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를 품어 안아 천하를 제패하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용인술

전란을 종식시키고 260년 평화와 번영의 도쿠가와막부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출처 야후재팬 화상]



“주판알만 튕기는 저놈 때문에 내 창자가 썩고 있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제패하여 쇼군으로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1606년 어느 날, 병석에 누워 있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주군 이에야스가 병문안 보낸 가신에게 “주군 곁에 붙어있는 혼다 마사노부란 자는 창과 칼은 쓸 줄 모르고 오로지 주판알만 튕기는 놈이오. 저런 놈 때문에 내 창자가 썩고 있소”라며, 마사노부를 곁에 두고 끼고도는 이에야스를 향해 불평을 쏟아냈다.

야스마사는 이에야스의 젊은 시절부터 고락을 나누며 사선을 함께 넘어온 충직한 ‘도쿠가와 4천왕’ 가운데 한 명이었다. 도쿠가와 4천왕은 이에야스의 고향 오카자키성(현 아이치현 오카자키시)과 그 주변 지방 출신으로 이에야스가 천하를 제패하기까지 그를 보좌한 중추적인 무사 가신단이다. 이들은 어느 날 이에야스의 최측근 자리를 꿰찬 마사노부를 가리켜 간신배, 겁쟁이라고 부르며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마사노부가 한때 이에야스를 배신한 전력이 있던 만큼 한층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런 4천왕의 질투와 견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사노부를 자기 곁에 두고 힘을 실어주며 일을 맡겼다.

주군에게 칼을 겨눈 혼다 마사노부

오카자키성의 성주, 이에야스의 유소년에서 청년 시절까지의 삶은 불우했다. 3세 때 부모가 이혼하자 모친과 생이별하고 8세에 부친 히로다다가 사망하면서 그의 가문은 몰락했다. 그해, 오카자키성 인근의 유력한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거지 순푸(현 시즈오카시)에 인질로 보내져 그곳에서 19세까지 지냈다. 순푸 시절 이에야스의 유일한 즐거움은 사냥매를 날려 들짐승을 잡는 매사냥이었는데 이 사냥매를 사육하고 길들이는 일을 하는 가신이 마사노부였다. 그는 이에야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벗이기도 했다.

어느 날, 이에야스를 인질로 잡고 있던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를 침공했다가 노부나가의 기습 작전에 말려들어 사망하게 되고 이로써 이마가와 가문은 몰락했다(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 이는 이에야스에게 독립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무너진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으며 오카자키성 일대의 미카와 지방의 통일에 나서는데 이때 뜻밖의 복병을 만난다. 그 복병이 바로 불교 정토진종파 혼간지 세력이었다. 혼간지 세력은 이 지역에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고리대금업도 하면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이 지역을 장악해 나가자 자기 기득권이 침해당한다며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야스는 1년여에 걸친 전투 끝에 혼간지 세력을 진압하고 미카와를 평정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에야스에게 뼈아팠던 것은 가신들의 배신이었다. 그의 가신들 가운데에는 혼간지 신도가 적지 않았다. 특히 가장 믿었던 마사노부가 혼간지 편에 가담하여 이에야스에게 칼을 겨누었다. 주군보다는 종교를 선택한 것이다. 이에야스는 봉기에 참여한 다수의 가신은 사면했으나 마사노부는 고향에서 추방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에야스의 나이 고작 20세, 젊은 영주로서는 쓰라린 경험이었다.

도쿠가와 막부 성립의 최대 공로자, 혼다 마사노부. [출처 : 야후재팬 화상]


이에야스, 배신자 마사노부를 다시 불러들이다

고향에서 추방당한 마사노부는 고난의 방랑 생활을 이어가며 각지를 떠돌다가 혼간지 세력의 총본산인 오사카의 이시야마혼간지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곳에서 천황가와 유력 무사들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에야스 가신단의 중진인 오쿠보 다다요는 정보와 인맥을 가지고 있는 마사노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이에야스에게 마사노부의 복귀를 건의했다. 이에야스는 과거의 앙금을 풀고 ‘순푸 인질 시절의 유일한 벗’으로서의 마사노부를 다시 불러들였다.

마사노부는 10년 남짓의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에야스의 전략가로 활약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에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의 심복 이시다 미쓰나리 세력 간에 벌어졌던 전투(‘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쓰나리 측의 핵심 다이묘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회유하여 전투의 물줄기를 이에야스 쪽으로 바꿔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에도의 최대 번화가 니혼바시 거리. [출처 : 도쿄시타마치문화연구회]


도쿠가와 막부 성립의 최대 공로자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막부가 설립된 이후에 오늘날의 국무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의 권한을 합친 ‘도시요리’에 마사노부를 임명하며 일본 개조작업에 착수했다. 마사노부는 에도성 개축, 운하 건설, 신시가지 조성을 위한 해안가 매립 등을 완성하고 인적 왕래와 물류 활성화를 위해 에도에서 오사카와 교토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여 경제권을 광역화했다. 인프라가 구축되자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스미토모, 미쓰이 등 오늘날 일본의 중추 기업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초기의 일본 대개조 작업의 성공으로 약 260년에 걸친 번영과 평화 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느 일본 역사가는 “마사노부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도쿠가와 막부 체제는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배신자를 품어 안은 통 큰 용인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를 손에 넣고 일본 역사에서 명군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렸다.