렇게 말했다. 알마는 ‘무언의 세레나데’이자 ‘강렬한 구애’였던 편지의 속뜻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끊임없이 상승하는 미완성의 멜로디는 ‘도달하지 못하는 사랑’의 상징이었다. 그렇기에 더 필사적이었던 말러의 사랑은 ‘구원’을 향해 있었다. 비스콘티의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에서 노년의 작곡가가 아름다운 소년에게 집착할 때, 이 음악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는 지휘봉을 든 독재자였다. “메트릭스처럼 정교하고, 악보에 절대적으로 충실한” 강박적 완벽주의로 카셀, 프라하, 라이프치히, 부다페스트, 함부르크를 거쳐 유럽 음악의 심장인 빈 국립 오페라의 수장이 된 그는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휘자 말러는 갑작스러운 분노의 폭발과 권위주의적 태도로 단원들을 대했다. 그의 별칭은 ‘무대 위의 루시퍼’. 단원들의 영혼을 갉아먹는 강렬한 카리스마가 무대 를 뒤덮기 때문이다.

19세기 낭만주의의 황혼과 20세기 현대음악의 여명을 잇는 ‘가교’였던 말러는 지휘자로서의 삶과 작곡가로서의 삶이 긴밀히 이어져 거대한 음악 세계를 만들었다. 말러가 남긴 음악은 인간 내면의 분열과 고통을 담아낸 최초의 현대적 예술로 평가받고 있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말러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교향곡 안에 온 세상을 다 집어넣었다는 점”이라며 “형이상항적 이상과 가치관을 비롯해 민속음악, 군대 리듬과 같은 통속적 요소까지 통합해 교향곡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음악은 단순한 선율의 조합이 아니다. 말러의 음악 세계는 자신의 삶에서 겪은 실존적 위기, 죽음에 대한 공포, 복잡한 여성 편력, 아내 알마 말러와의 파괴적인 관계가 뒤섞여 만들어진 거대한 심리적 보고서다. 황장원 음악평론가는 “말러 교향곡은 내용도 복잡하고, 층위도 복합적이라 듣다 보면 미궁에 빠지기도 한다”며 “하지만 연주를 꾸준히 접하다 보면 말러는 진정한 휴머니스트이자 낭만주의자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19세기 낭만주의의 황혼과 20세기 현대음악의 여명을 잇는 ‘가교’로 불리는 구스타프 말러(1860~1911) [퍼블릭 도메인 제공]


사랑은 위대한 음악 소재…화려한 ‘여성편력’이 마중물?!


말러는 무수히 많은 여성을 만났다. 20대 첫사랑부터 5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알려진 것만 최소 10명 이상. 적어도 2년에 한 번씩, 혹은 동시다발적으로 여성들을 만난 셈이다.

그에게 사랑은 단지 쾌락이 아닌 가장 위대한 ‘소재’이자 예술 창작에 뿌려진 소중한 씨앗이었다. 말러의 사랑은 그의 ‘끝사랑’ 격인 아내 알마와의 관계가 가장 유명하나 ‘무대 위 루시퍼’는 무대 밖에서도 루시퍼에 버금갈 ‘나쁜 남자’였다. 최근 발견된 나탈리 바우어-레히너의 편지에선 말러가 얼마나 복잡하고 열정적(?)인 ‘여성 편력’의 소유자였는지를 보여준다.

첫사랑은 고향에서 시작된다. 1880년대였다. 말러의 고향 이글라우 우체부의 딸인 요제피네 포이슬이 그의 첫사랑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산하 보헤미아 왕국의 유대인으로 살며 평생 ‘이방인의 정서’를 품었던 그에게 방랑과 상실의 모티프를 안겨준 주인공이다.

두 번째 사랑은 상처였다. 이 사랑은 말러의 삶에 엄청난 실연을 안긴다. 그가 독일 카셀합창단의 부지휘자로 일할 때였던 1883년 8월, 이곳의 오페라 극장에서 스물셋의 청년 말러는 소프라노 요한나 리히터와의 만난다.

말러는 ‘금사빠’가 확실하다. 그는 이 지역 최고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coloratura, 높은 음역에서 기교적으로 부르는 성악가)인 요한나 리히터를 보고 한 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2년 정도 이어졌지만, 그리 건강한 사이는 아니었다. 철저한 ‘권력 관계’가 존재한, 일방적인 사랑이랄까. 말러는 자신을 ‘덜’ 사랑하는 요한나 앞에서 처절한 약자였다.

“심장이 수많은 상처로 피를 흘리고 있다. 지독한 옛 주문에 걸려들었어.”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사랑으로 피폐해진 가련한 영혼이었다. 그 때의 ‘실연의 상처’는 말러 음악 인생의 첫 번째 이정표가 되는 명작을 남겼다. 성악 연가곡집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1883~1885)다. 말러는 요한나를 향한 시련과 아픔을 담아 직접 가사를 쓰고 곡을 붙였다. 첫 곡인 ‘내 사랑의 결혼식 날은(Wenn mein Schatz Hochzeit macht)’은 연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날 느끼는 비통함을 담았는데, 그 내용이 절절하다. 가사도 직설적이다. “내 사랑이 결혼하는 날, 어두운 작은 방으로 가서 우네”라고 노래한다.

말러 연애사에서 가장 위험한 사랑인 마리온 폰 베버와의 불륜. 제미나이로 만든 이미지.


이 곡은 초기 관현악과 가곡을 결합한 양식으로, 말러의 교향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보는 작품이다. 연가곡의 핵심 선율들이 말러의 첫 교향곡인 1번 ‘거인’으로 전이된다. 1번 1악장의 주요 테마는 연가곡의 두 번째 곡인 ‘오늘 아침 들판을 거닐었네’에서 가져왔다. 3악장의 장례 행진곡에 등장하는 서정적인 부분은 네 번째 곡 ‘그녀의 푸른 두 눈’의 선율을 사용했다.

1888년, 말러 연애사에서 가장 위험한 사랑이 등장한다. 그의 여성 편력 중 가장 대담한 사건이었다.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손자인 폰 베버 대위의 아내, 마리온 폰 베버와의 불륜이다.

라이프치히 시절, 말러는 세 아이의 어머니였던 마리온에게 ‘또 다시’ 매료됐다. 그는 마리온에게 아이들을 버리고 자신과 함께 도망치자고 애원한다. 레히너의 기록에 따르면, 이 격정적인 사랑이 말러의 ‘창조적 에너지’를 깨웠다. 이 시기가 바로 위대한 교향곡의 탄생기였다. ‘거인’의 초기 구상이 완성됐던 때다. 둘의 관계는 그러나 말러의 여동생 유스티네의 강한 질투와 개입으로 파국을 맞았다. 유스티네는 말러의 초기 연애사에서 항상 ‘문지기’ 역할을 했다. 오빠의 연인들을 밀어내는 파수꾼이었다.

나탈리 바우어-레히너는 말러의 사생활을 세상에 꺼낸 중요한 기록자다. 비올라 연주자이자 말러의 대학 시절 친구였던 그는 1890~1901년까지 약 10년간 말러의 가장 가까운 지기였으며 연인이었다. 레히너가 남긴 59페이지 분량의 편지인 ‘말러의 사랑에 관한 편지(Brief über Mahlers Lieben)’는 말러의 초기 연애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편지가 없었다면 말러 사생활의 70%는 베일에 쌓였을 것이라고 음악학자들은 보고 있다. 숱한 연애사를 쓰면서도 말러는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은 차단했다. 그는 자신을 이해하는 여성보다 숭배하는 여성을 원했기 때문이다.

말러와 나탈리 바우어-레히너는 1890~1901년까지 약 10년간 만난 연인이자 지기였다. 제미나이로 만든 이미지.


나탈리 바우어-레히너와 만나는 동안 말러의 중기 걸작들이 쏟아져 나온다. 교향곡 3번 (1893~1896)은 ‘나탈리에 의한, 나탈리를 위한 곡’이라 할 만큼 두 사람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작품이다. 생계를 위해 낮에는 지휘자로 살아야 했던 말러가 작곡에 집중한 때는 여름 휴가철이다. 그의 별칭이 ‘여름 작곡가’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탈리는 말러가 교향곡 3번을 작곡하던 여름 휴가 기간 내내 곁을 지켰다. 그러면서 말러의 창작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세밀하게 기록했다. 나탈리는 훗날 자신의 편지에서 “나에 대한 구스타프의 사랑이 10년 동안 메말랐던 그의 창조적 에너지를 깨웠으며, 교향곡 3번과 10개의 가곡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말러가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으로 부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시기엔 교향곡 4번 (1899~1900)이 나왔다. 나탈리는 이 시기에도 말러의 휴식처가 됐다. 교향곡 5번의 초기 구상도 1901년 여름에 시작됐다. 말러의 끝사랑 알마를 만나기 직전이었다. 마이어니히의 ‘작곡 오두막’에서 스케르초를 쓴 말러는 당시 나탈리에게 “이 곡은 전례 없는 에너지의 표현이며, 대낮의 빛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가곡들도 나탈리와 만나던 시기에 나왔다. 나탈리는 말러가 바로 이 민속 시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에 심취해 있을 때 그를 지켜보며 응원한 주인공이다.

나탈리는 말러의 변덕스러운 성격과 신경질을 모두 받아내며 그를 보살폈고, 그의 예술적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동료였으나, 둘의 관계는 평탄하지 않았다. 빈 국립오페라 시절, 말러는 나탈리를 곁에 두고도 ‘나쁜 남자’로서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빈 국립오페라의 수장으로 명성을 쌓을 시기, 나탈리와 안정적인 연애를 하는 동안 스친 소프라노 셸마 쿠르츠. 제미나이로 만든 이미지.


말러는 그 때에도 안나 폰 밀덴부르크, 셀마 쿠르츠 등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들과 숱한 염문설을 뿌렸다. 밀덴부르크와는 함부르크 시절부터 깊은 정신적 유대감을 공유했다. 이 시기 교향곡 2번 ‘부활’이 탄생했다. 대규모 합창과 금관 악기의 장엄한 피날레가 빛나는 곡이다. 밀덴부르크를 빈으로 불러온 것도 말러였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스타 제조기’였다. 말러의 손에 끌려 빈으로 온 밀덴부르크는 단숨에 비엔나의 스타가 됐다.

셀마 쿠르츠와의 연애는 짧지만 강렬했다. 말러는 이 때 교향곡 4번 ‘천상의 삶’을 썼다. 천진난만한 방울 소리와 소프라노가 부르는 천상의 노래가 담긴 곡은 셀마 쿠르츠에 대한 연정의 결과였다. 나탈리와의 안정적 관계 뒤엔 셀마와의 밀애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오페라단 내에서의 결혼 금지 규정과 예술적 야심 등의 이유로 헤어진다. 두 소프라노와의 관계는 말러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것은 물론, 그의 연애관을 형상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여성을 자신의 예술적 완성도를 위한 도구로 보거나 자신의 강박적인 세계에 편입시키려 했던 만남이었다.

바람둥이 말러 탓에 속 꽤나 끓였을 나탈리와의 관계는 1901년 새로운 여자가 등장하며 끝이 난다. 19세 연하 알마와의 ‘환승 연애’로 조강지처 같던 연인 나탈리는 처참히 버려졌다.

말러와 알마의 행복했던 결혼 생활과 고통스러웠던 시기. 제미나이로 만든 이미지.


클래식 역사상 최고의 ‘가스라이팅’…19살 연하 작곡가 지망생과의 사랑


“이 집에 작곡가는 한 명만 있어야 한다.”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예술 가스라이팅’이 있었으니, 그것은 19살 차이의 연상연하 커플 알마 쉰들러(1879~1964)와 구스타프 말러의 관계다.

1901년 11월 7월, 오스트리아 빈 도블링에 위치한 ‘빌라 몰’. 화가 칼 몰(알마의 의붓아버지)의 자택이자 빈의 ‘문화 살롱’에서 ‘운명적 만남’은 시작된다. 상대에게 반하는 데 걸린 시간은 3초. 비엔나 ‘사교계의 여왕’이자 작곡가 지망생이었고, 뭇 남성들의 구애를 받던 스물두 살의 아름다운 알마는 단숨에 구스타프 말러를 사로잡는다. 장 출혈로 건강이 악화됐으나 회복하던 때였고 유럽 최고 권력자인 빈 궁정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이름을 알리던 때였다. 물론 반유대주의자들의 지탄과 언론의 비판을 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19세 차이의 두 사람은 서로를 거스를 수 없었다. 첫 만남에 키스를 하고 4개월 뒤 결혼한 두 사람. 그 때 교향곡 5번(1901~2902)의 초안이 세상에 나온다.

‘금사빠’답게 강렬한 사랑에 빠진 말러는 알마에게 ‘말 없는 사랑의 편지’를 보낸다. 그 유명한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다. ‘매우 느리게’를 의미하는 ‘아다지오’보다는 조금 빠르게 연주하라는 의미의 음악 기호다. 그 시절 둘은 이제 막 교제를 시작하던 때. 하늘의 별도 달도 따주겠노라 약속할 수 있던 그 때 말러는 가사 한 줄 담기지 않은 이 곡의 악보를 알마에게 보냈다. 작곡가끼리만 통하는 무언의 헌사였다.

지독한 장례 행진곡이 끝이 나고, 혼란스러운 스케르초 사이에 등장하는 ‘아다지에토’는 현악기와 하프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안식처다. 하지만 이 곡이 그저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담은 것만은 아니다. ‘아다지에토’가 담은 ‘시대를 초월한 열정’ 뒤엔 알마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여 가두려는 말러의 집요한 의지가 촘촘히 숨겨져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난지 한 달 남짓 지난 1901년 12월 19일. 말러는 알마에게 장장 20페이지에 달하는 편지를 보낸다.

비엔나 ‘사교계의 여왕’이자 작곡가 지망생이었던 알마 쉰들러. 두 사람은 첫 만남에 키스를 하고 만난지 4개월 만에 결혼한다. 사진은 알마 말러와 두 딸 [퍼블릭 도메인 제공]


“한 집에 두 명의 작곡가가 있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당신의 직업은 오직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 하나뿐이어야 한다.”

낭만적 유혹의 선율이었던 ‘아다지에토’와는 완전히 다른 ‘최후통첩’이자 전형적 가스라이팅이다. 그날 밤 알마는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말러의 뜻을 받아들여, 작곡가로의 꿈을 접는다. 말러는 알마의 재능을 인정하기 보다는 그를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액세서리이자 자신의 창작활동을 돕는 보조자로 두려 했다.

1902년 3월 결혼 이후, 말러가 남긴 중기, 후기작이 쏟아졌다.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부터 절망의 심연에 이르는 모든 감정 변화가 투영된 곡들이 세상에 나왔다. 이 시기 곡들은 혁신적인 악기 편성과 함께 대규모의 합창을 도입하는 등 파격적이었다. 또 개인적인 비극이 음악적 상징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중기 교향곡 5번~7번은 알마와의 결혼 초기 완성된 작품이다. 전문가들은 말러의 창의적인 에너지가 가장 넘치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3월 13일), 아시안필하모닉(7월 3일)과 오충근이 지휘하는 부산심포니오케스트(10월 31일)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교향곡 5번 (1901~1902)은 그 대표작이다. 5번은 죽음(장례 행진곡)으로 시작해 환희로 끝나는 영웅적 여정을 담고 있다. 알마에게 쓴 ‘무언의 구혼 편지’인 4악장 ‘아다지에토’는 사랑의 완성이라는 결과물로 돌아온 세레나데다.

얍 판 츠베덴의 서울시향(3월 19~20일), 요엘 레비와 KBS교향악단(5월 28일)이 연주할 교향곡 6번 ‘비극적’ (1903~1904)은 제목과는 달리 말러와 알마의 결혼 생활이 가장 행복하던 때에 쓴 곡이다. 두 딸이 태어난 평온한 시기에 쓰였지만, 가장 어두운 곡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1악장엔 알마의 열정적인 성격을 묘사한 ‘알마 테마’가 들어있고, 피날레 ‘세 번의 해머 타격’은 영웅을 쓰러뜨리는 운명의 타격을 상징한다. 행복 속에서도 느껴지는 불안과 숙명적 예감이 느껴지는 곡이다.

최수열이 지휘하는 인천시향(12월 19일)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교향곡 7번 ‘밤의 음악’ (1904~1905)은 밤의 정서와 낭만성을 극대화한 곡이다. 오케스트라에 기타와 만돌린을 도입하여 사랑하는 이의 창가에서 부르는 세레나데 분위기를 연출했다. 평온한 가정생활, 알마와의 안정적인 삶을 투영한 곡이 이 시기에 나왔다.

19세기 낭만주의의 황혼과 20세기 현대음악의 여명을 잇는 ‘가교’로 불리는 구스타프 말러(1860~1911) [퍼블릭 도메인 제공]


사랑의 균열, 위태로운 알마…큰 딸의 죽음과 외도


“난 가사도우미로 전락했어. 그의 예술은 나를 차갑게 만들어.” (알마의 일기 중)

이내 균열은 시작됐다. 1906년 말러는 빈 국립오페라 감독으로 ‘명성의 정점’에 올랐지만, 부부 관계는 깊은 내면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전도유망한 작곡가 지망생이었으나, ‘음악’과 ‘재능’을 빼앗긴 알마의 자아는 위태로웠다. 이미 1902년 일기에 “나를 발견하도록 도와줄 누군가에 대한 끔찍한 갈망이 있다”고 적었을 정도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됐다. 말러는 겨울엔 지휘자로 ‘살인 일정’을 소화했고, 여름엔 마이어니히의 ‘작곡 오두막’에 스스로를 가뒀다. 알마는 음악도 삶도 빼앗겼다. 사교적 생활을 좋아했지만, 말러는 알마의 모든 것을 통제했다. 알마의 삶은 완전히 사라졌고, 오로지 남편의 천재성을 지탱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심지어 알마는 “작곡가로서 그를 믿지 않는다”며 말러의 음악세계에 공감하지 못했다. 알마에게 남은 것은 깊은 정서적 공허였다.

말러도 알마의 우울증을 모르지 않았다. 그 시기 말러는 ‘구원을 향한 인류의 절규’를 담은 천인 교향곡(1906)을 알마에게 헌정한다. 고통받던 부부관계를 회복하고 알마를 자신의 예술 세계로 끌어들이려 했던 필사적 시도였다. 말러의 강압적 태도와 가스라이팅, 정서적 방임이 누적된 결과물이 결국 8번 ‘천인 교향곡’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듬해 장녀 마리아의 죽음이 찾아오고, 말러는 심장병을 앓게 된다. 그 때 후기 걸작인 ‘대지의 노래’(1908~1909)가 나온다. 말러의 음악이 급격히 관조적이고 염세적인 색채를 띠게 되는 계기다. 동양적 허무주의가 담긴 시를 바탕으로 인생의 덧없음과 이별을 노래한다. 죽음을 앞둔 말러의 정화된 슬픔이 담긴 곡이다. 비슷한 시기인 1909년 완성된 교향곡 9번은 삶에 대한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네는 곡이다. 1악장 도입부의 불규칙한 리듬은 말러 자신의 부정맥(심장 박동)을 음악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끝없는 통제, 그로 인해 자아를 다친 알마의 선택은 외도였다. 큰 딸의 죽음은 도화선이었다. 그 무렵 젊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어리석은 내연남은 연애편지를 말러에게 잘못 보내 불륜은 발각된다. 그 충격으로 말러는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심각한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진다. 급기야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찾아가 상담도 받았다. 당시 프로이트는 말러가 가진 ‘어머니 고착’과 예술적 강박을 진단했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주류업자였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병약하고 감정적이고 의존적인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어머니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여성에게 정서적 구원과 예술적 영감을 요구했다. 이 심리 구조가 말러의 여성 편력에서 보이는 반복적 패턴이었다.

프로이트와의 상담을 통해 잠시나마 심리적 안정을 찾고 알마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애썼다. 그리고 미완성 교향곡 10번(1910)이 나온다. 말러가 죽음을 맞기 전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초고 곳곳엔 알마를 향한 비통한 절규가 남겨졌다. “당신을 위해 살고, 당신을 위해 죽는다!(für dich leben! für dich sterben!)”, “알름쉬(Almschi, 알마의 애칭)!” 같은 외침이 악보 여백에 새겨졌다. 1악장의 거대한 불협화음 아다지오는 그의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했다. 이 곡은 미완성으로 남았으나, 이후 데릭 쿡(Deryck Cooke) 등에 의해 연주 가능한 버전으로 완성했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의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KBS교향악단 제공]


말러가 떠난 후, 결국 알마가 꺼낸 말러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온다.” (말러가 알마에게 보낸 편지)

1년 후, 말러는 세상을 떠났고 알마는 53년을 더 살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교류하며 영감을 주는 ‘위대한 뮤즈’이자 ‘사교계의 여왕’으로 돌아왔다. 알마 역시 말러 못잖은 ‘남성 편력’을 펼치며 남은 생을 보냈다.

말러가 죽고 난 직후인 1911년,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와 3년을 만났다.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는 알마에게 매료돼 완성한 그림이었다. 코코슈카의 집착에 지쳐 알마가 떠나자 그는 알마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사랑을 나눴다. 1915년엔 ‘내연남’ 발터 그로피우스와 다시 만나 결혼, 딸 마논을 낳았다. 결혼 생활은 5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알마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1929년엔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과 세 번째 백년가약을 맺었다. 유대인인 두 사람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베르펠은 ‘베르나데트의 노래’를 써 소설가로 성공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1945년이었다.

베르펠이 세상을 떠난 뒤 미국 시민권을 얻은 알마는 미국에선 엄청난 문화적 영향력을 가지게 됐다. 알마의 거실은 당대 최고의 문화 살롱이었다. 레너드 번스타인, 벤저민 브리튼과 같은 음악가들이 모였다. 번스타인은 알마를 말러와 현대 음악을 잇는 ‘살아있는 연결 고리’로 예우하며 자신의 리허설에 초대하기도 했다.

말러는 살아있을 땐, 작곡가로 끊이지 않는 혹평과 냉대를 마주해야 했다. “지휘자가 취미로 쓴 음악”이라며 폄하됐고, 민요와 군가 리듬, 대중적 선율을 교향곡에 도입해 “진부하고 천박하다”, 거대한 규모에 비해 “음악적 논리가 없다”는 비평이 끊이지 않았다. 빈의 보수적인 언론은 말러의 유대인 배경을 입에 올리며 “유대인 억양으로 말하는 독일어”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알마에게 남긴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알마와 교류한 당대 최고의 스타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말러 부활’의 주역이었다. 번스타인은 1960년 말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뉴욕필의 페스티벌을 선보였고, 몇 번의 전곡 녹음을 통해 ‘말러 시대’의 문을 열었다. 말러의 예언처럼 그의 시대가 왔다. 말러의 복잡한 음악적 언어는 현대인의 실존적 고통을 대변하는 예술로 평가받고 있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는 “말러의 교향곡엔 한 인간이 짊어진 운명, 운명 속에서 몸부림친 자신의 인생과 꺼져가는 운명까지 생의 전 과정이 담겨있다”고 했고,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말러의 음악은 우리 주변에 있는 재료들로 만들어 청중들이 상황이나 경험 그리고 감정을 더 투영하게 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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